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찬 기합 소리도, 워밍업도 필요 없다. 단숨에 상대방을 제압하는 빠른 타격 기술과 강렬한 눈빛. 그거 하나면 족하다. 올해로 10년 차인 유미진 스턴트우먼은 말보다 액션으로 자신을 설명한다. 그동안 현장에서 매일 뛰고, 구르고, 깨지면서도 심장 뛰는 이 일이 좋다는 그는 최근 개봉한 <걸캅스>에서도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했다. 액션에는 정답이 없다는 말로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그가 이번엔 어떤 액션을 선보였을까?
스턴트라는 직업, 가슴을 뛰게 하다!
유미진 스턴트우먼은 어렸을 때부터 운동을 좋아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도복에 매료됐다. 부모님을 졸라 태권도, 합기도 체육관을 다녔고, 중학교 때 운동을 업으로 삼아 살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꿈과 현실은 멀었다. 실업계 고등학교 졸업 후 대기업 전자 회사에 취직했다. 3개월쯤 지나서 문득 그는 이 생활이 원하는 삶과 거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곧바로 회사를 그만뒀다. 운동 전공을 위해 대학에 진학한 그는 태권도 사범 생활을 병행하며, 꿈에 다가섰다.
’서울액션스쿨 14기 모집 공고’가 제 인생을 바꿨죠.
2010년 당시, 그에겐 큰 사건이 벌어진다. 바로 ‘서울액션스쿨 14기 모집 공고’. 우연인지 필연인지 몰라도 모집 공고는 그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하고 싶었다. 되고 싶었다. 오디션이 끝난 상황이었음에도 가방 하나 짊어지고 곧장 경기도 파주에 있는 서울액션스쿨로 향했다. 무술감독에게 안 된다는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물러서지 않고 계속 오겠다는 집념을 보였다. 모든 걸 정리했기에 그에겐 서울액션스쿨 밖에 없었던 것. 그의 ‘깡’을 봤는지, 무술감독은 다음주 월요일에 한 번 와보라 했고, 그 말대로 다시 찾아간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건 14기 첫 훈련이었다.
서울액션스쿨 교육 기간은 총 6개월, 오후 1시부터 5시까지 총 4교시로 이뤄진 교육프로그램은 기초체력, 현대 액션, 사극 액션, 리액션 및 기계체조를 배운다. 이중 가장 악명 높은 훈련이 바로 1교시 기초체력. 약 5km 구간을 20분 만에 돌파하는 달리기를 하고 왕복 전력 질주, 쪼그려뛰기, 토끼뜀 등 1시간을 꽉꽉 채운 훈련에 체력 방전은 기본, 이후 이어지는 교육에 임하면서 매번 한계에 부딪혔다. 이를 악물고 버틴 결과 그는 10명의 최종 수료자 중 한 명이 되었다.
교육 3개월차, 그에게 뜻밖의 기회가 왔다. 바로 드라마 대역 출연이었다. 자세한 정보 없이 촬영 현장이었던 명동에 간 그는 그제야 자신이 하지원 대역이었고, 드라마가 <시크릿 가든>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첫 대역 연기였던 그에게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워낙 액션을 잘 소화해내는 하지원이었기에 자신감도 떨어졌다. 하지만 카메라 앞에 서는 날이 많아지면서 시행착오를 줄여갔고,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가장 기억에 남는 추억으로 간직하고 있다.
<걸캅스>, 여성 슈퍼 ‘파워’ 액션을 보여주다!
작년 여름 유미진 스턴트우먼은 여성 버디 무비 <걸캅스>에 참여했다. 허명행 무술감독님의 진두지휘 아래, 그가 맡은 건 주인공 박미영 역의 라미란 대역과 출연 배우들의 액션 교육이었다. 1년에 3~4편 정도 출연 배우들을 교육한다는 그는 영화 <극한직업>도 맡아서 했다고. 이렇듯 교육 담당으로서 그가 이번 영화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중점은 무엇일까?
통쾌한 한 방을 보여줄 수 있다는 여성 파워 액션이었어요.
그가 처음으로 액션을 배우기 위해 이곳을 찾은 배우들을 만날 때 기초체력, 운동 신경, 액션 소화 능력 등 몸 상태를 확인한다. 이후, 극중 캐릭터와 스토리를 파악해 어떤 액션을 구사해야 할지 머리 속에 그린다. 자신이 설계한 스텝에 맞춰 강도를 높인다고.
