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트하우스 칼럼] 이 작품은 꼭! 2020년을 빛낸 국내외 영화들

극장에서 선보이지 못했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유독 빛났던 작은 영화들이 그 허전함을 충분히 메웠다. 이는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들이 애정을 담아 뽑은 올해 국내외 영화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다소 위축되었던 영화계를 뒤로하고 밝은 내년을 기약하는 마음으로 2020년을 빛낸 국내외 영화들을 살펴보자.

옥미나 큐레이터가 뽑은 2020년 국내외 최고작

2020년 국내 영화 PIICK! ‘도망친 여자’

홍상수 감독 연출, 김민희 주연의 영화 '도망친 여자' 스틸. 극중  김민희가 식탁에 앉아 이야기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원래 배우란 스크린에서 가장 빛나는 존재다. 하지만 폭발하는 감정을 연기하거나 눈에 띄는 액션 혹은 두고두고 인상에 남을 의미심장한 대사를 읊조리는 것도 아닌데, 배우에게서 눈을 뗄 수 없을 때가 있다. 배우에게 매혹되는 순간이다. 이를테면 영화 ‘화양연화’의 장만옥이 그랬다.

하지만 ‘도망친 여자’의 김민희에 대해서는 아직도 확실하게 설명하지 못하겠다. 예쁘다, 아름답다, 매력적이다 같은 진부한 수식어로는 결코 정확하게 묘사할 수 없는 어떤 영역이 그녀에게는 존재한다. 일상적인 대화에 귀를 기울이게 만들고, 반복되는 문장에서 미묘한 차이를 감지하게 만드는가 하면, 그녀가 말하지 않은 것들은 무엇일지 상상하게 만든다. 그녀의 눈동자가 어디를 향하는지, 상대를 빤히 바라보는 순간에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웅크린 어깨만큼 상대의 말을 믿고 있는 것인지, 현실의 누구도 이토록 집중해서 관찰한 적 없을 만큼 김민희의 사소하고 섬세한 동작 하나하나를 영화 내내 빠짐없이 지켜보지만, 영화가 끝난 다음 유일하게 확실해지는 것은 ‘감희(와 그녀의 진실)에 대해 알 수 없다’ 라는 선명한 사실이다.

그런데 ‘모르겠다’라고 인정하는 순간 엉뚱하게도 도리어 기묘한 안도감과 만족감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도망친 여자’는 볼 때마다 새롭고 낯설 것이며, 나는 매번 김민희에게 다시 사로잡힐 것이다.

2020년 해외 영화 PIICK! ‘안티고네’

영화 '안티고네'의 주연을 맡은 나에마 리치가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소포클레스가 그리스 희곡 ‘안티고네’를 쓴 것은 BC 441년, 2400년 전의 희곡이 제기했던 질문이 여전히 현대 사회에도 유효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캐나다 감독 소피 데라스페는 실제 몬트리올에서 발생한 18살 난민 소년의 사망 사건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주인공 안티고네(나에마 리치)를 난민으로 상정하면서, 국가와 권력이 추구하는 가치와 대립하는 개인의 도덕과 양심이라는 주제를 능숙하게 현재로 불러들인다.

달라진 것들도 있다. 그리스의 안티고네가 맞서야 했던 것은 절대 권력자인 크레온 한 사람이었지만, 현대의 안티고네가 감당해야 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관료제가 지배하는 국가 시스템이다. 크레온의 처벌과 별개로 그리스인들이 그녀의 진심은 의심하지 않았다면, 현대인들은 개인적인 욕망, 범죄의 공범, 정치적인 의도 같은 다양한 프레임으로 안티고네의 행동을 해석하려 든다. 적은 더 거대하고 촘촘해졌고 연민은 더 아득한 일이 되었으며, 연대와 SNS 놀이 사이의 경계는 모호해졌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는 나에마 리치의 맑은 눈빛은 단 하나의 질문만을 던지는 것 같다. 언제까지 못 본 척할 거냐고.


