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이 다가올수록 이번에는 어떤 선물을 해야 할 지 고민이 되는데, 역시 선물세트 만한 게 없다. 많고 많은 제품이 있지만 선택의 기준은 단 하나, 바로 디자인! 한눈에 보기에도 만족스러운 비주얼이 주는 사람도, 받는 사람도 기분 좋기 때문이다. 손이 갈수밖에 없는 디자인의 비결은 무엇일까? 패키지 디자이너, 정새롬 님에게 직접 물었다.
디자인계의 종합 선물세트, 식품 패키지 디자인의 길
설 명절을 앞두고 마트에 가면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바로 선물세트다. 크기, 종류, 구성도 각기 다른 수십 가지의 선물세트가 소비자의 눈에 들기 위해 전시되어 있다. 다양한 선물 세트의 각축전이 벌어지는 시기인 만큼 담당 디자이너들도 바쁜 건 마찬가지. 정새롬 님은 매장에 진열된 설 선물세트도 살피고, 경쟁사는 어떤 구성으로, 어떤 제품을 냈는지 파악하는 등 쉴 새가 없다. 게다가 추석 선물세트 준비를 벌써 시작했다고. 디자이너는 디자인만 하는 줄 알았는데, 시장 조사부터 기획, 디자인, VOC 확인까지 제품에 손이 닿지 않는 곳이 없을 정도로 업무 영역이 넓다.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정새롬 님이 구체적으로 패키지 디자이너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은 대학교 졸업 전시 때다. 졸업 작품 전시를 위해 1인 가구를 위한 식품 패키지 디자인을 했는데, 그것이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패키지 디자이너가 돼야겠다고 결심한 것. 졸업 후 운 좋게 한방에(?) 원하는 디자인 에이전시에 입사한 정새롬 님은 학생 때부터 꿈꿔왔던 식품 패키지디자인을 시작했다.
식품 패키지를 디자인하다 새로운 분야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스킨 케어 제품 디자이너로 경로를 바꾸기도 했다. 하지만 다시 식품 패키지 디자이너로 복귀, CJ제일제당과 인연을 맺는다. 이곳을 택한 이유는 단순히 식품 패키지 디자인을 할 수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제품 디자인을 100% 내부에서 소화하는 곳이며, 당시 CJ 제일제당 디자인센터에서는 다른 계열사의 제품까지도 디자인할 수 있어 식품 패키지 외에도 폭넓은 디자인을 해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입사를 결심한 것.
예상대로 CJ제일제당에서는 여러 디자인을 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입사 초기에는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라 허둥대기도 했다. 당시에도 9년차 경력직이었지만, CJ제일제당에서는 신입사원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고. 퀄리티 높은 디자인을 빠른 시간 내에 척척 해내는 디자이너들을 보고 그 동의 자신의 우물 안의 개구리였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다. 이런 충격이 그에게 원동력이 됐던 걸까. 그는 브랜드만 봐도 떠오르는 디자이너가 돼야겠다고 결심했다.
한눈에 봐도 풍성한 선물세트 디자인의 비결은?
CJ제일제당의 9년차 디자이너 정새롬 님은 이제 굵직한 사업들을 책임지는 팀의 리더다. 그가 맡고 있는 것 중 하나는 선물세트 디자인. 보통 선물세트는 일년에 두 번, 명절 때 주로 소비하기 때문에 설과 추석 직전에 반짝 일을 하면 될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선물세트는 CJ제일제당내에서 가장 공들이는 것 중 하나로 일년 내내 심혈을 기울이는 막중한 사업이다.
선물세트가 막중한 사업인 이유는 국내 가공식품 선물세트 시장규모가 1.2조원 규모를 자랑하는데다, 2014년부터는 연평균 5%씩 성장하고 있는 시장이기 때문. CJ제일제당에서는 선물세트 TF팀을 따로 구성해 디자이너를 투입하는 것 외에도 선물세트 팀을 따로 운영해 1년 내내 설과 추석 명절 선물세트만 전담하는 조직을 보유하고 있을 정도다. 설, 추석이 연 매출의 60%를 차지하기 때문에 선물세트 디자이너의 어깨가 무거울 수밖에 없다.
선물세트 디자인은 보통 명절 6개월 전부터 시작한다. 수십 종의 선물세트의 콘셉트를 잡고 이를 각 제품에 맞게 개발하는 데만 1개월 남짓 걸리기 때문이다. 선물세트 디자인을 할 때 중점을 두는 것은 바로 풍성함. 이를 위해 트레이는 톤 다운된 컬러를 사용하고, 제품이 돋보일 수 있도록 돌출형을 사용하는 등 세심한 노력을 기울인다. 뿐만 아니라 제품명, 한글과 영문의 비율, 문자 폭, 법정 문안 등의 규제도 꼼꼼히 확인해야 한다.
