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 독립 영화 거장 짐 자무쉬 감독 작품으로, 제82회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 미국 북동부, 아일랜드 더블린, 프랑스 파리의 세 가족 이야기를 그린 3부작 영화다.
- 12월 31일 개봉해, CGV 아트하우스를 포함한 전국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영화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 리뷰

짐 자무쉬 감독에게 평범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겉으로 평범해 보이는 일상 속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커다란 폭탄이 숨겨져 있다고 상상하는 것이 짐 자무쉬의 세계다. 그의 세계는 부조리한 상황 속에서도 무덤덤하게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 찬 모순된 시공간이다.
그래서 그의 장면들 속엔 지리멸렬한 일상과 이유를 알 수 없는 긴장이 매 순간 충돌한다. 의미를 건져 올릴 수 없는 대화들 사이사이 삶의 무게가 무겁게 짓누르고, 멍하니 바라보는 텅 빈 시선들 속에 깊이를 알 수 없는 공허함이 가득 차 있다.

물론 짐 자무쉬 감독은 모든 작품 속에 의미를 건져 올릴 수 있도록 하나의 키워드를 심어 놓는다. 어떤 작품에선 커피와 담배였고 또 어떤 작품에선 흡혈귀와 좀비였다. 때로 이주/이산민들의 시선이 일상을 낯설게 만드는 도구가 되기도 하고, 시와 음악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으리라 희망 섞인 일상을 무덤덤하게 펼쳐 보이기도 했다.
그리고 2025년, 그는 ‘가족’이란 키워드로 우리의 가장 친밀한 관계들을 낯설게 만든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철저히 사회적 계급으로 치환하려 시도 하다가도, 문득 그럼에도 가족 사이에 존재하는 의무감과 책임감을 해부하며 가족이란 무엇인지 질문한다. 이 질문은 절대 ‘가족은 필요악이다’라는 단순한 논리로 귀결되지 않는다. 어쩌면 우리에게 꼭 필요한 존재일 수도 있는 가족을 어떻게 하면 새롭게 재의미화할 수 있는지 탐구하는 보고서에 가깝다.
파더

도시로부터 떨어져 살아가는 나이 든 아빠, 그의 자녀들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 홀로 살아가는 아빠를 챙겨야 한다는 책임감 속에 시골집을 찾는다. 부모와 자식 간의 의무감은 도덕적 기준에서 당연시된다. 하지만 친밀감이 사라진 관계에 남은 의무감은 허울뿐이다. 자식에게 돌봄을 강요하지도, 부모를 돌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 시대라면 이러한 의무감은 더더욱 빨리 떨쳐 버리고 싶은 짐일 수 있다.
‘파더’ 에피소드의 아빠(톰 웨이츠), 아들 제프(아담 드라이버), 딸 에밀리(마임 비아릭)의 일상 속엔 그 짐을 빨리 져 버리고 싶은 답답함으로 가득 채워져 있다. 표면에 흐르는 이들의 감정들은 도덕적 틀 안에서 간신히 서로를 향한 끈을 붙잡고 있는 형국으로 묘사된다. 자녀들은 아빠와의 관계가 껄끄럽지만, 아빠의 연약함을 애써 외면할 수 없다. 아빠는 자녀들의 도움이 필요하지만, 그 도움을 노골적으로 요구할 수 없다.

감독은 일상의 겉모습 너머를 들여다보기 위해 의도적으로 빌헬름 라이히의 책 ‘파시즘의 대중심리’를 꺼내 든다. 사회적 억압과 모순이 개인의 무의식과 성적 억압에 결합했을 때 파시즘이 강화될 수 있음을 지적한 라이히의 주장은 ‘아버지’ 권력이 여전히 자녀들의 무의식 속에 개입해 그들의 죄책감을 도구 삼아 군림할 수 있음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다.
짐 자무쉬에게 가족은 더 이상 사랑과 정으로 연결된 공동체가 아니다. 나이 들고 연약한 노년의 아빠는 여전히 아이들 위에 아버지 권력으로 군림하고 자녀들은 그 아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서로에 대한 신뢰가 아닌 의무감으로 연결된 관계를 하나의 공동체라 부를 수 있을까? 아버지 권력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마지막 반전을 확인하고 나면 우린 모두 깨닫는다. 가족은 정말 알다가도 모를 일이라고.
마더

