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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활하던 운동장은 간데 없고, 초라할 만큼 작아진 건물과 교실. 다녔던 초등학교에 다시 찾아가 본 사람은 안다. 기억과 현실이 충돌할 때, 번번이 현실은 남루한 민낯을 드러내며 판정패를 당하기 마련이다. 영화도 그런 경우가 있다. 분명 좋은 영화라고 생각했는데 우연히 다시 보게 되었을 때, 기억 속의 장면과 대사는 흔적 없이 사라지고 흠결만 새삼스럽게 도드라지는 일 말이다. 그간 찍어 놓은 영화가 변했을 리는 없으니, 달라진 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 영화를 보는 우리 마음이겠지만 그런 영화들은 ‘시간을 건너지 못한 영화’ 목록으로 분류되곤 한다. 옥미나 | 영화 평론가 영화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배웁니다 영화 <매그놀리아> 메인 포스터 이 분류법에서 <매그놀리아>는 보란 듯 ‘시간을 초월한 영화’ 쪽이다. 모든 방향이 완벽하게 세공된 입체적인 보석처럼 – <매그놀리아>는 볼 때마다 늘 다시 새롭게 빛난다. 우리는 과거를 잊을지라도 과거는 우리를 잊지 않는다 어른들에게 이용만 당했던 어린이 퀴즈왕 스탠리 스펙터는 추후 아버지에게 자신의 권리를 요구할 줄 아는 어린이로 성장한다(출처: 네이버 영화) <매그놀리아>는 우연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인과관계가 성립되지 않는 두 사건이 나란히 놓일 때, 서로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과 사건이 공교롭게 엮일 때, 확률을 대입해서 계산해도 도무지 이 연결고리가 보이지 않을 때, 우리는 조건반사처럼 우연을 떠올린다. 이성과 논리로 답을 찾을 수 없는 이상한 일들은 세계 도처에서 발생하니까. 그런데 ‘우연’으로 단정 짓고 넘긴 이 수많은 사건이 혹시 어떤 징조이거나 무언가의 상징이라면? 혹은 운명이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다는 증거라면? 관객들이 대답을 망설이는 동안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은 차근차근 아무런 상관도 없어 보이는 인물들의 에피소드를 나열하면서 여러 번 다시 묻는다. 인간이 납득할 수 없는 연쇄적인 사건들을 간단히 ‘우연’ 이라는 말로 치환해도 정말 괜찮은가. 그럼 이건? 그럼 이것도 우연인가? 우연히 내린 개구리 비는 인물의 갈등을 해소시키는 역할을 한다(출처: 네이버 영화) 스크린에 그 유명한 ‘개구리 비’가 쏟아질 무렵에는 마침내 우연이라는 단어에 의구심이 들기도 할 것이다. 우연이라는 말은 어쩌면 불가해한 사건들 사이에 숨겨진 간절하고 선명한 운명의 메시지를 무시하고, 사건들의 다양한 차원과 관계에 대한 이해를 중단하는 – 획일적인 처방전이었을지도 모른다. 우연이라는 속 편하고 게으른 핑계 대신 끊임없이 사건의 맥락을 생각하고 세계의 이치를 상상할 것. 이것이 <매그놀리아>의 세계다. ‘우리는 과거를 지나왔지만, 과거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다양한 인물들의 입을 통해 반복되는 이 문장은 <매그놀리아>를 관통하는 핵심 주제다. 수십 년 동안 지미 게이터(필립 베이커 홀)가 진행한 퀴즈 프로그램 제목 그대로 ‘어린이들이 아는 것 (What do Kids Know)’은 – 그들의 남은 인생과 미래에 선명한 흔적을 남긴다. 과거의 실수와 악행을 사죄하는 할(제이슨 로바즈)은 수년 만에 다시 만난 아들 프랭크(톰 크루즈)의 얼굴을 마주 보며 죽음을 맞이한다. 사죄와 반성 대신 자기 연민에 사로잡힌 지미는 마침 천장 유리를 뚫고 떨어진 개구리의 사체 때문에 얼결에 방아쇠를 당기고 차가운 부엌 바닥에 쓰러진다. 내내 TV에서 훌륭한 남편, 좋은 아버지로 묘사되었던 그의 임종 순간, 때마침 TV 브라운관에는 불이 붙는다. 분명 여기에는 어떤 우연도 없다. 