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청춘은 억울하다. 가난하거나 억울하거나 둘 중 하나라면 다행이고, 가난해서 억울한 것인지 둘은 별개인지 구분하려 들면 슬퍼진다. ‘아워 미드나잇’에서 밤을 걷는 남녀 한 쌍은 팔을 맞대고 그 두 개의 조건을 사이좋게 나눠가진 채 걷는다. 배우가 되려고 연기만 좇으며 살아온 남자는 생계가 막막한 아마추어 예술가로 비웃음을 사고, 착실히 현실을 살아보려던 직장인 여자는 사내 데이트 폭력을 겪고 별안간 쫓겨났다. 이 둘이 한밤에 만나 갑자기 연극을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김소미 |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제각기 고유하고 무모한, 영화의 틈새가 궁금하다
꿈을 쫓는 남자와 현실을 선택한 여자의 밤 산책!
“결혼해” 오래 만난 여자친구 아름(한해인)의 한 마디에 무명배우 지훈(이승훈)은 우린 아직 사정이 좋지 않다며 태연히 호소한다. 그런데 진짜 사정인즉슨 아름이 다른 상대와 결혼하겠다는 선언이다. 여자는 남자의 사랑에 질린 것이 아니다. 아름은 “신림동, 낡은 연습실, 옥탑방”같은 것들을 더이상 견딜 수 없어서 지훈을 떠난다고, 어쩌면 말하지 않는 것이 더 좋았을 고백을 남기고 사라진다.
한편 사내연애 중 데이트 폭력을 겪은 은영(박서은)은 회사에 도움을 청해보지만 오히려 직장 내 따돌림을 겪는다. 집단적 침묵과 노골적인 모욕을 견디는 동안 생계를 위한 한 사람의 노동은 주인의 존재를 삶에서 철저히 소외시키기 시작한다. 지훈과 은영은 서울이란 도시에서(혹은 서울을 그리는 영화에서) 암묵적으로 자살의 장소로 암시되는 한강대교 위에서 처음 만난다. 배우에서 공무원이 된 선배의 도움으로 자살 방지를 위한 비밀 경찰 노릇을 하게 된 지훈이 늦은 밤 강물을 내려다보고 있는 은영에게 말을 건 것이 우연한 시작이다.
‘아워 미드나잇’은 서로 다른 이들이 만나 일말의 환상도 꿈꿀 수 없을 것 같은 사선의 다리 위에서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거대한 코끼리의 서커스를, 안톤 체홉의 독백을 불러와 결코 죽지 못할 시간을 벌어준다. 그 긴 밤은 쓸쓸한만큼 아름답고 또 언젠가 끝이 난다. 건국대학교 영화과, 단국대학교 영화콘텐츠전문대학원에서 공부하며 단편 ‘인형뽑기’, ‘새벽’ 등을 만든 임정은 감독의 장편 데뷔작으로, 제25회 부산국제영화제, 제16회 글래스고영화제 등 유수의 영화제 초청받으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말하는 그림자들의 밤
배우인 지훈의 존재는 그 자체로 예술의 은유가 되어 장면 안에 노래와 연극을 불러낸다. 경험과 감정이 뒤섞인 자기 고유의 텍스트를 발설할 곳이 요원했던 청춘들에겐 적요한 밤이 곧 무대다. 깊은 밤의 양화대교, 선유도 공원, 명동과 을지로는 두 사람을 위해 마련된 무대처럼 독점적이며, 아직 꺼지지 않은 도시의 불빛은 스포트라이트가 되어 반짝인다. 밤의 시적인 심상은 부드러운 흑백을 채택한 ‘아워 미드나잇’의 표면을 따라 스크린 속 시간이 낮일지라도 끊김없이 지속된다.
