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칸 영화제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던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셀린 시아마 감독이 신작 ‘쁘띠 마망’으로 돌아왔다. 첫 장편 데뷔작이었던 ‘워터 릴리스’에서 ‘톰보이’, ‘걸후드’에 걸쳐 일관되게 여성을 주인공으로 삼아 젠더와 욕망에 대해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던 감독은 이번에는 소녀의 눈을 통해서 엄마와 딸, 그리고 오로지 한 번 밖에 존재하지 않는 인생의 순간들을 다룬다.
옥미나 | 영화 평론가
영화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배웁니다
엄마의 옛집에서 8살 엄마를 만나다?
영화의 시작. 8살 어린 소녀 넬리(조세핀 산스)가 방마다 돌면서 노인들에게 작별인사를 고한다. 그들의 작별은 애통하거나 호들갑스럽지 않고 그저 단정할 뿐이다. 작별과 죽음이 익숙한 순서이자 일상이 된 공간. 그러나 카메라를 등지고 앉아 하염없이 창 밖을 바라보는 엄마 마리옹의 표정은 알 수 없다. 그저 비통과 애도를 추스른 고요한 뒷모습에서 깊은 우울을 짐작할 따름이다.
가족들은 외할머니의 유품을 정리하기 위해서 엄마가 어린 시절 살았던 옛집으로 향하고, 어른들이 어른들의 일로 분주한 사이, 심심한 넬리는 숲을 배회하다가 또래의 소녀를 만난다. 또래 소녀의 이름은 마리옹(가브리엘 산스). 8살 넬리의 엄마다.
지난 십여 년간 영화와 TV 드라마들은 부지런히 시간여행을 다뤘다. 현재와 미래만으로는 더 이상 상상할 수 있는 서사가 남아있지 않다는 듯이 자주 과거로 돌아가서 실수를 바로잡고 사건을 미연에 방지했으며, 그 와중에 과거의 사소한 것들이 바뀌면 결국 현재와 미래도 뒤틀리게 된다는 논리는 당연한 상식처럼 익숙해졌다. 역사 드라마나 로맨틱 코미디뿐 아니라 우주로 나간 다음에도 결국 시간의 차원을 뛰어넘어 과거와 미래를 뒤바꾸는 서사가 자주 등장한 덕분에 이제 ‘타임슬립’은 흔한 장르 용어가 되었다.
그러나 ‘쁘띠 마망’은 이런 타임슬립 하위 장르로 명명하기에는 고요하고 담백하다. 시간 여행을 가능하게 만드는 대단하고 거창한 장치나 비밀을 누설하거나 과거를 바꾼다는 식의 SF적인 야심 없이, 그저 숲에서 마주친 어린 소녀들의 짧은 시간을 따라갈 뿐이다.
마법 같은 설정을 가능하게 한 공간의 힘!
타임머신이나 마법의 숲을 들먹이지 않아도 소녀가 동갑내기 엄마를 만난다는 설정에 수긍하게 되는 것은 분명 공간의 힘이다. 자신의 엄마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집은 넬리에게 낯선 곳이지만, 엄마가 쓰던 침대에 누워 엄마의 책을 읽고, 엄마의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으며 소녀는 편안함을 찾는다. 그리고 넬리에게 8살의 엄마 마리옹은 처음으로 또렷한 이미지가 된다.
숲에서 우연히 마주친 8살 동갑내기 딸과 엄마는 각각 조세핀 산스(넬리), 가브리엘 산스(마리옹) 쌍둥이 자매들이 맡아 연기했다. 두 소녀가 함께 크레페를 만들며 장난치고 웃음을 터뜨릴 때에는 이것이 카메라 앞의 연기가 아니라 가장 친밀한 자매들 사이에서 나오는 자연스럽고 다정한 순간이라는 것이 드러나기도 한다.
딸은 엄마의 미래를 아는 사람이다. 며칠 남지 않은 불안한 수술의 결과가 어떠할지, 난 오래 못 산다 습관처럼 말하는 외할머니가 몇 살까지 살게 될지 소녀는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소녀는 비밀을 귀띔하거나 그래서 운명을 뒤흔들 생각을 품지 않는다. 그저 정말 마침 몹시 심심했던 8살의 소녀들끼리 친구가 되어 웃고 이야기하며 먼 훗날 함께 하게 될 미래의 시간들을 응시할 뿐이다. 넬리가 아는 것은 또 있다. 우리가 막연하게 이야기하는 미래에 해당하는 소위 ‘다음’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인생의 모든 순간은 그 독립된 찰나에만 존재한다는 것.
넬리는 동갑내기 엄마와 숲 속을 달리고 작은 배를 타고 여행을 하는가 하면, ‘다음’을 기약하는 대신 외할머니에게 진짜 작별인사를 하는 진귀한 경험을 한다. 이 모든 것은 넬리의 상상이었을까. 혹은 성인이 된 마리옹도 숲에서 만난 꼬마 넬리를 기억하고 있을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이것은 ‘쁘띠 마망’의 넬리에게만 해당하는 드물고 진귀한 이야기는 아닐지도 모른다. 모든 딸들은 엄마의 제일 각별한 친구이자, 가장 필요한 순간에 위로가 되는 존재가 아니던가. 이것이 셀린 시아마가 코로나 시대의 관객들을 위로하는 방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