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래는 저에게 ‘가족’이에요. 부모님을 모두 떠나보낸 뒤, 저에게 음악마저 없었다면 무너졌을 것 같아요. 노래에서 치유와 위로를 받을 수 있도록 곁을 지켜주신 CJ나눔재단에 정말 감사합니다.”
지난달 CJ뉴스룸과 만난 경기도 중앙예닮학교 완이화(18) 양의 말이다. 완 양은 미얀마 카렌족 출신으로 한국에서 활동하는 가수다. 2018년 <MAMF 대한민국 이주민 가요제>에서 뛰어난 노래 실력을 선보였고, 2020년 KBS2 <트롯 전국체전>을 시작으로 <유희열의 스케치북> <불후의 명곡> 등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본명은 ‘완이화 퐁파타난던’. 2007년 미얀마 소수민족인 카렌족 부모님 사이에서 태어나 태국에서 자랐다. 완 양이 여섯 살 되던 해 아버지가 사고로 사망했고, 4년 뒤인 2016년 어머니와 세 남매가 함께 한국으로 이주했다.
한국에 정착한 지 9년. 완 양의 한국어는 해외에서 태어난 것을 눈치채기 어려울 정도로 완벽했다. “기역, 니은도 모르는 상태로 초등학교 3학년에 입학했어요. 태어나서 처음으로 받아쓰기에서 빵점을 받았죠. 가족 중 아무도 한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이 없었어요. 학교 다니는 맏딸인 제가 언어를 빠르게 익혀야겠다는 책임감으로 금방 배웠습니다.”

음악을 시작한 데는 아버지 영향이 컸다. 아버지는 미얀마의 ‘국민 가수’였다. 재능을 물려받은 완 양은 아버지 대신 무대에 서던 기억이 생생하다고 했다. 한국으로 이주한 뒤엔 이주민 가요제 등 각종 노래 오디션에 참가했다. 트로트 경연이 인기를 끌던 무렵 한 번도 불러보지 않았던 트로트 장르에 도전해 나이를 뛰어넘은 감정표현으로 큰 화제를 모았다.
중학교 3학년이던 2022년 KBS <불후의 명곡>에 출연 기회를 얻었다. 유명 가수 폴 포츠와 함께 듀엣으로 백지영의 ‘잊지 말아요’를 부를 기회였다.
당시 완 양의 어머니는 뒤늦게 발견한 간암으로 투병 중이었다. ‘이 무대는 꼭 보고 가시라’고 기도했지만, 어머니는 완 양의 녹화 일주일 전 숨을 거뒀다. 무대를 준비하고 올라가면서 ‘엄마가 보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하는 생각에 많이 울었다고 했다.

완 양이 어머니의 투병 등 어려운 시간을 버틸 수 있었던 데는 중학교 2학년 때 참여한 CJ나눔재단이 중·고등학생 동아리를 대상으로 문화 창작 및 체험을 지원하는 ‘CJ도너스캠프 문화동아리’의 힘이 컸다. 완 양은 “어머니가 아프시면서 남동생들과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이 많았고, 경제적 어려움도 컸다”며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힘든 마음을 순간순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영화, 요리, 방송 등 다양한 예술 활동을 하는 친구들을 만나며 새로운 자극도 받았다. “저는 자신감이 별로 없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친구들은 ‘나는 뭐든 할 수 있고, 해낼 사람’이라는 확신이 있더라고요. ‘자신감이 이렇게 멋진 것이구나’. 저도 포기하지 않고 다시 한번 제 꿈에 도전해보기로 결심했죠.”

고등학교 입학 후엔 학교 음악 선생님의 추천으로 ‘CJ도너스캠프 문화동아리 장학’ 프로그램에 3년 연속 선발됐다. ‘CJ도너스캠프 문화동아리 장학’은 ‘CJ도너스캠프 문화동아리’ 활동 청소년 중 문화 분야에 꿈과 재능이 있는 청소년을 발굴해 장학금과 진학 및 진로개발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다. 2022년 부터 완 양과 같은 청소년 40명을 지원해 왔다.
