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크로소프트의 창업주 빌 게이츠는 1994년 노트 하나를 얻기 위해 3000만 달러(약 350억원)에 달하는 거액을 지불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1506~1510년 작성했던 72페이지짜리 노트를 낙찰받은 것이다.
이 노트엔 천문학, 지질학, 수학 등에 대한 다양한 글과 360여 개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노트 속 내용을 상상해 보는 것만으로,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 같다. 하지만 그가 노트에 남긴 질문들은 생각보다 꽤 간단하고 명쾌하다. 그러면서도 과학적인 동시에 매우 예술적이다. ‘하늘은 왜 파란가?’ ‘무엇이 달을 빛나게 하는가?’
이질적인 과학적·예술적 사고를 함께 하며 이를 연결하는 힘. 이것이야말로 다빈치가 하늘을 나는 기계, 대포, 장갑차부터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 등 명화를 탄생시킨 비결이었다. 빌 게이츠는 그런 다빈치의 생각을 통째로 사서 배우려 했다.
바야흐로 21세기에 500여년 전 세상을 떠난 다빈치의 얘기를 꺼내든 것이 고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21세기형 인재’를 얘기할 때마다 가장 먼저 언급된다. 그 이유는 다빈치의 융합적 사고가 어느 때보다 절실해졌고, 또 그만큼 활발해졌기 때문이 아닐까.
김희경|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이자 영화평론가, 한국영화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중문화 산업 관련 칼럼을 연재 중이다.
성큼 다가온 ‘레디 플레이어 원’ 세상
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이제 이 경계를 무너뜨리지 않으면 생존도, 성장도 어렵게 됐다. 그리하여 각 업계에선 이질적인 영역을 연결하며 무한한 팽창을 시도하고 있다. 그 총성은 이미 제조업, 정보통신(IT) 분야에서 울려 퍼졌었다. 스티브 잡스가 혁신적인 제품들을 내놓으며 “애플을 애플답게 하는 것은 인문학과 기술의 결합”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최근엔 그 범위가 더욱 넓어지고 있다. 제품을 개발하는 곳뿐만 아니라 무형의 가치를 실현하는 콘텐츠 산업에서도 연결과 융합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콘텐츠 업계에선 특히 코로나19 확산을 기점으로 기술과 콘텐츠의 결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고 있다. 이전에도 분명 제작을 도와줄 첨단 기술이 존재했으며, 활용돼 왔다. 하지만 기술과 콘텐츠가 유기적으로, 아주 밀접하게 결합됐다고 보기엔 어려웠다. 그러다 발생한 코로나19는 전 세계 사람들의 연결이 어려운 극단적인 상황을 만들었고, 콘텐츠 업계는 이 산을 넘어 빠르고 효율적으로 콘텐츠를 전파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덕분에 멀게만 느껴졌던 ‘레디 플레이어 원’ 세상은 가까운 미래로 성큼 다가왔다. 2018년 개봉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레디 플레이어 원’은 당시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했다. 영화에서 사람들은 각각의 아바타로 가상 세계에 접속해 게임도 하고 경제 활동도 한다. 관객들은 이를 재밌게 느끼면서도 아득한 미래로만 여겼다. 하지만 이젠 그렇지 않다. 그 세상이 사람들의 눈 앞에 하나 둘씩 펼쳐지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지난해 9월 방탄소년단은 미국 게임 ‘포트나이트’에서 ‘다이너마이트’의 안무 버전 뮤직비디오를 처음 공개했다. 국내외 많은 팬들이 각자의 아바타로 접속해 뮤직비디오를 보고 함께 춤을 췄다. 이뿐 아니라 일상에서도 메타버스 세상이 펼쳐지고 있다. 많은 10~20대들이 네이버 제페토 등 메타버스 플랫폼에서 아바타로 게임도 하고 아이돌 그룹의 팬미팅에도 참여한다.
