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4월 종영한 드라마 <눈물의 여왕>의 최종회 시청률은 24.9%였다. tvN 역대 최고 시청률로, 기존 1위였던 <사랑의 불시착>의 최고 시청률 21.7%를 훌쩍 뛰어넘은 수치다. 이 기록은 3.2%p 차이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두 작품이 방영됐던 시기의 전체 TV 시청량에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국내 시청자의 전체 프라임 TV 시청량을 비교해 보면, <눈물의 여왕>이 방영된 올 상반기 시청량은 <사랑의 불시착>이 방영됐던 2020년 당시 시청량의 62% 수준에 불과했다. 즉 TV를 보는 사람 자체가 크게 감소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눈물의 여왕>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역대 1위 기록을 갈아치운 것이다.
<눈물의 여왕>뿐만이 아니다. 올해 tvN 채널에서 방영된 작품들이 잇달아 뛰어난 성과를 내며 <눈물의 여왕>을 포함해 ‘트리플 히트’ 기록을 달성했다. 지난 2월 종영한 <내 남편과 결혼해줘>는 tvN 역대 월화극 1위를 차지했다. <선재 업고 튀어>는 4월 첫 방영된 이후 입소문을 타고 수많은 ‘선친자(<선재 업고 튀어>에 미친 자)’를 양산하고 있다.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 플랫폼이 다변화되면서, TV는 분명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TV에서 멀어졌던 사람들이 tvN 콘텐츠를 보기 위해 다시 TV 앞에 앉고 있다. 시청자들은 왜 수많은 콘텐츠 속에서도 유독 tvN 작품에 빠지고, 본방 사수까지 하는 걸까.
꼭 봐야 할 콘텐츠만 보는 ‘체리 슈머’의 선택은?
매일 시시각각 콘텐츠가 쏟아지는 가운데, 시청자들은 새로운 콘텐츠 소비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일종의 ‘체리 슈머(Cherrysumer)’가 된 것이다. 체리 슈머는 ‘체리 피커(Cherry Picker)’와 ‘소비자(Consumer)’의 합성어이다. 체리 피커는 기업의 상품이나 서비스는 구매하지 않으면서 부가서비스 등 혜택만 챙겨가는 소비자를 뜻한다.
요즘 다수의 소비자는 이보다 한층 진보된 형태의 ‘체리 슈머’로 거듭나고 있다. 자신에게 주어진 한정된 자원을 알뜰하게 사용하기 위해 합리성과 효율성을 추구하는 현명한 소비자를 이른다. 이들이 시장의 핵심 소비층으로 떠오르면서, 기업들은 다양한 전략을 내세워 체리 슈머 사로잡기에 나서고 있다.
체리 슈머의 이같은 소비 경향은 콘텐츠를 감상할 때도 유사하게 나타난다. 바쁜 일상에서 시간과 비용은 한정되어 있다 보니, 수많은 콘텐츠를 일일이 확인하며 감상하긴 어렵다. 명확한 기준을 설정하여 꼭 봐야 할 콘텐츠를 선정한다. 그리고 해당 콘텐츠에 대해선 TV, OTT 등 여러 플랫폼을 넘나들며 집중적으로 감상하고,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다.
tvN 콘텐츠는 체리 슈머가 된 다수의 시청자들의 선택을 받아 ‘최애’ 콘텐츠로 등극하고 있다. 연이은 인기작의 탄생으로 tvN은 개국 이후 최초로 연간 프라임 시청률 1위를 달성했다. 지난 4월엔 tvN 드라마가 OTT를 포함한 전체 드라마의 화제성 점유율 70%를 차지하기도 했다.
tvN과 티빙 넘나드는 CJ ENM만의 경쟁력
이 같은 성과 뒤엔 tvN의 다채로운 전략이 숨어 있다. tvN은 우선 핵심 타깃 시청자를 설정했다. 화제성, 구매력, 파급력이 높은 20~49세 시청자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tvN은 그중에서도 특히 30대 여성을 눈여겨봤다. 30대 여성의 평균 OTT 구독 수는 2.1개로, 전 세대 중 가장 많은 OTT를 구독하고 있다. 모든 연령대 중 콘텐츠를 가장 적극적으로 소비하고 민감하게 반응하기 때문에, 콘텐츠 성과 예측의 바로미터가 된다.
tvN은 이들을 집중 공략하기 위해 해외의 선진 시스템을 적극 접목하고 발전시켰다. 현재 CJ ENM의 미디어사업본부는 드라마 기획 개발 시스템인 ‘tvN-OTT 통합 드라마 GLC (Green Light Committee)’를 자체 운영하고 있다. GLC는 대본을 통해 드라마를 선정하는 프로세스를 의미한다. tvN은 이 과정에서 해외에서 활용되고 있는 ‘듀얼 캐스트’ 전략을 도입했다. 작품별 주요 시청 타깃을 예측하고, 이에 적합한 방영 플랫폼을 정하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내 남편과 결혼해줘>는 웹툰을 원작으로 하기 때문에 젊은 층에 쉽게 다가갈 수 있을 뿐 아니라 중장년층에게도 소구 가능한 불륜과 복수를 소재로 하기 때문에 tvN 채널에 편성했다. 반면 <피라미드 게임>은 10대가 주인공인 점, TV에선 미처 다 표현하기 힘든 수위 등을 이유로 티빙에 편성됐다.
