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2월 31일이 되면 일본 공영방송 NHK에선 일본 최대 규모의 음악 방송 ‘홍백가합전’이 열린다. 72년 전통을 가진 이 프로그램엔 일본에서 최고의 인기를 얻은 아티스트만이 출연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방송 전 발표되는 출연자 명단엔 많은 관심이 쏠린다.
특히 올해 발표된 명단은 큰 화제가 되고 있다. K팝 아티스트 6팀의 출연이 결정됐기 때문이다. 역대 최다 규모의 출연이다. 보이그룹으로는 CJ ENM과 일본 요시모토 흥업의 합작법인 소속인 JO1을 포함해 세븐틴, 스트레이키즈가 명단에 올랐다. 걸그룹으로는 르세라핌과 미사모(트와이스 유닛), 니쥬가 참여한다.
이뿐만 아니다. K팝 역사상 더 놀라운 일이 벌어져, 일본 열도를 뒤흔들고 있다. 24년 역사를 자랑하는 세계 최대 K팝 시상식 ‘MAMA AWARDS’가 국내 시상식 가운데 최초로 도쿄돔에서 개최된 것이다. 도쿄돔은 일본 최대 규모의 실내 공연장으로, 많은 아티스트에게 ‘꿈의 무대’로 불린다. 지난 28~29일 양일간 이곳에서 열린 MAMA엔 총 8만 명에 달하는 관객이 몰렸다.
일본에서 새로운 한류 열풍이 거세게 불고 있다. ‘4차 한류’라 불리는 이 현상은 K팝을 중심으로 드라마, 음식, 패션 등 전방위적으로 일어나고 있다. 특히 K팝은 폭발적인 반응을 얻으며, 이전과는 한 차원 높은 단계로 접어들었다. K팝 아티스트들은 일본 인기 프로그램에 대거 출연하고, 국내 대표 시상식 MAMA는 일본 대표 공연장에 화려하게 입성했다. 이젠 한국이 명실상부하게 아시아 문화 패권을 거머쥐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김희경|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이자 영화평론가, 한국영화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중문화 산업 관련 칼럼을 연재 중이다.
펄떡이는 역동성, 확장성을 갖춘 K팝
25년에 걸쳐 일본에서 일어난 한류의 중심엔 늘 K팝이 있었다. 1998년부터 시작된 1차 한류는 드라마 <겨울연가>뿐 아니라 H.O.T 등 K팝 1세대 아이돌을 중심으로 확산됐다. 2차 한류는 2010년대 초반 동방신기와 카라 등이, 3차 한류는 2017년부터 방탄소년단(BTS) 등이 큰 사랑을 받으며 일어났다. 2020년부터 시작된 4차 한류에선 스트레이키즈, 아이브, 르세라핌 등 4세대 아이돌 다수가 많은 인기를 얻었다. 이에 따라 K팝 팬덤의 규모 자체가 달라졌으며, 덩달아 4차 한류의 파급효과도 막강해졌다.
그 위상은 숫자로도 확인할 수 있다. 올해 K팝 음반 누적 수출액은 3000억 원을 돌파, 역대 최고치를 경신했다. 관세청 수출입 무역통계에 따르면 올해 1~10월 음반 수출액은 2억 4381만 달러(약 3183억 원)에 달했다. 그리고 그중 수출국 1위는 일본으로 나타났다.
일본 내 K팝의 폭발적인 인기 비결은 여러 요인과 맞물려 있다. K팝은 그동안 체계화된 시스템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글로벌 진출을 꾸준히 시도해 왔다. 자국 시장에 안주하는 경향이 강했던 J팝과 달리, K팝은 어렵더라도 처음부터 글로벌 시장을 목표로 삼고 지속적으로 문을 두드려 왔다.
그 펄떡이는 역동성과 확장성으로 K팝은 미국, 유럽 등을 사로잡은 것은 물론 혐한 분위기가 강하게 흐르던 일본 시장에까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여기에 굳건했던 성별‧세대별 장벽까지 무너지며, K팝 팬덤의 규모가 이전에 비해 훨씬 커졌다. 팬데믹 기간 동안 부모와 자녀가 함께 집에서 TV, 유튜브 등을 통해 K팝을 즐기는 문화가 확산된 덕분이다.
K팝 확산의 또 다른 주역, MAMA
K팝 확산엔 또 다른 숨은 주역이 자리하고 있다. 지난 9월 요미우리 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일본 문화청은 K팝 열풍에 자극을 받아 새로운 글로벌 시상식 창설을 검토하고 있다. 일본 정부가 J팝 확산을 위해 시상식을 만드는 것에서 짐작할 수 있듯, 뛰어난 수준의 글로벌 시상식은 해당 국가의 음악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다. 마찬가지로 K팝 확산엔 MAMA의 기여도가 컸다.
