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OPULAR NOW

01

TEAM CJ 김민선, 세 번째 올림픽을 향한 단단한 질주
2026.01.29

02

새로운 설렘을 이어갈 2월 CJ ENM 신규 콘텐츠
2026.01.30

03

TEAM CJ 최가온, 거침없이 날아 5m 점프… 밀라노서 한국 스노보드 첫 금메달 도전
2026.02.11

04

“한겨울에도 5시간 대기” 화제의 ‘헬로키티x지수’ 팝업스토어 현장
2026.01.22

05

[CJ뉴스룸X폴인] “이커머스 판 뒤집었다” 모바일 라방 띄운 현직자 3인의 생존법
2026.01.28
‘센티멘탈 밸류’는 제78회 칸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국내 관객의 큰 사랑을 받은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의 요아킴 트리에 감독과 레나테 레인스베 배우가 다시 호흡을 맞춰 화제를 모은다. 2월 18일 개봉해 CGV 아트하우스를 포함한 전국 극장에서 만나볼 수 있다. 영화 <셀리멘탈 밸류> 리뷰 영화 <셀리멘탈 밸류> 메인 포스터. 영어 표현으로 ‘센티멘탈 밸류’(정서적 가치)는 실용 가치와 무관하게 개인적 정서가 담겨진 소중한 가치를 뜻한다. 부모의 유품, 애인이 준 선물처럼 정서적 가치는 사물에 담겨진다. 모두에게 통용될 순 없지만 한 개인에게는 세상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가치. 사물에 담긴 그 가치는 개인의 기억을 통해 유지되고 시간의 흐름을 통해서 더욱 가치를 키워나간다. 결국 시간의 흔적이 묻어난 사물 속에서 정서적 가치는 빛을 발하게 된다.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센티멘탈 밸류>(2025)를 통해서 자신에게 정서적 가치는 바로 ‘영화’ 그 자체에 담겨 있음을 고백한다. 전작인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의 성공으로 노르웨이를 대표하는 감독이 되었지만 요아킴은 시선을 외부로 돌리지 않고 자신의 과거를 응시하고, 가족의 아픔과 고통을 품어 안는다. 무엇이 그로 하여금 자신의 가족사로 회기하도록 만들었는지, 정작 영화를 통해 대면하려 했던 정서적 가치는 무엇인지, <센티멘탈 밸류>에 담긴 감독의 내면을 조심스레 들여다 본다. 언어화 할 수 없는 감정을 표현하는 요아킴의 방법 집 정원에서 마주선 구스타프와 노라. 1974년,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태어난 요아킴 트리에 감독은 영화 감독인 외할아버지 에리크 뢰벤, 사운드 디자이너였던 아버지 야곱 트리에의 영향 아래에서 성장한다. 그는 훗날 인터뷰를 통해서 외할아버지에게 영화는 자신의 아픔을 치유하는 도구였음을 고백한 바 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저항군에 참여 했던 할아버지는 나치에 붙잡혀 고문 당해야 했고 전쟁이 끝난 이후 그는 재즈 음악가이자 시나리오 작가, 영화 감독으로 현대적이고 실험적인 작품들을 제작했다. 요아킴 감독은 할아버지가 영화를 통해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마주하고, 어떻게 용서했는지, 그 과정을 지켜보았다. 할아버지가 그러했 듯, 시각적 환영을 만들어내는 영화의 가상성이 어떻게 진실을 담아낼 수 있는지, 요아킴 감독은 할아버지의 영화언어를 자신의 것으로 흡수한다. 그 결과 그는 언어화 할 수 없는 인간들의 감정을 스크린의 이미지로 환원시키며 외면했던 감정들과 대면 시키는데 주력한다. 그 과정은 지리멸렬 하며(<오슬로, 8월 31일>(2011)), 공포스럽고(<델마>(2017)), 지독하리만치 처절할 수 있지만(<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2021)), 감독은 이 모든 과정이 필요한 것임을 끝내 관객들에게 설득시킨다. 행동을 관찰하는 영화적 시선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긴 노라. <센티멘탈 밸류>는 감독이 수행하선 했던 영화적 태도를 구체적으로 극중 인물들에게 요구한다. 타인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는 터부시된 감정들이 스크린을 뚫고 관객을 향해 뿜어져 나왔던 이전의 작품들과 달리, <센티멘탈 밸류>는 조금 떨어진 시선으로 한 가족 구성원들의 내면을 가만히 응시한다. 언어화 할 수 없는 인간의 감정들을 스크린의 이미지로 환원하기 위해서 감독의 시선은 절대 인물들의 행동 보다 앞서지 않는다. 구스타프(스텔란 스카스가드)가 손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2002)과 <피아니스트>(2001) DVD를 선물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성으로 통제할 수 없는 내면의 충동에 이끌려 행동하는 두 작품의 인물들처럼 요아킴 감독은 인물들의 행동에 주석을 달지 않는다. 