그렇다면 올 설의 트렌드는? 예상외로 선물세트는 상대적으로 트렌드를 덜 타는 분야다. 스팸처럼 브랜드 아이덴티티가 명확한 제품의 경우에는 트렌드에 따라 룩을 바꾸는 게 소비자들을 혼란스럽게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햇반컵반 남친 세트’나 ‘보약 햇반 세트’처럼 평소 판매하는 일상세트의 경우에는 트렌드를 반영해 만들 수 있지만, 선물세트의 경우에는 CJ만의 아이덴티티를 살리면서 차별화를 주는 것이 포인트다.
메가브랜드는 유행에 따라 자주 바뀌는 게 아니더라도 거스를 수 없는 시대적 흐름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친환경이다. 선물세트를 넣는 쇼핑백은 현재 부직포로 돼 있지만, 이를 점차 종이로 교체하고 있는 중이다. 종이 쇼핑백의 강도, 내구성 때문에 100% 전환은 어려운 실정이지만 점진적으로 종이 쇼핑백으로 교체해 나갈 예정이다.
말이 필요 없는 디자인으로 말하는 디자이너
자신의 손을 거친 모든 제품에 애착이 간다는 정새롬 님. 그 중에서도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바로 ‘백설’이다. 팀장을 맡고 처음 맡은 프로젝트이자 기획 단계부터 참여해 그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기존에는 백설이라는 브랜드만 보고 구매하는 소비자들이 많았지만, 제품의 디자인과 편의성을 중시하는 젊은 세대의 트렌드에 맞게 브랜드 리뉴얼을 단행했다. 이에 따라 기존의 백설 이미지에서 한 톤 밝은 분위기를 더하고, ’Happiness OF BEKSUL’이라는 비쥬얼 콘셉트로 변신을 시도하고 있다.
선물세트, 백설을 비롯해 15년간 지금까지 수많은 브랜드를 디자인한 정새롬 님. 결과만 보면 뚝딱 디자인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의 제품을 디자인하기 위해서는 제품의 역사, 이미지, 소비자, 식품의 신선도, 법적인 규제 등 신경 써야 할 것이 수도 없이 많다. 이렇게 고심 끝에 디자인을 해도 최종적으로 선택을 받지 못해 좌절되는 경우도 있고, 어쩔 수없이 타협해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디자인을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디자인을 했을 때 느끼는 짜릿함과 행복함 때문이다.
특히 본인이 원하는 디자인이 제품에 반영됐을 때의 기쁨은 그가 계속해서 디자인을 할 수밖에 없는 원동력이다. 이런 디자인의 짜릿함(?)을 오래도록 누리기 위해서는 디자이너로서의 감각을 갈고 닦는 것은 필수. 스스로를 트레이닝하기 위해 자기가 원하는 디자인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고민한다. 하지만 식품 패키지와 관련된 규제를 만족시키는 디자인만 하다 보면 자신의 디자인 역량도 그 틀 안에 갇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도 있다고.
이런 갈증을 CJ제일제당에서 매년 11월에 진행하는 ‘미래 디자인 쇼케이스’로 채운다. 1년에 한 번 열리는 행사로 여기에서만큼은 규제나 제약 걱정 없이 본인이 원하는 디자인을 맘껏 펼칠 수 있다. 그렇다고 디자이너의 창작품을 선보이는 자리라고 생각하면 오산. 설득력 있는 디자인이 곧 좋은 디자인으로 평가 받는 자리다. 실제로 ‘매일 햇반 케이스’도 미래디자인 쇼케이스에서 탄생한 제품이라고.
현실적인 제약과 본인이 하고 싶은 디자인 사이의 균형을 맞추며 디자이너로서의 감을 날카롭게 유지하고 있는 정새롬 님. 15년차 디자이너로서, 그가 생각하는 좋은 디자인이란 무엇일까? 그는 말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설득력 있는 디자인이라고 답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디자인을 하는 게 개인적인 목표라고. 더불어 올해도 백설의 새로운 모습을 위해, 팀장으로서, 디자이너로서 열심히 한 해를 보낼 것이라며 앞으로의 계획을 덧붙였다.
설명을 덧붙였을 때 더 설득력을 얻는 디자인도 있지만,
정말 좋은 디자인에는 설명이 필요 없다고 생각해요.
보기만 해도 공감이 가는, 그런 디자인을 하고 싶습니다
평소 아무렇지 않게 보고 넘겼던 식품 패키지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다니. 명절때마다 골랐던 선물세트가 올해는 조금 달라 보일지도 모르겠다. 선물세트를 담는 쇼핑백부터 패키지의 컬러, 폰트, 트레이까지 선물을 열어보는 순간순간마다 디자이너의 노고가 녹아있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 앞으로는 백설의 패키지를 보며 ‘Happiness of BEKSUL’을 먼저 떠올리게 될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