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의 무게를 재어볼 수 있을까. 그렇다면 이전과 확연히 달라졌을 것 같다. 과거 콘텐츠들은 꽤나 묵직했다. 물론 그 무게감만큼 작품에서 뿜어 나오는 아우라도 막강했다. 하지만 박제된 채 박물관에 전시된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고유성’이라는 틀이 오히려 ‘생동감’을 해치는 하나의 굴레가 된 것만 같았다. 예외가 있다면 다양한 스토리에 영감을 제공한 영화 ‘스타워즈’ 시리즈 정도였을까.
최근엔 다른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원작은 더 이상 갇혀 있지 않다. 여러 형태로 모습을 바꾸며 수많은 파생 콘텐츠로 변신하고 있다. 이 작품들의 무게는 확실히 가볍다. 언제 어느 플랫폼으로든 무대를 옮겨 다닌다. 이 가벼움은 아우라를 훼손하기보다, 새로운 재미를 던져준다. 곳곳에서 살아 숨쉬며 시청자들의 일상에 깊숙이 파고들고 있다.
김희경|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이자 영화평론가, 한국영화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중문화 산업 관련 칼럼을 연재 중이다.
나영석 PD의 스핀오프, 코어 IP의 중요성!
그 줄기는 갈수록 다양하고 길게 뻗어나가고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나영석 PD의 세계관이 담긴 작품들이 대표적이다. tvN 인기 예능 ‘신서유기’로부터 ‘스핀오프(spin-off)’ 프로그램인 ‘신서유기 외전 : 삼시세끼 – 아이슬란드 간 세끼’가 2019년 탄생했다. 이 작품은 CJ ENM 최초로 TV 채널 편성과 온라인에 동시 공개되며 많은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최근엔 더 많은 스핀오프가 만들어지고 있다. ‘라끼남’, ‘삼시네세끼’, ‘나홀로 이식당’, 그리고 지난 3월부터 방영되고 있는 ‘출장 십오야’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오는 5월엔 ‘신서유기’의 스페셜 프로그램 ‘스프링 캠프’가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티빙에서 오리지널 콘텐츠로 방영된다.
스핀오프 작품들의 파급력은 생각보다 크다. 많은 사람들이 일부러 찾아서 보기도 하고, 몰아보기도 한다. 이쯤 되니 탄탄한 세계관 위에 만들어진 ‘코어 IP(핵심 IP)’가 신기한 마술봉처럼 느껴진다.
IT, 스토리, 팬덤의 유기적 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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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텐츠가 가벼움을 타고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었던 것은 다양한 요인의 결합 덕분이다. 가장 큰 요인은 첨단기술(IT)의 발전이다. 한국은 IT 강국답게 수많은 것들을 온라인 세상에서 만들어냈다. 콘텐츠 시장의 대격변도 이곳에서 이뤄졌다. 많은 사람들이 온라인에서 다양한 콘텐츠를 유통시켰다. 소재와 분량의 제한 없이 불특정 다수에게 콘텐츠를 무한 제공할 수 있어, 기존 방송의 한계점을 보완하는 역할을 했다. 방송 프로그램의 ‘리스타일(restyle)’도 온라인을 통해 이뤄졌다. 과거 방송들을 재편집해 올리기도 했고, 방송에선 미처 다 담지 못한 이야기들을 온라인 콘텐츠로 만들기도 했다.
한번 물꼬가 트이자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방송과 온라인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기점으로, 사람들은 모든 경계가 무색하다는 것을 인지하게 됐다. tvN 드라마 ‘방법’은 장르, 플랫폼, 국경의 경계를 모조리 뛰어넘는다. 이 작품은 영화 ‘방법: 재차의’로 재탄생한다. 일본 후지TV의 OTT 플랫폼인 FOD에도 독점 제공된다.
IT 기술 발전이 이뤄졌다 하더라도, 스토리가 뒷받침 되지 않았다면 경계를 허무는 일은 애초에 불가능했을 것이다. 콘텐츠가 파생되려면 탄탄한 스토리를 갖춰야 한다. 우리는 오랜 시간 미국, 영국 등 콘텐츠 강국의 작품들을 들여오며, 스토리의 부재를 아쉬워했다. ‘왜 우리에겐 해리포터가 없는가’라며 탄식하기도 했다. 하지만 최근엔 한국만의 새로운 스토리노믹스를 만들어내고 있다.
그 기저엔 이야기를 좋아하는 민족적 특성, 빠른 습득력과 융합 능력이 큰 도움이 됐다. 해외 콘텐츠들을 보며 적극적으로 배우고, 유연하게 접목했다. 이 과정에서 스토리의 확장이 이뤄졌다. 차별화된 세계관, 독특한 캐릭터를 만들면 스토리가 무궁무진하게 뻗어나갈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처음부터 콘텐츠를 만들 때 2차 가공물 제작을 함께 고려하게 됐다. 코어 IP는 이 같은 스토리의 확장을 위한 고민으로부터 탄생하게 됐다.
매일 반갑고, 매일 기대되는 콘텐츠
스토리의 발전은 강력한 팬덤도 만들어 냈다. 스핀오프의 원동력은 원작에 대한 팬덤이다. 국내에선 팬덤이라고 해도 아이돌과 일부 드라마에 한정돼 있었다. 최근엔 예능과 웹툰 등 각 장르별로 팬덤이 형성되고 있다. tvN 예능 ‘신서유기’ 시리즈, ‘대탈출’ 시리즈 등은 열성적인 마니아 팬들을 확보했으며, 이들의 호응으로 여러 시즌에 걸쳐 제작됐다. 스핀오프 작품들도 다수 만들어지며 팬덤의 규모는 갈수록 확대되고 있다.
웹툰을 기반으로 많은 드라마와 영화가 나오는 것도 웹툰 원작에 대한 팬덤의 영향이 크다. 이후 드라마와 영화가 성공하면 다시 웹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는 등 팬덤의 선순환 구조도 형성됐다. 팬덤이 온라인에서 하나의 놀이 문화로 자리잡고 있는 것도 긍정적으로 해석된다. 네티즌들은 화제의 작품이나 영상에 재치있는 댓글들을 달며, 콘텐츠를 널리 확산시키고 있다. 이를 통해 이들은 콘텐츠를 최종 완성하는 새로운 주체로 거듭나고 있다.
과거엔 아무리 성공작이라 해도, 시간이 흐르면 기억 속 한켠으로 밀려나기 마련이었다. 이젠 다르다. 조금씩 형태를 달리하여 오늘도, 내일도 시청자들의 눈앞에 존재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를 보며 강렬하고도 지속적인 중독에 빠져들고 있다. 이 중독이 매일 반갑고, 매일 기대된다.
『지난 시리즈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