오직 카메라의 시선을 통해서 행동을 재현하고 설명되지 않은 인물의 내면을 상상하도록 만든다. 그 결과 우리는 인물들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의 결들을 오롯이 만나게 된다. 공연 직전 호흡곤란으로 옷을 찢어내는 노라(레나테 레인스베)의 불안함도, 아들을 출연시키려는 아버지를 끝내 이해해 보려는 아그네스(잉가 입스도테 릴리오스)의 침착함도, 절대 단일한 결로 이뤄진 감정들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정서적 가치로서의 집 집 안에서 아버지와 유명배우 레이첼(엘르 패닝)을 바라보는 노라와 아그네스. 한 가족의 역사와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는 ‘집’은 <센티멘탈 밸류>가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정서적 가치가 담긴 대상이다. 우린 모두 집이 필요하다. 세상의 수많은 자극들에 지친 몸과 마음을 잠시 뉘일 수 있는 공간이 우리 모두에겐 반드시 필요하다. 구스타프와 노라, 아그네스는 증조부모 세대부터 살아온 집을 소유하고 있음에도 그 집은 누구의 집도 되지 못한다. 구스타프에게 집은 어머니가 자살한 곳이다. 자살을 목도한 어린 소년의 구스타프에게 집은 절대 안식처가 될 수 없다. 그의 딸 안나는 구스타프의 부재 속에서 집의 침묵을 견뎌야 했다. 그녀에게 집은 지독하리만치 텅 비어있는 시공간이다. 이 집은 그녀의 내면으로 확장된다. 그래서 텅 빈 내면을 들키지 않기 위해 타인 앞에서 연기하고 가까워지길 꺼려한다. 트라우마의 흔적들로 가득한 집을 오롯이 응시할 수 있는 자는 아그네스가 유일하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집을 정리하는 자도, 집을 유산 상속의 대상으로 여기는 자도, 아그네스 뿐이다. 그 누구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했던 구스타프와 노라와 달리 아그네스는 노라의 보호 아래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탓이다. 성인이 되어 언니를 돌보는 아그네스의 보호가 결국 노라를 변화시키고, 그 변화가 또 다시 구스타프를 변화시킨다. <센티멘탈 밸류>는 아그네스를 통해서 잃었던 집을 새롭게 지어가는 과정을 그린다. 영화가 치유의 도구일 수 있을까? 아그네스와 셀카를 찍는 레이첼. ‘영화’는 <센티멘탈 밸류>가 추구하는 정서적 가치가 담긴 또 하나의 대상이다. 영화를 통해 고통을 승화시키려 했던 요아킴 감독의 할아버지처럼 구스타프는 영화로 구원을 갈망한다. 아그네스가 연기했던 구스타프의 영화 속 소녀는 독일군에게 붙잡힌 소년에 대한 죄책감 속에서 눈물을 흘린다. 그녀의 눈물은 어머니를 구하지 못한 구스타프가 흘린 죄책감의 눈물과 닮아 있다. 이제 새롭게 만들려는 영화는 직접적으로 자살한 어머니의 삶을 다룰 예정이며 그 이미지는 큰 딸 노라를 욕망한다. 구스타프가 노라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캐스팅하려는 것은 과거에도 그러했듯, 어머니의 자살을 목도한 뒤로 텅 비어버린 자신의 내면을 노라를 통해 채워 넣기 위함이다. 지극히 이기적인 선택임에 분명하나 한 가지 커다란 작용이 있다면 이 과정이 아그네스가 그러했 듯 노라에게도 필요하다는 데 있다. 노라가 무대에 오르기를 극도로 두려워하는 것은 매순간 무대 위에서 자신의 텅 빈 내면을 관객 앞에 들춰내야하기 때문이다. 카메라의 뒤에서 자신의 텅 빈 내면을 이미지로 그려내는 구스타프와 제 3의 인물을 내면화하는 과정 속에서 자신의 트라우마를 대면하는 노라는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서로 연결된 존재들이다. 그들은 자신의 아픔을 대면하는 과정 속에서 똑같이 신체적으로 고통 받고 쓰러진다. 다른 점이 있다면 구스타프는 끊임없이 영화를 통해 구원을 갈망하지만 노라는 구원을 믿지 않는다는 데 있다. 둘 사이를 중제하는 서사적 역할은 아그네스에게 있지만 결국 그들의 화해를 강렬히 욕망하는 자는 요아킴 감독이다. 아그네스를 통해 위로받는 노라. 영화적 환영이 만들어내는 효과를 요아킴 감독은 전적으로 신뢰한다. 편집이 만들어내는 시각적 기만이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요동치게 만들고 그 효과가 우리의 마음에 어떤 작용을 일으키는지, 요아킴 감독만큼 심도 깊게 탐구한 감독도 드물다. 영화가 저물어가는 시대에, 넷플릭스에 의해 극장 관람 문화가 시들어가는 시대에, 요아킴 감독은 끝까지 영화의 힘을 붙잡는다. 그리고 관객에게 그 힘을 전한다. 당신의 아픔이 위로 받기를, 좀 더 나아가 그 아픔이 치유되기를.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