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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세계의 주인> 리뷰 영화 <세계의 주인> 메인 포스터 윤가은 감독에게 세계는 어떤 의미일까? <우리들>의 세계는 아이들의 설익은 감정과 행동들이 빚어내는 갈등이 총천연색으로 빛나는 세계였다. 모든 인물이 결핍과 관심 속에서 서로에게 생채기를 내지만 그럼에도 절대 그들을 미워할 수 없는, 깊은 애정이 묻어난다. <우리집>은 외면과 무관심 속에서 처절하게 버려졌음에도 끝까지 희망을 놓지 않는 아이들의  X세계였다. 아픔을 겪으면 아픔이 만들어낸 상처들이 서로에게 또 다른 가시로 서로를 찌를 수 있을 텐데도 <우리집>의 세계에선 끝까지 인물들을 보듬고, 품어냈다. 그래서 끝내 아이들의 외로움에 충분히 공감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렇다면 <세계의 주인>의 세계는 어떨까? 초등학생이었던 감독의 세계 속 주인공은 어느덧 고등학생이 되었지만, 그들이 엮어가는 세계는 여전히 녹록치 않다.  세상은 그들에게 한없이 잔인하지만 그럼에도 살아내기 위해 몸부림치는 인물들이 살아 숨 쉬는 세계. 이전보다 더욱 깊어지고 넓어진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을 조금 더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서명을 받으려는 수호와 대립하는 주인 매사에 명랑, 유쾌, 발랄한 주인(서수빈)은 학교에서 친구들에게 인기 많은 ‘인싸’다. 그녀의 웃음은 전염성이 짙어서 주변 모두를 웃게 만들고, 행동은 친밀감이 깊어서 어떤 서먹한 순간도 편하게 풀어낸다. 그녀는 모두에게 전혀 의심의 여지 없는 ‘좋은 친구’였다.  적어도 같은 반 수호가 전교생을 대상으로 성폭행 범죄자가 같은 동네에 살지 못하도록 서명을 받으러 다니기 전까지는…  수호의 서명 운동에 동참하지 않으려 하는 주인의 태도는 친구들 사이에서 오해를 낳고 주인의 진심까지 의심하도록 만든다. 그녀의 이해되지 않는 행동들은 소문을 낳고 소문이 진실이 되어 아이들 사이를 떠돈다.  그 사이에서 주인은 힘겹게 자신의 진실을 지켜내야 한다.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주인이 직접 이야기한들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관심이 없지만 그럼에도 주인은 자신을 지켜내려 노력한다.  <세계의 주인>은 서사의 결들이 다채롭게 엮인 작품이다. 영화의 시간은 선형으로 흐르지만, 그 안에 담긴 인물들의 감정과 서사는 절대 몇 줄의 시놉시스로 응축되지 않는다. 앞서 정리한 작품의 시놉시스 또한 작품의 한 단면만 담아냈을 뿐 영화의 전체 서사를 그려내진 못했다. 그것은 이 작품이 끝내 숨기고 있는 것, 절대 보여주지 않으려 하지만 그럼에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이 무엇인지 관객들에게 직접 상상하고 목도하게 하려는 감독의 의도 때문이다. 관객은 목격자가 되어 극 중 인물들의 어느 한편에 서기도 하고, 관망하는 위치에 서기도 한다.  관객의 관음증적 시선은 결국 모든 진실이 밝혀지는 순간 스스로를 찌르는 비수가 되어 날아오지만, 이 사실을 깨닫기 전까지는 스스로가 주인을 2차 가해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깨닫지 못한다. 트라우마를 겪지 않은 자들은 깊은 트라우마 속에서 발현되는 부조리한 행동들을 절대 이해하지 못한다.  마치 이해하고 있고, 이해할 수 있다는 착각 속에서 벌어지는 모든 위로의 말과 행동들은 피해자의 마음속에 또 다른 깊은 상처를 남길 뿐이다.  봉사 활동에서 남자 친구를 소개하는 주인 <세계의 주인>은 이 사실을 관객들이 먼발치에서 지켜보도록 하지 않는다. 관망의 시선은 상처 속에 있는 자들을 대상화하며 그들의 고통을 영화적 카타르시스로 소비하는 행위일 뿐이다. 윤가은 감독은 관객들에게 이 사실을 사려 깊게 주지시킨다. 서사적 차원에선 주인을 의심하는 위치에 세워 두면서도 관객의 시선은 주인의 부조리한 말과 행동을 지켜보게 한다. 말할 수 없는 것들을 모순된 행동으로 드러내는 인물의 이면을 적극적으로 상상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관객은 손쉽게 오해의 길로 빠지거나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다.  