이동윤 큐레이터가 뽑은 2020년 국내외 최고작

2020년 국내 영화 PIICK!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올해 국내 개봉작 중 평단과 관객들에게 사랑 받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주인공 강말금이 웃는 모습으로  힘차게 오르막길을 걷고 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덕망 있는 감독과 함께 지속적으로 작업해왔던 이찬실(강말금) 피디는 감독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일자리를 잃는다. 한 감독과 오래 작업해온 경력은 오히려 다른 프로젝트에 부담으로 작용하고 새로운 일을 해보려 해도 영화 만드는 일 외에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 자신은 어떤 사람이었는지 처음부터 다시 고민해보기로 결심한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가 개봉했던 3월 초는 코로나19 상황이 악화 된 직후였다. 갑자기 달라진 삶의 환경으로 두려움과 걱정이 앞서던 때, 가진 것 없음에도 꿋꿋하게 삶의 의지를 다지는 주인공의 당찬 모습은 불투명한 미래를 향해 한 걸음 나아갈 수 있는 용기로 다가왔다. 엉뚱하고 대책 없고 심지어 어리숙하기까지 한 그녀의 모습들은 분명 한국영화 속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여성 캐릭터였음에도 전혀 낯설지 않게 우리의 마음을 위로해줬다. 신세를 한탄하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그녀를 응원하는 마음이 곧 나와 세상을 응원하는 마음으로 번져 나가는 순간 이 영화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 찬실이는 복도 많음에 분명하다. 그녀에겐 장국영이 있지 않은가!

2020년 해외 영화 PIICK! ‘페인티드 버드’

11년의 걸쳐 완성한 영화 '페인티드 버드'. 극의 주인공인 유태인 소년이 허름한 창고 문 앞에서 서 있는 스틸.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2차 세계 대전, 한 노파에게 맡겨진 유태인 소년(페트르 코틀라르)은 곧 돌아오겠다 약속한 부모를 한없이 기다린다. 갑작스런 사고로 노파가 죽자 더 이상의 보호막이 사라진 소년은 생존을 위해 떠돌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며 다양한 고통 속에 노출된다. 소년에게 가해진 폭력의 크기는 때로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삶의 무게로 다가온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고통 속에서도 그는 끝내 살아낸다.

저진 코진스키 작가의 1989년 원작을 바츨라프 마르호울 감독이 11년에 걸쳐 영화화한 ‘페인티드 버드’는 인간에게 도래한 고통은 회피할 수도, 회피해서도 안 되는, 오직 직면하고 대면함을 통해서만 극복 가능한 것임을 깨닫게 한다.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깊은 고통 속에 침몰한 이 때, 그 고통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영감을 주는 이 영화야 말로 올해 최고의 작품이 아닐 수 없다. 물론 가녀린 소년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다양한 폭력의 향연을 3시간 동안 대면해야 하는 일은 힘든 시기를 통과하는 현 관객들에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고 나면 영화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 고통의 무게가 역설적으로 한 결 가벼워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박지한 큐레이터가 뽑은 2020년 국내외 최고작

2020년 국내 영화 PIICK! ‘야구소녀’

야구를 소재로 한 최윤태 감독의 첫 장편 영화 '야구소녀'. 야구 모자와 점퍼를 입고 있는 극중 주인공 이주영의 모습을 담은 스틸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야구를 둘러싼 언설들을 살펴보면, 특히 ‘투수’를 지칭한 말들이 눈에 띈다. “야구는 투수놀음”. “왼손 파이어볼러는 지옥에서라도 데려와야 한다”. 야구는 투수가 투구동작에 들어가기 전까진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경기장 가장 높은 곳(마운드)에 올라 자신을 바라보는 수많은 눈동자들을 마주하며 18.44미터 앞에 떨어진 타자에게 공을 던져야 하는 투수는 그야말로 고통스러운 직업이다. 그리고 최윤태 감독의 첫 장편영화 ‘야구소녀’는 안 그래도 고독한 직업인 ‘투수’를 주인공으로 한다. 프로야구 선수가 되고 싶은, 최고구속 130km/h의 여고생 투수.

‘야구소녀’는 한국독립장편영화에서 ‘야구’를 주요한 소재로 끌어온 새로운 시도를 선보인 작품이다. 최윤태 감독은 전통적 ‘근성물’(‘록키’ 시리즈 같은)의 구조, 난관을 돌파하기 위해 애쓰는 주인공 캐릭터를 적극적으로 인용하면서 영화 초반과 중반의 재기와 활력을 부여한다. 그러나, 이 영화의 미덕은 후반에 있다. 실제의 야구에서 투수에게 요구되는 덕목은 ‘담대함’이다. 자기가 던질 수 있는 구속만큼, 그리고 자기가 던지고자 마음먹은 위치에 공을 뿌릴 수 있는 그 담대함이 영화 속에서 빛난다. 주인공의 한계를 그대로를 드러내고, 그것이 극복되는 어떤 판타지의 힘을 빌리지 않고, 주인공이 해낼 수 있는 어떤 최선의 것을 영화 자신이 던질 수 있는 가장 빠른 구속에 실어 놓았다. 그야말로 담대한 데뷔작이다.

