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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드보일드. 미이케 다카시 영화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단어다. 그가 창조한 영화 속 세상은 비정하고 잔혹한 풍경 사이로 오물이 잔뜩 묻은 들꽃 한 가닥이 가녀리게 피어나는 곳이다. 절대로 단단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처럼 처절한 지옥도를 선사해왔던 그가 이번엔 ‘첫사랑’을 이야기한다. 과연 미이케 다카시 감독이 지옥도 속에서 그려내는 첫사랑은 어떤 향기를 내뿜고 있을까? 이동윤 | 영화 평론가 툭하면 영화 보고 운다. 영화의 본질은 최대한 온몸으로 즐기는 것 하루살이 인생들이 펼쳐내는 광란의 서사 신주쿠의 조직 범죄 사건을 지켜보는 카세(소메타니 쇼타)와 오토모(오오모리 나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모든 것은 야쿠자 조직원 카세(소메타니 쇼타)와 부패 경찰 오토모(오오모리 나오)의 뒷거래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중국에서 유입된 신흥 마피아 두목의 왼팔을 자르고 감옥에 들어간 신주쿠의 무력파 보스 곤도와 그의 출소를 기다렸던 중국 마피아 두목 사이의 긴장이 극대화 된다. 두 조직의 싸움에 휘말려봤자 파리 목숨일거라 판단한 카세는 오토모와 함께 곤도 조직이 거래하던 필로폰을 훔쳐 달아날 계획을 짠다. 위기 속에서 기회를 엿본 이들의 계획에 어깃장을 놓은 자는 바로 고독한 복서 레오(쿠보타 마사타카). 뇌종양으로 시한부 선고를 받은 그는 세상을 향한 분노의 주먹을 휘두르다 이들의 계략에 휘말린다. 위기에서 벗어난 레오와 모니카(야지마 마이미)(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일종의 소동극이라 볼 수 있는 ‘퍼스트 러브’의 서사는 마피아, 부패 경찰, 가정폭력에 희생당한 성매매 여성, 고독한 복서와 같은 주변부로 밀려난 자들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하루살이 인생들인 만큼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영화 속 인물들은 충동적 욕망과 판단으로 광란의 서사를 직조해낸다. ‘퍼스트 러브’의 ‘소동’에는 그 어떠한 인과성도 개입되지 않는다. 지리멸렬한 운명에 대한 비아냥거림만 난무할 뿐이다. 하지만 미래를 저당 잡힌 자들의 운명에 대한 조소는 역설적으로 현실을 비판하는 힘을 지닌다. 그래서 극중 인물들이 만들어내는 소동은 현 일본 사회에 대한 감독의 강한 비판적 시선으로 은유된다. 주변화 되어버린 신주쿠의 을씨년스러운 풍경 위기를 간신히 모면하는 주리(벡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곤도의 조직은 자본의 전지구화 속에서 글로벌화에 실패한 지역 토착 마피아다. 도쿄의 신주쿠를 기반으로 세력을 유지하던 그들은 과거의 화려한 명성을 유지하지 못한 채 새로 유입된 중국의 마피아 조직과 갈등을 빚는다. 그래서일까? 극중 초반, 오토모와 모니카, 레오가 마주치며 중요한 사건이 발생하는 도쿄 신주쿠의 뒷거리는 그 어떤 영화에 등장한 풍경보다 훨씬 을씨년스럽고 초라하다. 심지어 얼마나 급하게 프로덕션이 운영되었는지 뒷배경에 스치고 지나가는 행인들이 모두 카메라 쪽을 바라보며 구경하고 서 있는 모습들조차 여가 없이 드러난다. 현장을 거의 통제하지 않고 찍은 흔적들이 곳곳에서 발견되는, 일종의 ‘아마추어리즘’은 감독의 영화의 중요한 미학적 특성이기도 하지만 ‘퍼스트 러브’에서는 그러한 흔적들조차 한 때 전 세계의 경제를 주름잡았던 일본의 초라한 현재를 돌아보게 만드는 요인들로 작용한다. 곤도의 야쿠자 조직원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어쩌면 기울어져가는 일본의 경제적 상황 속에서 더욱 외면 받는 주변부 인물들은 그 속에서 자신들끼리 더욱 처절한 싸움을 매일같이 벌여가며 간신히 기생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카세는 오토모에게 계획에 동참할 것을 제안하며 위기 속에서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자는 공무원뿐이라 말하지만 공무원인 오토모 조차도 믿을 수 없는 자 이긴 마찬가지였다. ‘중심’이라 할 만한 권력조차 남아 있지 않은, 철저히 주변화 되어버린 영화 속 신주쿠의 풍경은 그래서 더욱 절망적이고 처절하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는 인의 ‘쇼와잔협전’ 시리즈의 대표작, ‘쇼와잔협전: 죽어주셔야 되겠습니다’(1970) 메인 포스터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중국 마피아 조직의 조직원 치아치(후지오카 마미)는 다카쿠라 켄이 주인공으로 등장했던 야쿠자 영화들을 좋아한다. “일본인이, 그것도 야쿠자가 맹자의 가르침”인 ‘인의’(仁義)를 지키고 따르기 때문이다. 