톰 크루즈의 새로운 모습을 발견하다 필립 세이모어 호프만, 줄리안 무어, 윌리암 H. 머시, 존 C. 라일리 등.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배우가 완벽하게 맞물린 톱니바퀴처럼 탁월한 연기력과 앙상블을 보여주는데, 그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배우는 톰 크루즈다. 남자들에게 여자 유혹법을 가르치는 명강사가 된 프랭크(출처: 네이버 영화) 어두운 무대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배경음악 삼아 등장하는 그의 시퀀스는 터무니없고 우스꽝스러우면서도 내내 눈을 뗄 수 없는 강력한 카리스마와 팽팽한 리비도로 끓어오른다. 톰 크루즈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부기 나이트>(1997)를 본 뒤, 직접 감독에게 연락해서 차기작 출연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우에 대한 감독의 절대적인 신뢰, 배우의 야심과 그를 뒷받침하는 능력이 <매그놀리아>의 프랭크를 완성시켰다. 톰 크루즈는 <매그놀리아>에서 그의 필모그라피를 통틀어 가장 압도적인 연기력을 보여준다. ‘유혹하고 파괴하라’는 공격적인 행동강령을 외치는 ‘픽업 아티스트’는 충분히 흥미로운 캐릭터 설정이지만, 영화 속에서 톰 크루즈는 프랭크라는 인물을 능가한다. 영화를 통틀어 프랭크가 상대와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누는 장면은 단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부흥회에 가까운 강연을 할 때도, 여성 리포터를 앞에 두고 바지를 발목에 걸친 채 뒤구르기를 하고, 질문과 상관없이 장황한 답변을 늘어놓을 때도, 전화기를 붙잡고 복도에서 고함을 지르거나, 죽어가는 부친의 침상 곁을 지키는 장면까지 – 프랭크의 모든 대사는 본질적으로 모놀로그다. 상대의 구체적인 대사나 행동을 계기로 삼는 대신, 톰 크루즈는 단독으로 수백 개의 감정을 거침없이 오고 간다. 프랭크는 평생을 증오했던 아버지를 끝내 용서한다(출처: 네이버 영화) 프랭크가 허세 부리고 의심하고 경멸하고 궁지에 몰리고 분노하고 슬퍼하고 용서하는 동안, 관객들은 톰 크루즈 이마의 혈관, 눈썹 근육의 움직임 하나하나에서 프랭크의 감정을 읽고 그의 변화를 유추하는 진귀한 경험을 하게 된다. 입을 닫은 프랭크의 긴 클로즈업 쇼트는 톰 크루즈가 단순히 스타가 아니라 위대한 배우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그래서 <매그놀리아>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톰 크루즈가 가지 않은 길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보여준다. 대신 톰 크루즈는 스턴트맨 없이 직접 거리를 질주하고 비행기에서 뛰어내리는 액션 블록버스터 세계의 왕좌에 올랐다. 톰 크루즈의 필모에 내심 엉뚱한 기대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이쯤에서 고백한다. 톰 크루즈가 이제 몸이 힘들어서 액션은 더 못하겠다, 선언하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10년은 족히 더 걸릴 것 같지만 상관없다. 기다릴 수 있다. 그의 필모그라피에서 <매그놀리아> 같은 작품을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매그놀리아’는 폴 토마스 앤더슨 감독 작품으로 국내에서는 2000년 4월에 개봉했다. ‘매그놀리아’는 제50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6월 7일부터 7월 4일까지 전국 CGV 아트하우스에서 진행되는 ‘톰 크루즈 특별전’을 통해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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