2020년 해외 영화 PIICK! ‘조조 래빗’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각색상을 수상한 영화 '조조 래빗'. 극중 상상속에서 히틀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주인공 조조의 모습.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제2차 세계 대전, 히틀러, 제국주의, 나치, 유대인, 홀로코스트. 나열만으로도 단어의 의미가 지닌 무게감이 심장을 짓누른다. 그리고 올해 아카데미 각색상을 수상한 역사상 최초의 ‘마오리족’ 출신 작가이자 감독 타이카 와이티티는 이 모든 소재를 끌어와 재기 넘치는 코미디와 먹먹한 성장동화를 108분안에 함축해 넣었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재능이다.

감독의 결과물인 ‘조조 래빗’은 믿음의 영화다.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믿음. 전쟁 중에도 여전히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믿음. 타인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사랑하는 이들은 어떤 상황에서라도 사랑을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전쟁이 우리가 가진 선량한 본성을 훼손하지 못할 것이란 믿음. 그리고 이후에 살아남은 우리는 여전히 서로를 의지하며 견뎌 나갈 것이라는 믿음. 그렇게 믿음을 가진 이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구현되는 어떤 순간을 마주한다. 마치 그 순간을 축복하 듯 데이빗 보위의 ‘Helden’(데이빗 보위가 부른 ‘Heroes’의 독일어 버전)이 울려 퍼지는 마지막은 나에게 있어선 올해 가장 아름답고 영화적인 장면이었다.

서러운 시간을 견뎌내는 우리에게도 필요한 건 아마도 ‘믿음’일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을 더 견뎌낸 후에. 우리가 우리로 서있기 위해 지켜온 믿음이 구현되는 어떤 순간이 극중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와 엘사(토마신 맥켄지)처럼 우리에게도 찾아오길 간절히 기원한다.


김소미 큐레이터가 뽑은 2020년 국내외 최고작

2020년 국내 영화 PIICK! ‘찬실이는 복도 많지’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의 주인공 강말금과 배유람이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망했다’는 말 밖에는 삶의 상태를 달리 표현할 길이 없을 때도 있다. ‘찬실이는 복도 많지’는 절망의 나락에 떨어진 한 중년 여성의 절치부심 회생 스토리다. 영화 프로듀서인 찬실(강말금)은 젊은 날의 열정을 모두 쏟았던 한 작가주의 감독이 돌연사하면서 강제로 일자리를 잃는데, 세상 사람들은 영화 프로듀서가 어떤 일을 하는 직업이냐며 고개만 갸웃거릴 뿐 도통 그녀의 처지를 알지 못한다. 산간 마을 셋방에서 자주 혼잣말을 궁시렁거리던 찬실이 어느새 천천히 지난 삶의 조각을 들여다보기 시작하는 이야기는 영화의 배경인 쓸쓸한 초겨울과 맞물려 시종 시리고 애처롭다.

하지만 추위가 깊고 가지가 앙상해지는 엄혹한 겨울일수록 시야는 또렷하고 차분해지기 마련. 가진 것을 전부 잃어버린 뒤에야 솟아나는 깨끗한 마음과 신비의 경지가 찬실 곁을 맴돈다. 짝 없는 중년 여성의 외로움 위로 노쇠한 아버지의 뭉클한 편지와 추억 속 명화들에 대한 애정이 흘러나오는 구간에는 눈물을 훔치지 않기가 어려울 정도다. 느닷없이 속옷 차림으로 등장해 판타지와 코미디 장르 어디쯤을 배회하는 장국영(김영민)의 유령도 소소한 영화적 재미다. 영화 프로듀서로서 오랜 경력을 쌓은 김초희 감독이 자신의 자전적 정서를 투영한 작품으로, 진솔한 감수성과 태도, 행간에 배치된 빛나는 오마주들로 특별한 기쁨을 선사하는 영화다. 이 순정이 가득한 영화를 보고 나면, 찬실처럼 힘을 내어서 의연하고 분연히 내 몫의 좌절을 통과하고 싶어진다. 올해의 명랑, 그리고 올해의 멜랑콜리가 ‘찬실이는 복도 많지’에 들어있다.

