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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콘텐츠 시장엔 보이지 않는 장벽이 있었다. 영화와 드라마가 ‘주류문화’라면, 애니메이션/만화(웹툰)/게임 등은 그 경계선 밖에 존재했다. 그리고 한데 묶여 ‘비쥬류문화’ 또는 ‘하위문화’란 뜻을 가진 ‘서브컬처(Subculture)’라 불렸다. 주류문화의 간극은 꽤 컸다. 영화와 드라마 얘기는 가족 또는 지인과 쉽게 할 수 있지만, 서브컬처에 해당하는 장르 얘기를 꺼내려면 약간의 용기가 필요했다. 어린이들의 전유물 또는 ‘덕후’로 불리는 일부 마니아만의 특정 문화로만 여겨졌기 때문이다. 김희경|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이자 영화평론가, 한국영화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중문화 산업 관련 칼럼을 연재 중이다. 그런데 최근, 이 장벽이 빠르게 허물어지고 있다. 다수의 사람이 다양한 문화를 즐기는 분위기가 형성되며, 콘텐츠 시장에서 하나의 거대한 축을 이루게 됐다. 국내외 주요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는 애니메이션/만화(웹툰)/게임 등을 대폭 확대하고 있다. 해당 장르의 지식재산권(IP)을 활용해 오히려 영화와 드라마 등으로 재탄생 시키는 사례도 늘어나고 있다. 서브컬처가 일부 주류문화 영역을 주도하고 이끌어가는 역전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나아가 서브컬처가 미래 콘텐츠 시장을 열어젖힐 새로운 열쇠가 될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달라서 더욱 빛날 한일 애니메이션 협업 CJ ENM의 애니메이션 대표작 메인 포스터 서브컬처 가운데서도 애니메이션 시장의 변화는 다소 더딘 편이었다. 하지만 늦은 만큼 변화는 빠르고 다채롭게 나타나고 있다. CJ ENM의 애니메이션 전문 채널 ‘투니버스’의 대표작 <신비아파트>는 이를 잘 보여준다. 2016년 방영된 국내 최초 호러 애니메이션인 <신비아파트>는 큰 인기를 얻으며 2005년 투니버스 개국 이래 최고 시청률을 달성했다. 덕분에 TV 시리즈를 시작으로 극장판 콘텐츠, 뮤지컬 등으로 확정됐으며, 2,200여 종에 달하는 관련 상품이 개발됐다. 이런 가능성을 발판으로 삼아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작업도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CJ ENM은 지난해 10월, 일본 최대 애니메이션 기업 ‘토에이 애니메이션’과 애니메이션 공동 제작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은 1956년 설립된 세계 최대 규모의 애니메이션 스튜디오다. 우리가 익히 알고 즐겨봤던 수많은 명작이 이곳에서 탄생했다. ▲ 토에이 애니메이션 대표작으로는 프리큐어, 은하철도999, 디지몬 어드벤처, 엉덩이 탐정(좌상단부터 시계방향순)이 있다(출처: ①프리큐어: ©2022 Delicious Party Pretty Cure the Movie Production Committee, ②은하철도 999: 銀河鉄道999:©Leiji Matsumoto, Toei Animation, ③디지몬 어드벤처: デジモンゴーストゲーム:©Akiyoshi Hongo, Toei Animation, ④엉덩이 탐정: ⒸTroll/POPLAR, 2022 “Butt Detective the Movie” Production Committee) <은하철도 999>, <드래곤볼>, <원피스>, <프리큐어>, <슬램덩크>, <미소녀 전사 세일러문>, <엉덩이 탐정> 등이 대표적이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이 제작한 작품의 양 자체도 압도적이다. 지금까지 총 255편의 극장판 애니메이션, 1만 3,100화에 달하는 시리즈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대표작들을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듯, 애니메이션 분야에선 오랜 시간 일본이 앞서 있었다. 미국, 유럽 시장의 관점에서 본다면, 한국 콘텐츠 기업과 일본의 애니메이션 제작 협업의 정확한 의미를 당장 파악하기 힘들 수 있다. 양국이 지리적으로 가까운 만큼 콘텐츠도 비슷한 특성을 가졌다고 여길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이 프로젝트로 훗날 탄생하게 될 결과물은 예상을 뛰어넘는 작품일 수 있다. 양국의 콘텐츠 특성과 제작 방식 등이 크게 다르기 때문에 협업을 통해 이전엔 볼 수 없던 새로운 작품이 탄생할 수 있는 것이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와시오 타카시 총괄 프로듀서도 그 차이에 주목했다. 