이 과정에서 30대 여성 평가자 비중도 높였다. 박상혁 CJ ENM 미디어사업본부 채널사업부장은 “GLC 참가자 중 30대 평가자 비율을 70% 이상으로 늘려 핵심 타깃이 지향하는 드라마를 더 잘 고를 수 있도록 했다”라고 설명했다.
TV와 OTT의 동반 성장에도 큰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웹툰 원작의 청춘물 <선재 업고 튀어>는 OTT를 중심으로 2030 여성들 사이에서 입소문이 나기 시작했는데, 큰 화제가 되면서 TV 앞까지 시청자들을 불러 모았다. 홍기성 CJ ENM 미디어사업본부장은 “tvN과 티빙을 활용해 젊은 세대를 공약하는 다양한 콘텐츠 변주를 해 나간다면 TV 역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생동하는 ‘유저’와 함께 만드는 tvN 세계
tvN은 시청자를 바라보는 시각 자체도 바꿨다. TV에서 일방적으로 제공되는 영상을 보기만 하는 ‘시청자’에 국한하지 않고, 콘텐츠를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유저(user)’로 인식한 것이다. 고정적이고 수동적이었던 시청자의 지위를 늘 생동하고 적극적인 양상의 유저로 격상시킨 셈이다. 구자영 CJ ENM 미디어사업본부 마케팅담당은 “MZ세대, 특히 Z세대에 가까울수록 시청자에 머무르지 않고 유저가 된다”라며 “이들이 다양한 플랫폼에서 콘텐츠를 갖고 놀 수 있도록 양방향 소통을 하는 것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이 전략은 유저의 반응을 실시간 살펴보고, 민첩하게 반영하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눈물의 여왕>에서 김수현 배우의 ‘자전거 패대기’ 장면이 인상적이라 여러 번 돌려봤다는 댓글을 SNS에서 본 후, 즉각 ‘김수현 자전거 패대기 10분 반복 재생’ 클립을 제작했다. <선재 업고 튀어>의 경우엔 많은 젊은 여성들이 두 주역 배우의 큰 키 차이에 설렘을 느낀다는 점을 포착하고, 키 차이 챌린지를 선보였다.
덕분에 tvN 드라마의 유튜브 조회수 점유율은 38.9%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눈물의 여왕>은 방송사 최초 단일 IP(지식재산권)로 11억 뷰를 달성했으며, <내 남편과 결혼해줘>는 7억 뷰를 기록했다.
‘K콘텐츠 리더’ tvN을 향한 신뢰
tvN의 다채로운 전략이 빛을 발할 수 있었던 건, 무엇보다 tvN에 대한 시청자의 탄탄한 신뢰도가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특정 플랫폼이나 채널에 대한 신뢰도는 체리 슈머에게 중요한 선택 기준이 된다. 수많은 유튜브 채널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양질의 콘텐츠가 꾸준히 올라오는 채널만을 선택해 지속적으로 구독하고 콘텐츠를 즐기는 것을 떠올리면 된다.
이 같은 현상은 TV 채널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TV 채널에 대한 관심과 선호도는 더욱 명확하게 나눠지고 있다. 그중 tvN은 K콘텐츠 성공 방식과 확산에 기여한 채널이자, 새로운 트렌드를 이끌어온 채널로 평가받고 있다. 이에 대한 시청자의 신뢰도가 높기 때문에, TV가 위기를 맞은 상황에서도 tvN 콘텐츠 전반에 대한 관심은 식지 않고 있다.
앞으로 tvN에선 또 어떤 콘텐츠가 방영될까. 올 하반기 라인업도 화려하다. 드라마는 정려원 위하준 주연의 <졸업>부터 김태리 주연의 <정년이>, 정해인 정소민 주연의 <엄마 친구 아들> 등이 잇달아 방영된다. 예능은 이서진 등이 출연하는 <서진이네 2>, 백종원의 <백패커>, 김희선 이수근 등의 <밥이나 한잔해>가 찾아온다.
상반기에 이어 하반기에도 시청자들 사이에선 tvN 프로그램 방영 일정으로 캘린더를 가득 채우는 ‘캘박(캘릭더 박제·일정을 저장하다)’ 현상이 일어나지 않을까. 체리 슈머가 된 시청자들의 시선은 이미, 그리고 앞으로도 tvN에 고정되어 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