아마도 다카쿠라 켄이 주연을 맡았던 1960, 70년대 시리즈물 <쇼와잔협전 昭和残侠伝>을 좋아했을 그녀는 영화를 통해 야쿠자에 대한 동경을 품고 도쿄로 왔지만 막상 현실 속 마피아들은 전혀 영화 속 인물들과 같지 않음을 깨닫고 실망한다. ‘쇼와잔협전’ 시리즈는 쇼와 시대에 활동했던 마피아의 모습을 재현한 임협(任俠) 마피아의 대표작들이다. 임협 서사는 하층민들의 거칠고 야생적인 세계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이상화시켜 진흙탕 속에서도 끈질기게 피어나는 인간애를 중요한 가치로 부각시킨다. ‘차마하지 못하는 마음’(仁)과 ‘부끄러워서 하지 않는 마음’(義)을 끝까지 지켜내어 남을 해치지 않고, 남의 것을 도둑질 하지 않는 이상적 사회를 강조했던 맹자의 가르침은 ‘퍼스트 러브’의 세상 속에서 고스란히 실현된다. 공구상에서 야쿠자와 대립하는 치아치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인위를 실현하는 주체는 레오다. 그는 카세와 오토모, 중국 마피아들로부터 모니카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도 내던진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시한부 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다. 곧 죽게 될 운명에서 그의 두려움은 사라진다. 그리고 오직 잔혹한 폭력 속에서 무참히 짓밟혀 왔던 모니카를 구하는 것만이 그의 유일한 목표가 되어 버린다. “죽을 각오를 하면 못할게 없다”는 깨달음을 얻는 순간 치아치는 그에게 맹자의 가르침, ‘인의’를 전한다. 인의라는 소중한 가치들이 죽을 각오를 해야만 실현 가능한 사회. 바로 미이케 다카시 감독이 바라보는 현 시대의 단면이다. 질 나쁜 세계에서 발견한 소중한 가치들 곧 죽게 될 운명에 두려움마저 사라진 후 모니카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레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미이케 다카시 감독은 ‘퍼스트 러브’를 통해서 비정한 사회 속에서 첫사랑이 가능할 수 있는 몇 가지 조건을 내건다. 그건 바로 ‘인내’이다. 마약에 중독된 모니카는 신체를 정화시키기 위해 고통을 인내한다. 레오는 다시금 링 위에 오르기 위해 지난한 연습의 세월을 인내한다. 이 두 사람이 만들어가게 될 ‘첫사랑’은 고통을 동반한, 그 고통을 넘어서야만 실현 가능하다. 단지 낭만적으로 그 사랑을 꿈꾸고 그리던 시대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 원하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 죽기 살기로 달려들어야만 간신히 버텨나갈 수 있는 세상. 그 자체로 지옥이라 여겨지지만 다카시 감독은 그 지옥 속에서 꽃 피워내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가치가 있음을 역설한다. 영화 ‘요괴대전쟁’ 당시 현장을 지위하는 미이케 다카시 감독(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다카시 감독의 이러한 주장은 그의 삶의 경험에서 비롯된다. 미이케 다카시 감독은 오사카에서 태어나 뒷골목에서 자랐다. “나는 오사카에서 태어났는데, 무척 질나쁜 동네였다. 문제도 많았고, 이상한 사람들도 많았다. 그 안에서 뭔가 느껴지는 것들이 있었다.”(씨네21) 감독은 어릴 적부터 거친 ‘임협’의 세상 속에서 자랐다. 표면적으로는 ‘질 나쁠’지언정 그는 그 세계를 동경했다. 동경의 이유는 바로 그 세계 속에서 소중한 어떤 가치를 발견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 가치를 감독은 ‘퍼스트 러브’를 통해서 말한다. 타인을 돕고 고통을 모른 척 하지 않으며 서로 사랑하는 사회. 이젠 이런 말을 꺼내는 것조차 ‘오글거린다’고 표현할 정도로 고리타분한 가치가 되어버렸지만 그 오글거림 너머에 어쩌면 우리가 간절히 바라는 이상적 사회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퍼스트 러브’가 전하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되는, 한 번 맡아 본다면 절대 잊지 못할 향기로 기억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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