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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집을 나선다. 어스레한 빛은 서서히, 그러다 갑자기 환해질 것이다. 자연의 운행에는 어김이 없다. 사람의 일은 그보다 변덕스러울 것이다. 일상에 드리운 불확실성의 안개는 완전히 걷히는 법이 없다. 서울로 나가는 광역버스를 탄다. 나는 언제부턴가 서울 도심을 읍내로 부르곤 한다. 그렇게라도 거대 도시의 위압감을 덜어내고 싶었을까. 서울은 흔히 1000만 도시라고 한다. 엄밀한 숫자는 아니다. 2022년 말 주민등록상 서울 인구는 943만 명이다. 20년 전 정점 때보다 150만 명이 줄었다. 하지만 낮에 서울에서 생활하는 인구는 평균 1084만 명에 이른다. 일터와 학교에 늦지 않으려고 이 어스름에 버스를 탄 이들은 어떤 하루를 그리고 있을까. 읍내까지는 한 시간 거리다. 차 안에서 쪽잠을 자는 이들이 많다. 현대인은 늘 지위에 대한 불안을 안고 산다고 한다. 시간에 쫓겨 종종걸음치는 사람들은 새벽잠을 줄였을 것이다. 밥은 먹고 나왔을까? 도시는 완전히 깨어났다. 갈아탄 버스는 충북 진천으로 달린다. 나는 다시 밥을 생각한다. 밥은 궁극의 문제다.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다. 밥의 정의가 무너지면 체제가 뒤집힐 수도 있다. 밥은 정이다. 그래서 일상의 인사말이 된다. 밥은 먹었니? 밥 한 끼 하자. 밥 한 번 살게. 밥은 에너지다. 버스는 기름을 먹으며 달린다. 우리는 밥심으로 뛴다. 인류의 뇌는 몸무게의 2%에 불과하나 에너지 소비의 20%를 차지한다. 나의 뇌는 아이패드와 스마트폰이라는 두 대의 슈퍼컴퓨터 힘을 빌려 진화의 시간을 뛰어넘을 수 있다. 하지만 제때 에너지를 보충해 줘야 하는 건 몇백만 년 전 원시인과 다를 바 없다. 산업화의 물결은 으레 엄마와 아내가 지어주던 밥을 식당에서 사 먹는 상품으로 바꿔놓았다. 전자레인지가 보급되면서부터는 즉석밥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만들어냈다. 늘 시간이 부족한 사람들은 즉석밥 몇 박스를 주문해 다시 뛸 에너지와 함께 시간을 산다. 충북 진천 CJ블로썸 캠퍼스 전경 나는 진천의 즉석밥 공장을 찾아간다. 햇반을 생산하는 CJ 블로썸 캠퍼스라는 곳이다. CJ제일제당의 진천 가공식품 공장은 축구장 46개가 들어설 수 있는 19만 평의 땅에 9023억 원을 들여 지었다. 한 해 1톤 트럭 12만 대분의 가공식품을 생산할 수 있다. 국내 최대라는 공장 규모보다 더 흥미로운 건 이곳이 식품업계 최초의 스마트 팩토리라는 점이었다. 미리 얻은 자료는 이렇게 설명한다. ‘디지털 자동화 솔루션을 적용한 지능형 생산 공정. 설비와 기계가 사물인터넷으로 연결돼 생산 공정 데이터가 실시간으로 수집되며 제조와 품질 관리의 실시간 모니터링과 대응이 이뤄진다. 최고 수준의 식품 안전과 친환경 시스템을 갖춰 오염 물질과 악취 발생을 차단한다.’ 전 공정이 자동화된 똑똑한 공장이라는 뜻이겠지. 실제로 어떤 모습일까. 사람은 없고 인공지능 로봇들만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을까? 미국 경영학자 워런 베니스(1925~2014)의 말을 떠올린다. 그는 신시내티대 총장이던 1988년 한 심포지엄에서 이렇게 말한다. “미래의 공장에는 종업원이 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 한 명과 개 한 마리다. 사람은 개에게 먹이를 주려고 있다. 개는 사람이 설비를 건드리지 못하게 지키려고 있다.” 