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말이 되면 항상 수많은 트렌드 전망이 쏟아져 나온다. 그런데 때론 이조차도 무의미하게 느껴진다. 미래를 확신하는 일도, 심지어 예측하는 일도 갈수록 힘들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속도를 따라갈 수 없을 만큼 시시각각 변하는 콘텐츠 시장에선 더욱 그렇다.
어느 한 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거대한 흐름의 물결. 그 가운데서 살아남기 위해선 미래의 길잡이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그리고 다행히 우리의 곁엔 길을 잃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인물들이 있다.
CJ ENM이 지난 24일 발표한 ‘2021 비저너리(Visionary)’는 그 등불이 되어 주는 인물들을 꼽은 것이다. 올해의 비저너리로는 윤여정, 황동혁, 유재석, 최정남PD, 방탄소년단, 에스파 등 6인이 선정됐다. 이들은 막강한 파급력으로 콘텐츠 산업의 대대적인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낸 동시에 앞으로 산업의 미래를 가늠하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올해 선정된 비저너리들로부턴 하나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시장에 존재하던 모든 경계들이 빠르게 해체되고 있는 현상을 잘 보여준다는 점이다. 특히 견고하던 주류·비주류의 경계가 다양한 방식으로 허물어지는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김희경|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이자 영화평론가, 한국영화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중문화 산업 관련 칼럼을 연재 중이다.
새로운, 그러나 모두가 공감할 수 있는 콘텐츠
CJ ENM은 이를 ‘탈영토주의’ ‘초예능시대’ ‘공존을 위한 공감’이란 세가지 키워드로 정리했다. 탈영토주의는 시·공간, 현실과 가상의 경계가 사라지고 콘텐츠가 무한대로 확장하는 것을 의미한다. 초예능시대는 기존 흥행 공식을 벗어나고 플랫폼의 한계를 뛰어넘어, 다양한 미디어에서 참신한 예능을 만들어 내는 현상을 뜻한다. 공존을 위한 공감은 팬데믹 시대에 많은 장벽을 뛰어넘어 다양성, 환경 등 새로운 ‘같이’의 가치를 실현하는 흐름이다.
그 신호탄은 지난 4월 미국에서 울려 퍼졌다. 배우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로 오스카의 영광을 차지한 것이다. 윤여정은 국내 콘텐츠 시장에서도 오랜 시간 주류에 속하지 못했다. 하지만 차근히 내공을 쌓고 다양한 색깔의 연기를 펼쳐 보이며, 마침내 한국은 물론 세계 영화 시장의 중심에 섰다. ‘여성 배우는 연기 수명이 짧다’는 편견도 깨부수며 많은 후배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빌보드 뮤직 어워즈 4관왕, 아시아 가수 최초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AMA)에서 ‘올해의 아티스트상’을 받은 방탄소년단 역시 끊임없는 노력으로 글로벌 시장을 개척한 대표적인 아티스트다. 이들의 글로벌 영향력은 갈수록 높아져 전 세계 팬들에게 큰 울림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한국의 아티스트가 해외에 소개되는 것은 곧 우리의 문화가 녹아든 삶 자체가 해외로 간다는 것. 뛰어난 실력, 멋진 아우라를 가진 우리의 아티스트들이 해외를 누비며 활발히 활동하는 사실 자체가 한국의 문화를 전파하고 위상을 드높이는 일인 셈이다.
아티스트 개인뿐 아니라 드라마도 국경과 인종의 경계를 빠르게 허물고 있다. 지난 9월 공개된 황동혁 감독의 시리즈물 ‘오징어 게임’은 한국 국민들에게 믿기 힘든 놀라운 광경을 선사했다. 전 세계에서 초록색 체육복을 입고 달고나를 만드는 모습이었다. 한국 배우가 출연하고 한국어로 된 긴 호흡의 드라마에 국가와 인종을 불문하고 이토록 열광적인 반응이 쏟아진 것은 다소 낯설면서도 신기한 일이다. 지난해 봉준호 감독이 “자막의 장벽, 그 1인치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훨씬 더 많은 작품을 즐길 수 있다”라고 했던 말이 마치 까마득한 옛날 이야기처럼 느껴질 정도다.
플랫폼과 시공간을 뛰어넘는 비주류의 주인공
플랫폼에도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가 빠르게 사라지며 초예능시대가 열리고 있다. 첨단기술이 급속히 발전하면서 방송 등 전통 미디어 이외에 유튜브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등 새로운 플랫폼이 만들어졌으며, 그에 맞춰 예능의 형태도 다변화 되고 있는 것이다. 솔직하고 유연한 방식으로 진행된 ‘환승연애’가 국내 OTT 티빙에서 많은 화제가 되고, 방송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개그맨들이 유튜브 예능 최전선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은 이를 잘 보여준다.
플랫폼 간의 경계가 허물어지며, 방송 안에서 존재하던 주류와 비주류의 벽도 사라지고 있다. 이번 비저너리 선정에도 이 같은 흐름이 적극 반영됐다. 최정남PD가 연출한 Mnet의 ‘스트릿 우먼 파이터’는 K팝에 가려져 있던 여성 댄서들을 통해 올 하반기 전국에 K댄스 열풍을 일으켰다.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록’도 일반인 출연자들을 주인공들을 전면에 내세워 국민 대표 예능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프로그램의 진행을 맡은 유재석은 이들의 깊은 이야기를 매끄럽게 이끌어내 호평을 받고 있다.
스크립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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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져 와아 마 여 이 좌 아
그리고 종국에 이 모든 경계가 해체되고 새로운 질서가 재편되는 가상현실도 펼쳐지고 있다.
아이돌 그룹 에스파는 가상현실 속 아바타에 기반한 독특한 세계관을 바탕으로 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룹의 정체성과 노래에도 이 세계관이 반영돼 팬들을 새로운 세계로 안내한다. 앞으로 이런 현상은 메타버스·NFT(대체불가토큰) 등과 결합돼 더욱 파격적이고 참신한 실험으로 이어질 전망이다.
‘불확실한 미래’에서 ‘어렴풋한 미래’로
이같이 최근 나타난 다양한 현상들은 세계 패권의 이동과 사회 구조의 변화와도 맞물려 있다. 새로운 미디어들이 생겨나며 미국 중심의 콘텐츠 패권이 세계 곳곳으로 옮겨가고 있는 상황에서 탄탄한 실력을 키워온 K콘텐츠가 급속도로 부상하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비주류 아티스트로 영향력이 분산되고 있는 것 또한 지상파 등 기존 주류 매체를 중심으로 힘이 집중되고 커지던 ‘구심력’이 약해지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젠 중심에서 바깥으로 힘이 뻗어가는 ‘원심력’ 사회로 바뀌면서 더 이상 영원한 기득권과 주류는 찾아보기 힘들어졌다.
이는 분명 한국 콘텐츠 산업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누구나 주인공이 되고, 어떤 작품으로든 시장의 중심에 설 수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반갑고 기쁜 마음과 함께, 약간의 불안함도 느껴진다. 경이롭고 신기한 이 일들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하는 노파심이다.
하지만 그럴 때일수록 끊임없이 새로운 콘텐츠와 가치를 만들어내는 비저너리들을 떠올려 보는 건 어떨까. 이들과 함께 거대한 변화의 물결 속에 풍덩 뛰어든다면 미래의 모습도 조금은 달라질 것 같다. ‘불확실한 미래’가 아닌, 희미하지만 뭔가가 보이는 ‘어렴풋한 미래’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