시공간·산업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CJ ENM
국내 대표 콘텐츠 기업 CJ ENM은 다양한 시도를 통해 이 같은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Mnet에서 진행된 ‘다시 한번’ 프로젝트에선 고(故) 터틀맨의 모습을 복원해 12년만에 그룹 ‘거북이’를 완전체로 선보였다. 마찬가지로 고(故) 김현식의 모습도 복원해 깊은 감동을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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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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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세상이 멈췄어
아무런 예고도 하나 없이
봄은 기다림을 몰라서
눈치 없이 와버렸어
발자국이 지워진 거리
여기 넘어져있는 나
혼자 가네 시간이
미안해 말도 없이
오늘도 비가 내릴 것 같아
흠뻑 젖어버렸네
아직도 멈추질 않아
저 먹구름보다 빨리 달려가
그럼 될 줄 알았는데
나 겨우 사람인가 봐
몹시 아프네
세상이란 놈이 준 감기
덕분에 눌러보는 먼지 쌓인 되감기
넘어진 채 청하는 엇박자의 춤
겨울이 오면 내쉬자
더 뜨거운 숨
끝이 보이지 않아
출구가 있긴 할까…
최첨단 기술을 적극 도입해 전 세계 관객들을 깜짝 놀라게 하기도 했다. 지난해 12월 글로벌 음악 시상식 ‘MAMA(Mnet Asian Music Awards)’에서 진행된 방탄소년단 공연이 대표적이다. 공연 도중 어깨 수술로 불참한 멤버 슈가가 갑자기 무대 위로 걸어 나와 많은 팬들이 환호했다. 실사에 입체 영상을 입히는 ‘볼류메트릭 (Volumetric)’ 기술을 접목해 놀라움과 감동을 함께 선사한 것이다.
CJ ENM은 최근 기업과 기업, 산업간의 경계를 뛰어넘는 과감한 시도도 하고 있다. CJ ENM은 삼성전자와 파트너십을 체결하고 버추얼 스튜디오를 구축하기로 했다. 경기도 파주에 국내 최대 규모 21만2883㎡(축구장 32개)로 설립될 이 스튜디오에선 새로운 차원의 콘텐츠 제작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스튜디오엔 삼성전자의 최신 마이크로 LED 기술을 적용한 ‘더 월’ 제품이 세계 최초로 탑재된다. CJ ENM은 이 기술을 활용해 다양한 콘텐츠 실험을 진행할 예정이다.
우선 최첨단 LED 월을 활용하면 설치 및 철거를 반복해야 하는 물리적 세트가 필요없게 된다. 이를 통해 세트 제작과 로케이션 촬영에 들던 막대한 비용을 절감할 수 있다.
시청자들은 한층 깊이 있고 실감 나는 연기를 감상할 수 있게 된다. 그동안 컴퓨터그래픽(CG) 등이 들어가는 장면에서 배우들은 초록색 배경만을 쳐다본 채 감정 연기와 액션을 해야 했다. 그런데 이젠 배우의 눈 앞에 실제와 같은 세상이 그대로 구현된다.
시청자들은 보다 직접적인 감동도 느낄 수 있다. 스튜디오에선 다양한 가상현실 기술을 접목한 메타버스 세상, XR공연 등이 펼쳐질 예정이다. 그렇게 되면, 시청자들은 콘텐츠 속에 들어가 새로운 세계와 마주하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캐릭터들과 함께 살아 숨 쉬는 느낌도 받게 된다.
“인문과 기술의 융합은 결코 윤리적 요청이 아니다. 생산성의 문제다.” <테크노인문학>의 저자 이진우 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다빈치가 그린 ‘모나리자’의 미소가 영원히 빛날 수 있었던 건 입술을 오므릴 때의 입 근육, 입꼬리를 올릴 때의 입 근육 등을 하나하나 연구한 덕분이다. 생산성과 효율성이란, 결국 그 과학적 연구에 예술적 붓질이 더해지며 극대화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앞으로 마주할 콘텐츠 세상도 마찬가지다. 정교한 첨단 기술 위에 펼쳐질 무한한 상상력과 스토리텔링. 모나리자의 영원한 미소 같은 콘텐츠가 곧 탄생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