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11월 5일 우리나라 최초의 하얀 설탕이 쏟아지던 날. 그로부터 70년이 지났습니다.
종합식품회사에서 식품·생명공학·유통·엔터테인먼트의 4대 사업군을 선도하는 미래 라이프스타일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CJ가 걸어온 도전과 개척, 창조와 성취의 여정을 돌아봅니다.
8화. 국민기업 제일제당, 창업에서 독립까지
1953년 전후 척박한 환경에서 대한민국 최초의 설탕 제조업체로 출발한 CJ그룹은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의 ‘사업보국’ 정신을 계승하며 끊임없이 발전해 왔습니다. 제일제당이 종합식품회사로 성장하고 1993년 삼성그룹으로부터 분리돼 독립경영의 길을 걷기까지. 40년간의 역사는 곧 우리나라 식품산업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CJ뉴스룸이 그 기록을 짚어봅니다.
제일제당의 성공, 한국 제조업의 개화
“일생 동안 벌여온 크고 작은 사업들은 하나같이 국민경제를 생각하면서 구상한 것이지만 그 중에는 국가발전을 위해 필수불가결하고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업도 있었다고 믿는다. 첫째는 1953년 동란의 전진 위에서 아직 포성이 들려오는 가운데 제일제당의 설립을 결심했던 일이다. (중략)제일제당은 경제사적으로 보면 우리 민족자본에 의하여 최초로 탄생된 근대 산업시설이었으며, 자본주의적 생산 양식을 갖춘 유일한 생산공장이었다.”
제일제당 창업주인 호암 이병철 선대회장은 회고록 <호암자전>에서 제일제당의 역사적 의미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호암이 사업을 일으킨 시기는 한국전쟁과 4·19혁명, 5·16 군사정변 등 한국 현대사에 굵직한 흔적을 남긴 최대 격변기였습니다. 그럼에도 제일제당은 설립 이듬해부터 성장 가도를 달렸죠. 창립 10년 만에 자본금이 125배로 늘었고, 매출액도 56배 가까이 늘었습니다.
그러나 호암은 제일제당의 의의를 개인적인 이유가 아니라 국가산업의 발전에서 찾았습니다. 돈을 버는 차원을 넘어 최초의 제조업을 개척한다는 생각으로 제일제당을 설립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제일제당과 제일모직의 완성에 각별히 큰 의의를 찾고 있다. 나름으로는 역사를 선도했다는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다면 오만일까? 그것은 이 두 기업의 경영이 잘되어 부를 얻었기 때문이 아니다. 나의 성공이 우리나라 기업가에 적어도 생산공장 건설 의욕을 불러일으켜 오늘의 한국 경제를 지탱하는 산업 발전의 계기가 되었다는 뜻에서이다.” <호암자전 86p>
기업공개, 국민의 기업으로 거듭나다
회사 설립 20년 만인 1973년 제일제당은 기업공개를 단행합니다. 기업을 공개하기 위해선 충실한 경영으로 매출액과 자산 규모를 매년 확대하고 그 실적을 일반에 제시할 수 있는 기업이어야 했죠.
제일제당은 기업공개의 기본 요건을 모두 갖추고 있었습니다. 자본금 19억 원으로 설탕·밀가루·조미료 등을 생산하는 국내 굴지의 식품회사이자 삼성그룹 내에서도 수익성이 가장 높은 기업체였습니다.
1973년 6월 12일과 14일 양일간 주식청약을 실시하자 청약이 쇄도했습니다. 20만 주 매출에 무려 717만 4,050주가 신청됐습니다. 36대 1의 경쟁률이었습니다. 150%가 넘는 프리미엄에도 36배의 청약률을 보인 것은 제일제당의 공신력이 그만큼 높다는 것을 의미했지요. 마감 시간이 되어 청약을 받을 수 없게 되자 내려진 셔터를 흔들거나 2층 창을 타고 사무실에 난입하는 등 일반 투자자들의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그해 한 언론은 제일제당을 ‘삼성의 모태 기업으로 오늘의 삼성을 재계 정상으로 올려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기업’으로 언급하기도 했습니다. 사업보국의 이념으로 회사를 일으킨 지 20년, 실질적인 국민의 기업으로 발돋움한 것입니다.