2020년 해외 영화 PIICK! ‘마틴 에덴’

이탈리아의 감독 피에트로 마르첼로의 신작 '마틴 에덴'에서 두 주인공 마틴 에덴과 엘레나가 춤을 추고 있는 장면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아주 오랜만의 경험이었다. 불꽃 놀이를 넋 놓고 바라보듯, 눈 앞에서 터지는 몽타주의 향연 속에서 황홀함에 깊이 잠겨본 것은. 지금까지는 주로 다큐멘터리스트로 불려온 이탈리아의 감독 피에트로 마르첼로가 야심차게 내놓은 ‘마틴 에덴’은 시네마틱함에 대한 정의와 계보, 그 가치를 복원하는 우리 시대의 마스터피스 중 하나로 기억될 것 같다.

미국 작가 잭 런던이 1909년 발표한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마르첼로 감독은 배경을 자신의 고국인 이탈리아 나폴리로 옮겨 어느 선박 노동자가 예술가로 성장하는 격동적 궤적을 좇는다. 가난과 무지 속에서도 불편을 몰랐던 남자 마틴 에덴(루카 마리넬리)은 우연한 만남을 통해 상류층 자제인 엘레나(제시카 크레시)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에 들기 위한 남자의 노력은, 학구열을 넘어 자신의 작가적 소명을 계발하는 지난하고 험준한 여정으로 삶을 이끈다.

영화는 작가로서 성공하기 위해 분투하는 마틴 에덴의 궤적을 20세기 초반의 역사적 파고와 중첩시키고, 사회주의와 자유주의, 파시즘의 흥망성쇠를 우화적으로 덧댄다. 마틴 에덴이 겪는 계급 갈등과 정치적 각성, 그리고 사랑의 실패는 시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예술가 스토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마틴 에덴’의 정수는 그 이야기에 있는 것이 아니다. 시대 재현에 어긋나는 미장센을 과감히 뒤섞는 포스트 모더니즘적 장면화, 흑백과 컬러를 오가며 이탈리아 기록원이 제공한 아키이빙 영상을 콜라주에 가깝게 배치하는 피에트로 마르첼로 감독의 이미지 실험이야말로 이 작품에 마술적 감흥을 불러 일으키는 요소다. 루키노 비스콘티, 피에르 파올로 파솔리니, 베르나르도 베루톨루치 등 이탈리아 모던 시네마의 풍요로부터 출발해 자신만의 탐미적인 몽타주 기술을 완성한 마르첼로 감독의 다음 작품이 무척이나 기다려진다.


강소정 큐레이터가 뽑은 2020년 국내외 최고작

2020년 국내 영화 PIICK! ‘도망친 여자’

홍상수 감독 연출, 김민희 주연의 영화 '도망친 여자' 스틸. 극중  김민희가 소파에서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도망친 여자’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감희(김민희)라는 인물이 서로 다른 세 장소에서 친구들을 만난다. 두 번은 감희의 약속된 방문이고 한 번은 우연한 마주침이다. 대화에서 반복되는 감희의 말에 따르면, 지금은 지난 5년간 한 번도 떨어져본 적 없는 그녀의 남편이 출장을 떠난 시간이다. 이 말이 영화의 제목, 그리고 우산을 쓴 채 어디론가 향하는 감희의 뒷모습을 담은 포스터 이미지와 충돌한다. ‘도망친 여자’가 감희를 가리킨다면, 남편이 출장을 갔다는 그녀의 말은 거짓말인가? 그렇지 않다면, 감희가 ‘도망친’ 다른 대상 또는 장소가 있는가? 이렇게 영화의 입구라 할 수 있는 제목과 충돌하는 대사 한 마디가 미스터리를 작동시키고 가능한 복수의 층위들을 만들어낸다.

극중 세 개의 에피소드에서 감희가 만나는 인물들은 그녀의 서로 다른 시간대와 관계 맺는다. 이혼 후 한적한 교외에서 룸메이트와 살고 있는 영순(서영화)은 감희의 미래가 될 수 있고, 예술가촌에서 혼자 자유롭게 살고 있는 수영(송선미)은 감희의 결혼 전 모습처럼 느껴진다. 극장에서 마주친 우진(김새벽)은 감희의 오래 전 과거와 연결되어 있고 이 만남은 감희에게 그리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세 인물과의 만남을 통해 우리는 감희의 삶을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하게 된다. 또한 흥미로운 것은, 이 만남들이 감희뿐만 아니라 감희를 연기한 김민희 배우의 서로 다른 시간들과도 연결된다는 인상이다.