붙임성 좋은 지훈에게 내내 주저하던 은영이 결정적으로 그와 친밀함을 형성하는 순간 또한 밤이라는 시간적 배경과 흑백화면의 합작품인 ‘그림자 놀이’ 장면에서 솟아오른다. 손가락 그림자로 (지금은 사라진) 서울극장 벽에 갖가지 동물을 그려내던 지훈이 코끼리를 만들자, 지켜보던 은영이 그의 손 옆에 자기 손을 맞대 커다란 코끼리 귀를 덧붙인다. 이 때, 줄곧 리얼리티를 고수해왔던 영화는 지금까지 벌어진 한밤의 소요가 마치 꿈이었던 양 무드를 돌연 전환시킨다. 그림자와 외화면 사운드를 활용해 지훈과 은영 앞에 거대한 코끼리를 불러낸 것이다. 두 사람 앞에 잠시 흥겨운 서커스가 펼쳐진다.
이 장면에서 시선을 잡아채는 것은 화면 한 편을 가득 채운 채 살아 움직이는 코끼리 그림자가 아니다. 관객은 여기서 연인에게 이별을 선고당했던 지훈이 눈물을 흘리는 대신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꾸역꾸역 눈에 담아내던 앞선 장면을 상기하게 된다. 시련으로 잔뜩 쪼그라든 가난한 청년들에게 기적같은 환상을 선사한 영화는 순진한 얼굴로 기적에 환호하는 남녀의 초상을 마치 채플린 영화의 페이소스적 순간처럼 바라보게 만든다. 그림자가 생명을 얻는 순간의 청초한 카타르시스는 ‘아워 미드나잇’의 후반부에서 더 두터워진다. 자기 스스로 그림자 놀이의 피사체가 되어 내면을 고백하는 은영과 지훈의 연극에서 맑은 연민은 또다시 피어난다.
자정을 견딘 자에게 정오가 찾아오듯이
누구든 낮보다는 조금 더 쉬이 자기 영혼을 쏟아낼 수 있는 시간, 밤이 열리면 그제야 시작되는 영화들이 있다. 도시의 깊은 밤 낯선 이들이 서로 조우하는 ‘아워 미드나잇’의 광경은 짐 자무시를 닮았고, 유유히 긴 대화를 나누는 두 남녀를 천천히 따라가는 수다스런 로맨스는 리차드 링클레이터의 계보를 잇는다. 다만 서울의 밀레니얼이라 이름 붙은 이들이 양화대교 위를 걸음으로써 생성되는 사회적 불안과 좌절이 자무시 영화의 방탕함이나 링클레이터 영화의 짙은 낭만을 물리친다.
그러나 ‘아워 미드나잇’을 절망의 멜로디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눈여겨 볼만한 화면 전환을 꾀하는 영화의 종반부는 한밤의 대응어가 한낮이라는 당연한 사실 또한 일깨운다. 내러티브 내부의 환경을 밤으로 설정하는 것으로 모자라 이미지의 외피를 조도가 낮은 흑백으로 덮어버림으로써 청춘에 세례된 어둠의 정서를 전면적으로 시각화했던 영화는, 인위적으로 더욱 채도가 쨍하게 조정된 컬러 화면으로 문을 닫는다. 몇 번의 밤이 끝나고 낮이 찾아와도 화면에서 결코 태양의 안온함을 감지하기 어려웠던 영화에서 밤으로의 긴 여로가 비로소 끝나는 순간이다. 이 전환점은 결코 대단하거나 특징적인 절호의 때가 아니며, 너무도 일상적이고 심지어는 피로한 풍경 속에서 벌어진다.
먹먹한 흑백이 끝나고 갑자기 빛과 채도가 들이칠 때, ‘아워 미드나잇’이 밤을 빌려 낮을 고대하는 영화였음을 뒤늦게 순순히 수긍하게 된다. 자신들이 낮을 기다리는 줄도 모르는 채 배회하던 남녀. 한 밤이 되어서야 잠시 숨 쉬는 것 같았던 이들이 실은 쨍쨍한 한 낮의 사랑을 누구보다도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에 대해 아름답다고 말하고 싶어지는 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