완 양은 CJ도너스캠프의 장학금을 통해 음악대학 입시에 필요한 보컬, 악기 레슨과 이론 수업 등 전문 교육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었다. 또 MR을 제작하는 비용 등 활동에 필요한 실질적인 비용들을 지원받으며 경제적인 부담을 덜 수 있었다.
“어머니께서 살아계실 때 저에게 ‘방송에만 매달리기보단 학창 시절에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충분히 누리라’고 강조하셨어요. 그 말씀을 따라 지금은 학교 생활과 대학 입시에 몰두하고 있죠. CJ나눔재단의 지원 덕분에 음악에만 집중할 수 있어 정말 감사한 마음입니다.”
완 양은 음악 활동을 통해 번 돈을 고향의 친구들에게 기부하기도 했다. 완 양은 “큰 돈은 아니지만 미얀마의 친구들도 저처럼 교육의 기회를 얻고 꿈을 키웠으면 하는 마음에 조금씩 마음을 전하고 있다”며 “CJ에서 받은 사랑과 도움을 더 어려운 분들께 전하고 싶다”고 말했다.
“CJ나눔재단을 통해 제가 꿈꿀 수 있었던 것처럼, 저 역시 누군가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도움 주신 분들께 좋은 모습 보여드리기 위해 열심히 연습하고 노력하고 있어요. 보내주신 사랑 헛되지 않게 실력 있는 가수가 되어 보답하겠습니다.”
20년 동안 키워 주셔서 이렇게 잘 자랐어요.
주신 사랑보다 더 많이 베풀고 싶어요.
아무도 없던 저한테 유일한 희망이었어요.
힘내서 달려갈 용기를 주셔서 모두 감사합니다. 모두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중앙예닮고등학교 3학년에 재학 중인 완이화입니다.
서울대학교 컴퓨터 공학부 25학번 이영찬입니다.
저는 한국 예술종합학교 3학년에 재학중인 플루트 전공 변상훈입니다.
고양 총시청 마라톤팀입니다.
저는 일단 부모님 두 분이 미얀마분이세요.
미안마의 소수민족인 카렌족이신데 저희 아빠가 미안마의 유명한 가수세요.
아빠가 콘서트도 되게 많이 하러 다니는데 가끔 아빠 무대 사기도 했었고
어렸을 때부터 엄마가 좀 노래를 자주 시켰던 거 같아요.
태국에서 제가 한 일곱살이 되었을 때 아버님 돌아가셔서
엄마랑 남동생이랑 2016년에 한국에 오게 되었어요.
학교 반가우에 플루트 교실이 있어서 그때 우연치 않게 시작을 했고
집에 또 마침 엄마가 한 30년 전에 대학생 때 부셨던
낡은 플룻이 하나가 있었어서 저거 한번 불어보고 싶다.
악기가 되게 이쁘다 생각하고 막연하게 시작을 했었는데
제가 초등학교 때 지역 아동센터에 다녔었는데
그 지역 아동센터에서 학습지와 문제집 관련해서
되게 많은 지원을 해 주셨어요.
관련한 공부의 흥미가 좀 생겨서
그 과정에서 굉장히 열심히 공부를 했었습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저가 조금 달리기를 잘 뛰어서
그 초등학교 코치 님한테 스카우트 제가 와서
그때 처음으로 육상을 시작하게 됐어요.
육상은 튼튼한 두 다리만 있으면 될 거 같지만
1년에 천만 원 이상 장비가 드는 운동이에요.
근데 가정편이 좋지 않고 어머니가 편찮으셔서
육상을 계속 해야 되나 고민이 많았어요.
정부 지원을 받아야지만 살 수 있는 집안의
산매 중에 셋째였고 음악 전공을 한다는 거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었는데
제가 다니던 지역아동 센터에 어 CJ에서
공문이 내려왔다. 한번 플루스로 지원을 해봐라.
어 거의 3년 동안 레슨비를 전액정 지원받았고
콩크루도 거의 다 이제 CJ 도움으로
나갈 수 있었던 거 같아요.
CJ 아니었으면 절대 못 했을 지원을
매년 해야 되는데 매년 할 때마다
아 이번에 안 되면 악기 그만둬야 된다
싶은 마음으로 좀 간절하게 준비를 했었던 거 같아요.