김민희는 홍상수 감독의 각기 다른 작품들에서 서영화, 송선미, 김새벽과 함께 출연한 바 있는데, 이때 배우들이 맡은 인물들 사이의 관계는 ‘도망친 여자’에서 감희와 세 인물이 맺는 관계와 유사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 영화에서 배우의 존재는 다른 세계들을 불러내고, 말과 제스처는 어느 한 곳에 자리잡지 않는다. 어쩌면 감희는 이 작품의 입구를 통해 하나의 세계로 들어서자 마자 다른 문들을 찾아 계속해서 ‘도망친’ 걸까? 홍상수 감독은 간결한 서사와 구성 안에서 자신만의 방법과 아카이브를 통해 이 영화 속의 요소들이 역동적으로 움직이게 만든다. 게다가 올해의 씬스틸러로 불러야 마땅한 고양이가 이 작품을 선택하여 활기를 불어넣어주지 않았는가!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수상에도 불구하고 조용해 아쉬웠던 이 작품을 올해의 한국영화로 꼽는다.

2020년 해외 영화 PIICK! ‘트랜짓’

프란츠 로고스키, 폴라 비어 주연의 영화 '트랜짓' 스틸. 극중 게오로그가 통행증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 제목인 ‘트랜짓’은 지금 이곳을 떠나기 위한 ‘통행증’을 가리킨다.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은 제2차 세계 대전 시기를 배경으로 쓴 소설을 각색해 이 영화를 만들었다. 줄거리는 이렇다. 게오르그(프란츠 로고스키)라는 남성이 나치의 파리 점령지역을 빠져나와 마르세유에 도착한다. 그의 손에는 파리에서 자살한 유명작가 바이델의 원고와 그가 받거나 받지 못한 편지들, 그리고 도피 중 목숨을 잃은 동료 하인츠 가족의 주소가 있다. 하인츠의 아들은 아버지의 사망 소식을 전하러 온 게오르그에게 아버지의 역할을 기대한다. 멕시코 대사는 그를 바이델로 착각하고, 덕분에 게오르그는 이곳을 찾는 유대인들이 간절히 원하는 통행 비자를 손에 넣는다. 마르세유 거리에서 남편을 찾는 바이델의 아내 마리(폴라 비어)는 게오르그의 뒷모습을 오인하여 계속해서 그를 돌려 세운다.

머물 수 없는 장소와 떠날 수 없는 사람들, 오인과 이입의 과정, 불안과 매혹의 감정. 감독은 영화가 사랑해온 이 주제들을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그려낸다. 소설을 영화로 번역하면서 온전한 시대극을 만들지도, 설정을 바꾸어 현대극을 만들지도 않은 것이다. 그는 현대 마르세유라는 이민자들의 도시에서 원작에 있는 과거의 사건을 그대로 재현한다. 예컨대, 게오르그에게 닿는 것은 아날로그적인 사물들이지만 배경으로 보이는 거리에는 빌딩과 자동차들, 캐리어 가방을 끌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다. 게다가 게오르그가 두려워하는 나치는 사이렌을 울리며 특수경찰의 모습을 한 채로 등장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이러한 묘사가 유대인과 망명자를 쫓던 과거 나치 이야기를 불법 난민을 검문하는 현대 유럽 경찰의 모습과 겹쳐보게 만든다는 결론은 아쉽다. 그것은 이 ‘시대착오적’ 방식이 불러일으키는 기묘하고 매혹적인 감각을 해명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작품의 매력은 이야기와 이미지, 과거와 현재라는 두 층위의 충돌 또는 뒤얽힘이 불러일으키는 효과를 들여다보고 싶게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미지의 오인이라는 사태가 발생한 자리, 이 목록을 작성할 수 있을 만한 동시대 영화들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시대착오의 방식으로 동시대의 무의식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 올해의 영화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참고로, ‘트랜짓’의 매력적인 두 배우 프란츠 로고스키와 폴라 베어는 곧 개봉할 크리스티안 펫졸트 감독의 또 다른 작품 ‘운디네’에서도 호흡을 맞춘다. 해의 끝자락에 또 다른 올해의 영화가 나올지도 모르니 기대하시길.

CJ뉴스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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