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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만세’는 1994년 제51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최고상인 황금사자상을 수상하며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차이밍량 감독은 허우샤오시엔, 에드워드 양과 함께 1990년대 대만 뉴웨이브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꼽힌다. 30주년을 기념해 4K 리마스터링 재개봉하는 ‘애정만세’는 오는 8월 12일 CGV아트하우스를 비롯한 전국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영화 <애정만세> 리뷰 영화 <애정만세> 메인 포스터 차이밍량 감독의 <애정만세>(1994)가 31년 만에 재개봉한다. 세 명의 남녀, 하나의 공간, 서로의 마주침과 엇갈림. 대사를 최소화한 채 행동과 표정으로 인물의 감정하고 서사를 끌고 가는 미니멀한 방식까지, <애정만세>가 당대에 남긴 영화적 스타일은 하나의 경향이자 주된 흐름이었다. 대만 뉴웨이브를 거쳐 홍상수 감독의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1996)을 포함해 90년대 아트시네마의 한 축에서는 침묵으로 흐르는 화면 이면에 감정의 깊은 파고를 담아내는 것이 특징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대체로 ‘사랑의 불가능성’, ‘현대인들의 고독한 내면’, ‘존재론적 공허함’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받아들여지며 고도의 경제성장 아래 점차 파편화되는 현대인들의 삶을 담아내고 있다고 평가되었다. 그런데 31년 만에 우리 앞에 다시 도래한 <애정만세>는 당시의 논의들과는 조금 다른 결로 다가온다. 시대가 변했기 때문에 영화를 바라보는 시선도 변한 탓일까? 아니면 여전히 반복되는 현대인의 파편적 삶이 이 작품을 우리 앞으로 다시금 호명한 것일까? 이유가 무엇이든 2026년에 마주한 <애정만세>는 31년 전 그 작품이 아님에는 분명하다. 긴 시간의 차이 속에서도 살아 숨 쉬는 작품의 생동감의 근원을 조심스레 들여다본다. 열쇠와 빈 아파트: 고독이 공유되는 최초의 장소 영화 <애정만세> 스틸컷 모든 것은 아파트 문에 꽂힌 열쇠를 납골당 영업사원 샤오캉(이강생)이 발견하는 순간부터 시작되었다. 부동산 중개인 메이(양귀매)와 거리에서 옷을 파는 아룽(천자오룽)을 포함해 세 사람 각자가 소유하고 있는 아파트 열쇠는 이들이 하나의 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다. 공간을 점유하는 것은 한 존재가 그곳에서 숨 쉬고, 채취를 남기고, 시간을 보낸다는 걸 의미한다. 그리고 공간을 공유한다는 건 서로의 숨과 채취, 시간이 마주치고 엇갈리며 뒤엉킨다는 걸 의미한다. 이들은 처음엔 서로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공간을 분리하고 시간이 겹치지 않기 위해 극도로 조심하지만 샤오캉과 아룽은 이곳에서 서로 친구가 되고 아룽과 메이는 두 번의 성관계를 맺으며 공간을 공유한다. 영화 <애정만세> 스틸컷 물론 아파트를 공유하는 이들의 관계 속에서 어떤 친밀함이나 소통 가능성을 발견할 순 없다. <애정만세>의 아파트는 그런 의미에서 가장 역설적인 공간이다. 아파트를 함께 공유하고 있음에도 지울 수 없는 넓은 여백과 적막은 그들이 얼마나 서로의 삶 바깥에 머물러 있는지, 욕망과 감정이 서로를 향하기 보다 각자의 은신처 속에 고립되어 있는지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애정만세>의 스타일에 담긴 침묵과 고독의 무드가 영화의 결론이 아니라 전제에 가깝다면, 그래서 아파트의 공간이 관계가 실패하는 장소가 아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잠시 머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라면, 우리는 <애정만세>의 미니멀한 스타일을 새롭게 사유할 수 있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영화가 실제로 묻는 것은 그 이후의 문제, 서로 닿을 수 없는 사람들이 무엇으로 함께 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일 수 있다. 그 질문이 집중되는 곳은 결국 아파트다. <애정만세>의 아파트는 그 모든 존재 가능성과 불가능성, 관계에 대한 희망과 절망, 욕망의 충돌과 수용이 공존하는 시공간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애정만세>의 아파트를 중심으로 새로운 관계의 가능성을 탐구해 볼 수 있다. 파편화된 관계 속에서 그들이 서로 연결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면, 그 가능성은 우리의 기대와 상상과는 달리 다른 방식으로, 불가능성을 수용한 채로 서로의 느슨하게 연결된 관계 속에서 새롭게 탐구해야 한다. 아파트 밖의 세계, 아파트 안의 안식: 세 인물의 고독 영화 <애정만세> 스틸컷 돌이켜보면 영화는 유독 아파트와 아파트가 아닌 공간들로 구획이 나눠져 있다. 