베니스는 이듬해 낸 책 『On Becoming a Leader』에서 ‘지난 50년간 가장 중요한 발명은 집적회로이며 1200명이 생산하던 것을 이제 40명이 만들어낸다’라고 쓴다. 그리고 다시 사람과 개 둘뿐인 공장을 이야기한다. 사실 이 웃지 못할 우스갯소리는 1970년대 말 영국 우체국 엔지니어링 노조에서 회자된 것이라고 한다. 거의 반세기 전 일이다. 마침내 한국에서도 그런 공장을 보게 될까? 충북 진천 CJ블로썸 캠퍼스 햇반 스마트팩토리 블로썸 캠퍼스는 햇반과 솥반 같은 즉석밥, 떡갈비, 탕수육 같은 조리육, 가정간편식을 포함해 7가지 종류의 336개 제품을 생산한다. 건물 외관은 깔끔하다. 로비는 공장이라기보다 실용적인 호텔이나 백화점 같은 느낌을 준다. 공장 투어를 안내하는 사업장 담당자 정종민 씨는 해외에서 스마트 팩토리를 벤치마킹하러 많이 찾아온다고 자랑한다. 그는 화장실에서 나올 때 손 소독제를 터치해야 문이 열린다고 주의를 시킨다. 이곳에서 청결은 생명이다. 햇반은 클린룸에서 생산한다. 반도체 공장처럼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 한 톨까지 잡아낼 수 있는 깨끗한 환경을 만들어야 한다. 방문자는 그 안에 들어갈 수 없다. 하지만 공장 2층 통로를 걸으며 투명한 창으로 생산 공정 전체를 조망할 수 있다. 갓 찧은 쌀은 먼저 강한 바람과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한다. 자동으로 햇반 용기에 담긴 쌀은 높은 온도와 압력의 스팀을 여덟 번 쐰다. 모든 불순물과 미생물이 제거된 쌀에 깨끗한 물을 부어 30분 남짓 밥을 짓는다. 어마어마한 가마솥에 밥을 지어 용기에 조금씩 나눠 담는 게 아니라 쌀이 담긴 용기째 짓는다. 15분쯤 뜸을 들이고 뒤집고 식히고 밀봉 포장하는 작업이 물 흐르듯 진행된다. 햇반 생산 설비는 1호기부터 6호기까지 있다. 설비마다 하루 15만 개씩 햇반을 만들어낸다. 하루 90만 그릇이니 1년이면 3억 3000만 그릇 가까운 밥을 짓는 것이다. 한 라인의 끝에서 끝까지는 190m다. 그러나 현장에서 걸어 다니는 사람은 한두 명밖에 없는 것 같다. 현장 인력은 모두 180명이라고 한다. 40명씩 4개 조로 나뉘어 24시간 돌아간다. 그러니까 현장의 사람은 20m마다 한 명씩 있는 셈이다. 이들은 외관 검사를 하거나 기계에 이상이 없는지 지켜본다. 중간중간 필름을 햇반 용기에 걸거나 묶음 포장을 하는 커다란 로봇 팔이 보인다. 온갖 제어장치와 센서, 사물인터넷이 사람의 손과 눈, 신경회로가 되어준다. 사람이 기계를 못 만지게 지키는 개는 안 보인다. 햇반 공장 자동화율은 98%에 이른다. 삼성 반도체 공장의 자동화를 최고 수준인 5단계라고 한다면 이 공장은 4단계 자동화를 완성한 것이다. 왜 100% 자동화하지 않았을까. 자동화하지 않은 2%는 현미 1톤을 담는 톤백자루에 줄을 매는 일이나 청결도를 높이는 일부 작업이다. 가공식품 생산 경력이 15년이라는 정성윤 햇반 생산팀장은 이렇게 설명한다.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이 우주 경쟁을 벌일 때 미국은 거액을 들여 무중력 상태에서도 쓸 수 있는 볼펜을 개발했다. 하지만 소련은 어렵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냥 연필을 쓰면 되지 뭐.” 식품공장에서 굳이 큰돈을 들여 나머지 2%까지 자동화할 필요는 없다는 말로 이해했다. (나는 나중에 팩트 체크를 해봤다. 실제로 우주선에서 연필을 쓰는 건 매우 위험하다. 부러진 심이 떠다니다 민감한 기계장치를 손상할 수 있다. 산소가 많은 공간에서 흑연 가루에 불이 붙으면 치명적이다. 