유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인 엄마(샬롯 램플링)가 두 딸을 티타임에 초대한다. 예민하고 소심한 큰딸 티모시(케이트 블란쳇)와 자유분방한 영혼을 품고 즉흥적으로 살아 나가는 릴리스(비키 크립스)에게 엄마는 든든한 기둥이자 거대한 장애물이다. 엄마는 딸을 사랑하고, 딸들은 엄마를 존중하고, 그들의 티타임은 그렇게 무난하게 흐르는 듯싶다.
하지만 차를 따르고 케이크를 나누고 서로의 일상을 이야기하는 사이사이로 참을 수 없는 어색함이 공기를 가득 채운다. 어색함의 근원은 엄마의 당당한 시선에 있다. 전화로 상담을 받으며 자신의 무의식을 관리하는 엄마의 단단한 자아가 딸들에겐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한 명은 너무 부족하고, 다른 한 명은 너무 비대하고, 엄마와 딸들 사이에 존재하는 자아의 비대칭이야말로 그들 사이에 흐르는 어색함의 근원이다.

아버지의 권력이 가족들의 관계를 형식적으로 얽어매고 있다면, 어머니의 단단한 자아는 수많은 규칙과 규율을 만들어 내며 가족들을 제압한다. 아버지 권력이 폭력적으로 가족들의 무의식을 파고든다면 어머니의 단단한 자아는 가족들의 자아를 포로 삼는다.
짐 자무쉬에게 가족은, 적어도 부모는 이런 존재들이다. 자신의 권위를 내세우고, 이로써 가족 관계를 수직계열화시키는 존재들. 그 아래에서 자녀들은 차가워지거나(제프, 에밀리) 뜨거워지거나(티모시, 릴리스), 둘 중 하나로 성장할 뿐이다.
시스터 브라더

짐 자무쉬 감독은 마지막 에피소드에 와서야 비로소 부모가 부재한 가족 형태를 선보인다. 경비행기 사고로 부모님을 모두 여읜 빌리(루카 사바트)와 스카이(인디아 무어)는 부모님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 파리의 집으로 향한다. 그들은 여지없이 부모님을 애도하고 상실의 아픔을 서로에게 기대어 위로한다.
남매의 대화를 빌어 추측해 본다면 그들의 부모는 제프, 에밀리의 아버지나 티모시, 릴리스의 어머니 못지않게 자신의 삶을 더 중시 여긴 자들이었다. 그들 밑에서 남매는 행복했던 기억보다 상처받은 기억이 더 많을 수도 있겠지만 영화는 부모님의 생전 갈등을 부각하기보다 애도에 초점을 맞춘다.
유품 속에 남은 사진과 증명서들을 보며 남매는 추억에 젖고 과거의 기억은 의미 있는 행복한 감각으로 두 사람의 현재를 품어 안는다.
아프고 힘들었던 과거를 추모하고 애도할 수 있는 힘은 어디서 발현되는 것일까? 시간의 흐름이 과거를 망각시키며 결국 행복한 바이러스를 유발한 결과일까? 텅 빈 부모님의 집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는 남매의 모습이 분절된 공간과 만화경처럼 중첩된 이미지로 표현된 것은 그들의 기억이 조각났기에 애도할 수 있는 힘 또한 얻을 수 있음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다.
트랜스젠더 여성으로서 스카이가 겪었어야 할 부모님과의 갈등, 포용과 관용보다 자신들의 자아를 더 내세웠을 부모들의 언행이 자녀들에게 끼쳤을 영향력이 얼마나 컸을 지 감독은 애써 언급하지 않는다. 대신 남매의 애도를 통해 가족이란 공동체가 어떻게 추억되고 기억될 수 있는지 가늠케 한다.
애도의 감정을 통해 남매의 부모님을 향한 애정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부모님이 부재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짐 자무쉬에게 가족은 결국 부재를 통해 완성될 수 있는 공동체인 셈이다.
밥이 네 삼촌이다. Bob’s your uncle

세 개의 에피소드를 관통하는 몇 개의 키워드 중 유독 관심이 가는 것은 ‘밥이 네 삼촌이다’라는 영국 속담이다. 겉보기에 무척 복잡해 보이는 일이지만 실상은 매우 간단한 문제였음을 뜻할 때 쓰는 관용구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는 희망은 때로 문제의 핵심을 눈 가리는 수단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당장의 고통에 휘말리기보다 모든 일이 잘 풀릴 거라는 희망을 품는 것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파더 마더 시스터 브라더>의 가족들은 모두 과거에 묶여 있다. 과거의 사건, 과거의 기억, 그로 인한 추억들이 현재의 가족을 만들고, 그들은 그렇게 분열된 틈을 애써 모른 척 외면하며 간신히 부여잡고 있다. 만약 미래엔 괜찮을 거라는, 모든 것이 잘 풀릴 거라는 위로가 그들의 현재를 버틸 수 있게 한다면 적어도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 새로운 가족 관계를 이어 나가볼 수도 있지 않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