메이에게 아파트가 아닌 곳들은 모두 판매 대상이다. 분명 아파트도 매매로 나온 매물이지만 메이는 이 공간에 적극적으로 손님들을 불러 모으지 않는다. 아파트보다 더 넓고 창 밖에 넓은 마당이 펼쳐진 꿈같은 집에서 그녀는 방문객들의 눈치를 살피고 그들이 집을 살지 말지에 온통 촉각을 기울인다. 전화를 돌리고, 판촉물을 세우고, 어떻게든 판매해야 하는 곳들 속에서 그녀는 절대 안정감을 느낄 수 없다. 오직 매매를 위해 공간을 평가하고 저울질하는 시선과 발걸음 속에서 그녀는 그들의 눈치를 살펴야 하는 판매자의 위치에 고정될 뿐이다.  반면 아파트에서 그녀는 잠을 자고, 밥을 먹으며, 성관계를 한다. 이곳은 단 한 번 등장하는 메이의 집보다 더 안락하고 안전하다. 그녀는 집에서 온수 목욕을 하며 쉬는 동안에도 망가진 보일러의 가스 냄새에 잠시 위기를 느껴야 했다. 하지만 아파트에선 잠시 누워 있는 순간에도 깊은 잠에 빠진다. 아파트와 매물로 나온 빈 집들 사이의 유사성이 있다면 삶을 기다리는 새로운 존재가 들어설 여지를 품은 공간이라는 점일 테다. 아파트 밖의 공간들이 그 가능성을 타인에게 판매해야 하는 곳들이다. 대신 아파트만큼은 전적으로 그녀가 독점하고 향유한다. 그녀에게 아파트는 유일한 안식처다.  영화 <애정만세> 스틸컷 샤오캉에게 아파트 밖은 죽음을 판매해야 하는 시공간이다. 사람이 아무리 많은 커피숍에 들러도, 동료들이 일하는 사무실에 있어도, 심지어 그들이 게임을 하며 즐겁게 노는 순간에도 아룽은 그들과 뒤섞이지 않는다. (또는 못한다) 샤오캉이 아룽과 함께 납골당을 찾아갔을 때 마주친 납골당을 소개하는 투어에서 가이드는 말한다. “층의 높이에 따라 가격이 다릅니다” 죽어서도 서열이 나뉘고 계급이 구분되는 현실에서 죽음은 더 이상 고독으로 연결되지 않는다. 죽어서도 현실의 고통이 연장되는 지독한 현실일 뿐이다. 하지만 이것만으로 샤오캉이 세상과 섞이지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기란 어렵다. 유일한 단서는 아파트에서 남몰래 여자 옷을 입어보는 샤오캉의 내밀한 사생활에 있다. 죽음을 판매하기 때문이기 보다 자신의 성 정체성이 남들과 다르기에 다가갈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유가 무엇이든 샤오캉에게 아파트는 자기 자신을 만나고 표현하고 드러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아룽은 거리에서 옷을 팔다 경찰이 단속을 나오면 곧바로 매대를 접는다. 차를 갖고 있지만 집은 없어 보이는, 일터조차도 한 곳에 머물 수 없이 떠돌아야만 하는 아룽에게 아파트는 유일하게 고정된 시공간이다. 아파트 밖의 세계에서 그의 존재는 모순적이다. 아룽은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사업가로서, 무역하는 사람으로 말하며 스스로를 꾸민다. 하지만 아파트에서 그는 성욕을 드러내고 샤오캉에게 자신의 본 모습을 솔직히 드러낸다. 세 인물 중에서 아파트를 점유하려는 욕망이 가장 적어 보이는 자는 아룽이다. 하지만 그렇기에 아룽을 통해 샤오캉과 메이는 함께 연결된다. 아룽이 없었다면 아파트는 철저한 분리된 공간, 침묵과 고독 속에 더욱 존재를 고립시키는 공간이 되었을 것이다. 아룽은 이를 해체하고 공간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그렇게 아룽은 아파트를 자신의 삶의 터전으로 만들어간다. 관계가 아닌 공존: 불가능성 속의 위로 영화 <애정만세> 메인 포스터 관계의 지속이 서로를 이해하고 소유하며 지속하는 일이라면, 공존은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의 고독까지도 같은 장소 안에 머물도록 내버려두는 일에 가깝다. 세 인물은 끝내 하나의 공동체가 되지 못한다. 그들이 지나간 방과 복도, 납골당의 좁은 칸과 비어 있는 집들은 각자의 외로움을 보관하고 품는다. 공간은 그들을 화해시키거나 어떤 가능성으로 탐구하지 않지만 누구의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공허 속에 함께 있게 한다. 어쩌면 타인과 소통하고 연결될 수 있는 친밀감을 느낄 수 없는 사회 속에서 이 정도의 느슨한 가능성이라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할지 모른다. 메이의 마지막 눈물은 바로 이러한 불가능성의 가능성에 대한 애도다. 원하는 만큼의 애정과 사랑을 나누고 공유할 수 있는 공동체를 상상하는 것이 불가능에 가깝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 하지만 그럼에도 작은 공간에서 서로를 알지 못하는 낯선 타인과 고동의 풍경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위로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의 깨달음. 결국 <애정만세>는 고독이 해소될 수 없음을 이야기하면서 동시에 고독이 혼자만의 것이 아님을 감각하게 함으로서 대중을 위로한다. 그 위로가 31년이 지난 지금에도 유효하다면, 그 세계를 우리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까? 정말 오랜만에 <애정만세>를 다시 관람하며 마음속에 품게 된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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