어 제가 사실 음악 동화를 중학교 3학년 때부터 하게 되었어요.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어 집안에 힘든 그런 마음들 잠 좀 순간순간
조금은 내려놓을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리고 고등학교에 올라와서도 꾸준히
음악 동아리 활동을 했었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선생님께서
이러한 좋은 장학 프로그램이 있다
한번 지원해 보는게 어떠냐 하셔서 지원했는데
감사하게도 장학생으로 선발해 주셔서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제가 3남매 가정인데 세 명 다 학원을
보내기에는 조금 재정이 넉넉 지역 아동센터서
선생님께서 제가 고등학교에 올라갈 때
CJ 장학이라는 이러한 장학 제도가 있다라고
저에게 소개를 해주셨어요.
그 결과 좀 부족하지 않을 만큼의
학습 지원을 많이 받았고 그래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받으면서부터
잘 뛰 뛰기 시작했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68 33m에서 1위
작년에 종국 체육대회에서는 3,m
장애을 1위 10km 1위를
했습니다. 그래서 국가대표 후보
상비군에 들어갈 수 있게 됐어요.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 여기까지 왔는데
1년이라도 허트로 쓰고 싶지는 않았어
가지고 한 다섯 개 정도 콘크로를
도전을 했었던 거 같아요.
제가 이름을 알리게 된게 그 외국인
이주민 가요제라고
있었는데 제가 전설서
계셨는데 앞에 앉아 계신 아저씨께서
저 보면서 많이 와 지금 제 노래하는
영상을 보고 계셨던 거예요. 사실
음악이 아니었다면 되게 무너졌을 것
같아요. 상황적으로도 그렇고
실질적으로 많은 어려움이 닥쳐와서
개시제의 지원을 통해서
좀 나의 음악을 마음껏 펼치고 배울
수 있었던 거 같아요.
저도 고등학생 때 그 멘티로 생활을
하면서 제 대학생 멘토 선생님께 되게
큰 도움을 많이 받았어서 이제 저도
대학생 멘토로서 나눔의 선수를
실천하고 싶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그래서 대학생 멘토로 이제
활동을 시작하게 되었고 그렇게 대학생
멘토 활동을 하면서는 제 멘티
학생들이 어 굉장히 열심히 하면서 잘
따라와 주는 모습을 보면서 되게
뿌듯함을 많이 느끼고 있습니다.
첫 월급을 받고이 월급을 의미 있게
쓰고 싶어서 고민을 하다가 저에게
도움을 줬던 CJ에게 다시 기부를
하게 되었어요. 제 도움이 필요한
후배들이나 사람들이 있으면은 제가
가서 할 수 있는 거는 다 해 드리고
싶어요. 그러기 위해서 더 열심히
훈련하고 더 열심히 노력해서 좋은
선수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제가 지금 가수 활동을 하고
있잖아요. 받은 돈으로 미안마에 있는
아이들에게 기부를 해 준 적이
있어요. 큰 금액은 아니었지만 저의
재능을 통해서 많은 아이들에게 또
제가 시제에게 받은 이런 사랑과
도움처럼 이렇게 자기의 꿈을 이루는데
도움을 주고 싶어요.
사실 그때는 저의 가능성을 저
스스로도 몰랐는데
어떻게 나한테 한두 푼도 아닌 큰
금액을 지원을 해 주실 생각을
했을까? 선발 면접을 볼 때 정말이
친구가 스스로 인생을 이끌어 나갈 수
있는가? 어떻게 지원을 받아서 사회
일원으로서 이걸 다시 재현신할 수
있을까를 보셨다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스스로는 자기 가능성을
판단하지 못하지만 뭔가 꿈꿔 볼 수
있는 기회라도 만들어 주셨던 거에
너무 감사하고 계속해서 이런 지원
사업을 통해서 더 꿈을 크게 키우고
더 나아가서 선한 영향력을 꿈꾸는
그런 어린 친구들이 많이 생겨났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는
우리의 흔결
절망한 영원이
안녕.
사랑아
사람으로 오래 살지 말고 사랑으로
뜨겁게에
살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