미국 항공 우주 당국이 아니라 폴 피셔라는 이가 만든 민간기업이 질소가 잉크를 밀어내는 스페이스 펜을 개발했다. 소련도 이 펜을 사서 썼다.) 햇반은 1996년 세상에 나왔다. CJ제일제당은 핵가족과 맞벌이가 늘어나고 전자레인지가 보편화하는 시장 변화를 알아보고 1989년부터 즉석밥 개발에 나섰다. 슈퍼마켓에서 밥을 사다 먹는다는 황당한 개념은 이제 일상의 라이프 스타일이 됐다. 상온에서 보관하는 즉석밥을 1년에 한 번이라도 사 먹은 가정은 지난해 기준 44.5%에 달한다. 2021년까지 햇반은 40억 개가 팔려나갔다. 누적 매출은 4조 3000억 원에 이른다. 손수 밥을 짓는 대신 햇반을 사 먹으면 시간을 얼마나 절약할 수 있을까. 정 팀장의 셈법은 이렇다. 햇반은 2~3분이면 먹을 수 있는데 쌀을 씻고 압력밥솥으로 쾌속 취사를 하면 15분이나 20분이 걸린다. 설거지하는 시간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줄잡아 12분이 절약된다. (40억 개면 총 480억 분이다. 8억 시간이다. 밥 짓는 시간을 아껴 일하고 공부하고 놀고 운동하고 멍 때린 시간이다.) 갓 지은 것처럼 맛있는 밥맛은 어떻게 낼 수 있을까. 햇반은 자체 도정 설비에서 당일 찧은 쌀로 짓는다. 재배와 보관 조건에 따라 맞춤 도정이 가능한 설비다. 쌀 표면의 미생물을 없애는 무균화 공정은 필수다. 버섯이나 채소, 견과류처럼 미생물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큰 재료의 무균화 기술도 개발됐다. 용기는 아기 젖병과 같은 소재인 폴리프로필렌으로 만들었다. 끓는 물에서 변형되거나 전자레인지로 조리할 때 환경 호르몬이 배출되지 않는다. 부산과 진천공장에서 생산되는 햇반은 잡곡밥과 현미밥, 영양솥밥 같은 다채로운 변주를 보여준다. 준비하기도 어렵고 맛을 내기도 까다로운 재료들이다. 통곡물은 오래 불려야 한다. 소고기는 따로 양념하고 볶아서 준비해야 한다. 내가 전복 내장을 사다가 손질하고 맛있는 밥으로 지어내려면 얼마나 시간을 들이고 내공을 쌓아야 할까. 물 조절을 잘못하면 설익거나 떡밥이 될 것이다. 원재료의 조직감을 살리면서 살균하는 고난도 기술 덕분에 시간과 내공이 부족한 이도 이런 지난날의 사치를 부릴 수 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뉴스를 검색한다. 온통 챗GPT와 인공지능 혁명에 관한 이야기들이다. 인간의 뇌는 참으로 놀라운 것들을 창조한다. 날마다 선조들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마법이 펼쳐진다. 그러나 까마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변함없는 것도 있다. 인공지능은 밥을 먹을 필요가 없지만 사람은 든든한 밥심이 필요하다는 것, 공감 능력이 없는 챗봇과 달리 우리는 늘 사랑하는 이들이 맛있고 건강한 밥을 먹을 수 있기를 바란다는 것이 그렇다. 2023년 지구촌 35억 명이 먹는 쌀 생산이 20년 만에 가장 부족한 수준이라는 뉴스도 있다. 내가 불러낼 챗봇은 누군가의 밥값 걱정은 안 하겠지. 날은 어둑해진다. 사람들은 불확실하고 변덕스러웠던 하루를 확정된 시간으로 거둬들인다. 나는 오늘 저녁에도 누군가를 만나면 또 물을 것이다. 밥은 먹었니? 장경덕 | 작가·번역가 33년간 저널리스트로서 경제와 기업을 탐사했다. 『애덤 스미스 함께 읽기』 『정글경제 특강』 등을 썼고 『21세기 자본』 『좁은 회랑』 등을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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