매출 1조원 돌파! 초일류기업을 향한 도전
기업공개를 실시하면서 제일제당은 대대적인 경영합리화와 체질 개선에 나섰습니다. 신제품을 더 활발히 개발했고 신규 사업에도 의욕적으로 진출했죠. 그 결과 제당·제분·조미료·사료·식용유·대두가공·육가공으로 생산 품목을 확대해 마침내 국내 최고의 종합식품회사로 거듭나게 됩니다.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 건 소비자와의 소통입니다. 제일제당은 1973년부터 운영하던 ‘소비자신고센터’를 발전시켜 1981년 소비자상담실을 설치했습니다. ‘한 번 인연은 영원한 인연, 불만 접수 즉시 처리’. 제일제당이 설정한 모토였습니다. 24시간 상시 불만 접수를 위해 자동응답시스템을 가동했고, 불만 접수 후 3시간 내 처리를 원칙으로 했죠.
노력의 결과는 매출로 나타났습니다. 1970년 106억2,000만원이던 매출액은 1978년 1,000억원선을 돌파했고 이후 2년 뒤인 1980년에 3,000억 원을 넘어섰습니다. 그리고 1986년, 제일제당은 마침내 식품 업계 최초로 매출 5,000억 원을 달성하게 됩니다.
이후 제일제당은 온라인 전산화시스템을 정착시키고 경영 전 부문에 걸쳐 종합적인 합리화운동을 추진하는 등 미래 성장을 위한 기반을 다져나갔습니다. 생산합리화와 경영합리화는 물론 1988년 백설표식용유에 국내 제조업계 최초로 바코드 시스템을 도입하는 등 판매 부문에서도 혁신을 이어갔습니다.
매출 5,000억 원을 돌파한지 5년 만인 1991년, 제일제당은 식품업계 최초로 1조 원의 매출을 기록했습니다. 국내 기업 가운데 25위, 순수 제조업체 중 13위, 삼성그룹 중에서는 5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습니다. 당시 16조원 규모인 국내 식품시장의 6.25%를 점유한 셈이었죠. 매출액 기준으로 제일제당보다 상위에 있는 기업은 종합상사, 자동차, 중공업, 건설, 정유 등 기간산업뿐이었습니다.
제일제당의 매출 1조 원 돌파는 식품업계는 물론 우리나라 제조업의 신기원이었습니다. 1953년 설탕 제조로만 매출 500만 원을 기록한 이후 38년 만에 20만 배라는 놀라운 성장을 기록한 것입니다. 특히 식품업이 전반적으로 부진을 겪을 무렵에 이러한 실적을 달성했다는 사실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습니다.
제일제당 독립 경영의 시작… 호암의 창업 정신 되살려
1990년대 초반 한국 경제의 미래는 불투명했습니다. 1980년대 후반부터 노사분규가 지속됐고 임금이 급상승하면서 경쟁력을 잃어갔습니다. 내수 경기가 악화되고 수출 부진이 지속되면서 기업들은 내실 경영에 주력했죠.
당시까지도 제일제당의 비전과 목표는 오직 식품업에 국한돼 있었습니다. 1992년 매출 1조2,600억 원을 기록해 국내 최대의 식품회사로 우뚝 섰지만 더 큰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제일제당이 거둔 막대한 수익이 재투자되지 못하고 다른 계열사로 넘어가는 현실에 불만을 갖는 임직원도 많았습니다.
신사업 확장에 목말라 있던 제일제당에도 웅크렸던 날개를 활짝 펼 수 있는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1993년 창립 40주년에 삼성그룹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21세기 초에는 세계적인 생활문화기업으로 성장하겠습니다”. 독립경영 기념식에서 제일제당이 밝힌 포부였습니다. 새로운 사업 진출의 장벽이 무너진 대신 더 큰 도약의 과제가 주어진 셈이었죠.
언론은 제일제당의 독립을 대서특필했습니다. 제일제당은 이병철 선대회장이 최초로 설립한 제조기업이자 우리나라 최장수 제조기업이었고 삼성그룹의 모태로서 실질적인 출발점이라는 상징성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1993년 6월, 제일제당은 손경식 당시 안국화재 부회장을 제일제당 부회장으로, 이재현 당시 삼성전자 이사를 제일제당 상무로 선임하는 인사를 발표했습니다. 향후 제일제당을 이끌어갈 이재현 상무의 전면 등장은 임직원들에게 새로운 비전과 자신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제일제당의 역량만으로도 미래 지향적인 회사로 발전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쳤습니다.
독립선언 이후 경영권과 인사권을 차례로 확보한 제일제당은 남산 신사옥을 매입해 새로운 미래로 도약할 보금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창립 43주년을 맞은 1996년엔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의 부조 제막식을 열고 ‘사업보국, 인재제일, 합리추구’라는 창업이념을 되새기기도 했지요. 이병철 회장의 창업정신이 제일제당으로 이어지는 순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