본 것과 기대하는 것이 서로 상충하는 상황 속에서 영화가 끝나는 순간 관객이 깨닫는 것은 나 또한 결국은 2차 가해자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음이다. 나의 안전한 위치가, 관망의 자세가 주인과 같은 피해자들에게 어떤 상처를 남길 수 있는지 영화적 체험을 통해 온몸으로 감각하게 된다.  그 순간에 느끼는 참혹한 심정이야말로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려는 핵심이다. 관객들은 주인을 피해자로 상상하지 못한다. 그것은 주인이 피해자로서 스스로를 고정시키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주인의 태도는 ‘피해자’를 추상적으로 상상했던 관객들의 고정관념을 정면으로 겨냥한다. 그리고 주인의 주변 인물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 또한 주인을 의심하고 평가하고 판단하진 않았는지 돌아보게 한다.  세상은 피해자들에게 피해자다움을 요구하며 그들의 고통을 대상화한다. 피해자가 피해자다울 때 그들의 피해 사실은 인정될 수 있으며 그들의 아픔은 현실이 된다.  주인은 이 모든 것을 거부하는 존재다. 우리는 그녀를 통해서 세상의 편견과 내 안의 고정관념을 발견한다. 그리고 우리가 놓쳤던 그녀의 행동과 말들, 표정과 시선 이면에 어떤 일들이 있었을지 적극적으로 상상한다.  영화가 끝난 뒤 주인의 과거와 현재를 연결 지을 수 있게 된 관객들은 그제야 비로소 주인을 온전히 응시할 수 있게 된다. 익명의 쪽지를 받고 주변을 경계하는 주인 이 모든 것은 전적으로 주인 역할을 맡은 손수빈 배우의 힘으로부터 비롯된다. 단 한 번도 스크린에 얼굴을 비춘 적 없는 그녀의 익명성이 주인을 현실 속 살아 숨 쉬는 인물로 만든 결정적 요인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전 필모그래피와 상관없이 그녀의 표정, 호흡, 손짓과 몸짓 하나하나는 이미 주인의 것이었다.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명랑함의 이유도, 찢어질 듯한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며 내뱉던 괴성이 던진 의문도, 손수빈배우는 모두 품어낸다. 부조리할 수밖에 없는 인물의 감정들이 결국 이해되고 받아들여질 수 있는 설득력을 손수빈은 끝내 온몸으로 체화해 낸다.  윤가은 감독의 이전 작품들 속에서 인물들이 어떻게 살아 숨 쉬었는가 떠올려 본다면 이 또한 감독의 역량 때문이라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만큼은 윤가은 감독의 연출력이 기억되지 않을 정도로 손수빈 배우가 던진 감정의 파고가 깊게 가슴 속에 파묻힌다.  그래서일까? 작품을 보고 나면 배우가 누구인지 한 번쯤 검색창에 이름을 두드리게 될 것이다. 이런 관심이 하루속히 그녀를 또 다른 좋은 캐릭터로 만날 수 있는 원동력이 되길 바랄 뿐이다. 친구들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주인 한국의 여러 기관에서 발표된 보고서들은 하나같이 말한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피해 이후 어떤 가혹한 현실 속에서 아파하고 무너져 가는지. 이성적이고 분석적인 보고서의 언어들조차도 피해자들의 고통은 외면하지 못한다.  <세계의 주인>에 담긴 화면들은 보고서의 언어와 닮아 있다. 인물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들의 감정을 과잉 시키지 않으면서도 끝내 그들의 고통을 스크린 너머로 전달하고야 만다. 그렇다면 <세계의 주인>을 통해 그들의 곁을 함께 경험한 우리들은 어떤 말로 화답할 수 있을까? 작품이 던진 고민이 작게라도 한국 사회에 넓게 퍼져나가길 바라본다. ‘세계의 주인’은 ‘우리들’, ‘우리집’으로 주목받은 윤가은 감독 작품이다 제50회 토론토국제영화제, 바르샤바국제영화제 등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연이어 초청되며 화제가 되고 있다. 10월 22일 개봉해, CGV 아트하우스를 비롯한 전국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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