MAMA는 1999년 ‘Mnet 영상 음악 대상’으로 출발했다. 이때부터 지상파의 연말 음악 방송과 달리 베스트 뮤직비디오, 록 밴드, 힙합 부문 등에 대한 시상을 진행해 많은 화제가 됐다. 2009년엔 ‘MAMA (Mnet ASIAN MUSIC AWARDS)’로 새롭게 탈바꿈하며 아시아로 무대를 확장했다. 한국 주최 시상식 최초로 글로벌 시장에 진출한 것이다. 변화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지난해엔 ‘Mnet ASIAN MUSIC AWARDS’에서 ‘MAMA AWARDS’로 리브랜딩 하며 영향력을 더욱 키웠다.
전 세계 K팝 팬들을 하나로 ‘연결’하다
MAMA가 오랜 시간에 걸쳐 가장 중점적으로 추진한 것은 ‘연결’이었다. 단순히 연말 시상식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K팝 팬들이 하나가 되어 음악 자체를 즐기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아시아 3개 지역(한국, 일본, 홍콩)에서 동시 개최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왔다.
‘2023 MAMA AWARDS’에선 그동안 축적된 노하우를 총동원해 전 세계 K팝 팬들을 촘촘하게 연결했다. 이번 시상식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세상 단 하나의 존재 ‘나(I)’와 MAMA가 만나 긍정적인 에너지를 통해 완벽한 ‘하나(One)’가 된다는 의미의 ‘ONE I BORN’을 콘셉트로 진행됐다. 이 콘셉트에 걸맞게 도쿄돔 내에 중앙 제어 시스템으로 조율되는 야광봉을 통해 8만 명 관객들은 하나로 연결됐다.
호스트 전소미, 박보검을 포함해 세븐틴, JO1, 엔하이픈, 라이즈, 르세라핌, (여자)아이들, 케플러, 이영지 등 K팝 대표 아티스트들도 총출동해 관객들과 함께 호흡했다. 화려한 불빛, 아티스트들의 열정적인 공연, 관객들의 환호성이 한데 어우러져 무대와 객석의 경계는 순식간에 허물어졌다. 아쉽게 오프라인 무대를 보러 오지 못한 팬들도 하나로 연결됐다. 200개국에 달하는 각 지역의 시청자들은 지역별 채널과 플랫폼 생중계를 통해 MAMA 무대를 시청하고 즐겼다. 그중 30개국에선 트위터 실시간 트렌드 상위권에 오를 정도로 뜨거운 관심을 받았다.
지난 25년 한류보다 더 강력할 앞으로의 25년
앞으로도 일본 내 K팝 열풍은 지속될 수 있을까. K팝은 그 위상을 더욱 공고히 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일본에서 커지고 있는 라이브 공연 시장을 K팝이 가득 채우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이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발표한 ‘23년도 일본 콘텐츠 산업 결산 및 24년도 전망’에 따르면 팬데믹 이후 일본에선 지역경제 활성화 방안의 하나로 대규모 페스티벌 등이 잇달아 열리고 있다. 이에 따라 라이브 공연 시장이 급격히 커지고 있다. 그중 K팝 아티스트들의 비중이 크다. 최근엔 일본 각지에 도쿄돔과 같은 대규모 공연장들까지 만들어지고 있어, K팝 아티스트에게 보다 많은 기회가 주어질 것으로 보인다.
K팝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로도 한류가 크게 확산될 전망이다. 이미 4차 한류는 여러 부문에 걸쳐 진행되고 있다. 올해 일본 OTT 오리지널 콘텐츠 랭킹 1위는 CJ ENM의 자회사 스튜디오드래곤이 제작한 <더 글로리>가 차지했다. CJ제일제당의 경우 지난 5월 도쿄 최대 번화가인 시부야에 ‘비비고 팝업스토어’를 열고 떡볶이와 김밥 등 한국의 분식 제품을 K-스트리트푸드로 소개해 화제가 됐다. 올해 일본에서 첫선을 보인 비비고 냉동 김밥은 지난 7월 말까지 누적 판매량이 60만 개가 넘는다.
다음엔 또 어떤 놀라운 현상이 일어날까? 25년간 꾸준히 일본 열도를 뒤흔들어 온 한류. 앞으로의 25년 동안엔 더욱 강력하고 거센 열풍을 일으키지 않을까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