그는 10월 열린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 콘텐츠&필름마켓’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 콘텐츠는 스토리와 세계관으로 전 세계를 놀라게 하지만, 일본 콘텐츠는 아마추어인 주인공이 점점 성장하는 과정에 시청자들이 몰입하게 한다는 차이점이 있다. 두 나라의 특징을 융합하면 지금까지 없던 재미난 콘텐츠가 선보여질 것이다.” 캐릭터가 마음껏 활개를 펼칠 수 있는 새로운 세계를 만들어내는 한국 작품, 캐릭터가 우여곡절을 거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과정에 집중하는 일본 작품. 그의 말대로 양국 작품이 가진 특성과 가장 중점적으로 다뤄온 부분이 달랐던 만큼, 이를 잘 조합한다면 막강한 시너지를 수 있다. ‘2022 부산국제영화제 아시아콘텐츠&필름 마켓(ACFM)’ 컨퍼런스 현장 작품뿐만이 아니라, 이를 기획하고 만드는 사람과 그들로 구성된 스튜디오의 장점 또한 다르다. 이종민 CJ ENM IP 개발센터장은 “한국은 유연한 인력 운영과 빠른 의사 결정을 바탕으로 많은 사람이 공감할 만한 트렌디한 IP를 기획하고, 결과를 창출해 글로벌 시장에서 인정받는 콘텐츠를 제작한다. 일본은 시작부터 끝까지 견고함을 잃지 않는 최고의 결과물을 도출할 수 있는 장인 문화가 특징이다.”라고 설명했다. 이 얘기처럼 한국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에 우뚝 설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트렌드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앞서 나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쩌면 내실을 다져야 할 시간은 제대로 갖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견고하게 쌓아가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일본 스튜디오와의 협업은 콘텐츠 제작의 기본과 본질을 다시 떠올릴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 기대된다. 풍요로운 수확의 계절을 기다리며 이제 콘텐츠 시장에서 더욱 값지고 소중한 수확을 기대할 수 있을 것 같다. 와시오 총괄 프로듀서는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씨앗을 뿌리며 수확도 함께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라고 말했다. 이미 그 작업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양사는 이런 장점들을 결합해 콘텐츠 개발에 착수했다. ‘CJ ENM 스튜디오스’ 소속 레이블 ‘JK 필름’과 ‘블라드스튜디오’는 ‘토에이 애니메이션’과 다양한 협업을 진행하고 있다. ‘JK 필름’은 ‘토에이 애니메이션의 IP를 확장하는 트랜스미디어(transmedia) 작업을 위해 소설가, 교수 등 다양한 분야 연구자들의 도움을 받아 세계관 형성 작업을 하고 있으며, ‘블라드스튜디오’는 ‘토에이 애니메이션’과 공동 개발 중인 IP 3개를 공개했다. 서브컬처는 중세의 가을과 닮았다. 네덜란드 역사가 요한 하위징아는 저서 『중세의 가을』을 통해 중세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제시했다. 많은 사람들이 중세를 문화 암흑기로 치부하거나, 르네상스로 가기 직전의 과도기적 시기 정도로만 생각한다. 하지만 하위징아에 따르면, 중세 말기(1250~1450년)에는 오히려 다채롭고 독자적인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르네상스와는 구분되는 폭발적인 상승의 기운을 갖고 발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저 르네상스의 그림자에 가려져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을 뿐이다. 이젠 좋은 IP의 진가가 중세의 가을처럼 점차 드러나고 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뿌려온, 앞으로 뿌려갈 씨앗의 결과물들을 고스란히 거둬들이게 될 것이다. 훌륭한 원작을 다양한 형태의 콘텐츠로 확장하는 트랜스미디어의 대표적 성공 사례를 한일 양국의 미디어 대표 기업이 함께 그려내는 풍요로운 수확의 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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