라미란도 마찬가지였다. 문제는 허리도 좋지 않고, 근력도 떨어지는 라미란의 몸 상태였다. 과연 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먼저 앞섰다고. 하지만 첫 주연작이라는 책임감, 후배들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생각을 바탕으로 한 그의 열정이 온 몸에서 표출되었다. 유미진 스턴트우먼은 숨소리만 들어도 힘들다는 걸 아는데, 단 한 번도 힘들다는 말을 한적이 없다는 라미란의 배우는 자세에 너무 고마웠다. 그리고 하루에 한 동작을 알려주면 그 다음날 완벽하게 소화하는 능력에 반했다.
박미영 캐릭터의 특징은 레슬링선수 출신 형사라는 점이다. 기존 ‘매치기’ 기술이 돋보이는 유도가 아닌 레슬링 기술이 들어가야 하므로 유미진 스턴트우먼은 교육을 위해 레슬링 영상을 참고했다. 실제 선수처럼 낮은 자세를 유지한 채 액션을 하고, ‘드롭킥’과 ‘백드롭’ 기술을 해야 한다는 구상안을 마련한 후 라미란에게 직접 교육했다. 다행히도 이 열정적인 교육생은 스펀지처럼 모든 걸 다 빨아들였다.
열심히 하는 라미란을 위해 직접 액션 파트너를 자처한 유미진 스턴트우먼. 감정을 담은 ‘힘’있는 액션을 구현시키기 위해 극중 대사처럼 ‘욕’을 섞어가면서 액션 연습을 했다. “이 아줌마가 미쳤나~~”하면서 액션을 하니, 라미란은 “내가 니 엄마빨인데~~”하면서 감정이 실린 주먹질이 나왔다. 옳커니 잘됐구나 했고, 서로 대본에 적힌 욕(?)을 하면서 연습의 강도를 높여갔다.
이런 노력의 결과, 극중 중요한 액션 장면인 타투 아지트 장면에서는 대역 없이 라미란 혼자 액션 연기를 펼쳤다. 하와이안 셔츠를 나풀거리며 사이다처럼 ‘뻥’ 뚫릴만한 타격 액션을 보여주는 모습에 교육한 사람으로서 뿌듯함을 느꼈다고.
남을 빛내며 사는 이 일이 좋다!
10년 동안 스턴트우먼으로 활동하면서 그는 셀 수 없이 많은 작품에 출연해왔다. 참여 기여도가 크든 적든 간에 언제나 최선을 다해서 일에 임했다. 하지만 부침이 없었던 건 아니다. 2010년 초반만 하더라도 지금처럼 여성 주연작이 별로 없었다. 드라마 <시크릿 가든> 이후 작품 출연 기회는 좀처럼 오지 않았던 그는 생계를 위해 아르바이트도 병행했다.
이런 상황에서 스턴트우먼으로서 자신만의 강점을 키우는 게 돌파구라 생각한 그는 여타 스턴트우먼보다 키가 작다는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바이크 액션, 와이어 액션 등 고강도 액션 연습에 돌입했다. 그러다 보니 자신만의 강점이 생겼고, 현재는 서울액션스쿨 내 스턴트우먼 중 가장 오랜 경력자다.
그에게 잊지 못할 작품을 묻자,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기 위해 떠올린다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 정말 원 없이 액션을 해봤다는 <악녀>, 그리고 <걸캅스>를 뽑았다. 특히 <걸캅스>는 배우들의 무술 지도를 비롯해 라미란의 대역을 하며 오랫동안 현장에 임했던 작품. 모든 스텝들이 잘 대해줬기에 더 기억에 남고 보람도 크며, 애착이 가는 영화라 소개했다. 더불어 <악녀> <걸캅스>처럼 여성이 직접 액션을 하면서 스토리를 이어나가는 주체가 된 영화들이 많아졌다는 점에서 환영할만한 일이라고 덧붙였다.
스턴트우먼의 역할은 자신이 아닌 남을 빛내는 것에 있다. 배우들의 안전을 지키고, 극의 완성도를 높이기 위한 이들의 노력이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 건 아쉬운 점이다. 과거보다 안전한 현장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만, 목숨을 내놓고 하는 업이기에 항상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야 하는 부담감도 있다. 하지만 그는 두렵지 않다. 남을 빛내며 사는 이 일이 너무 좋다고 여기기 때문. 누군가 알아주지 않아도 자신의 액션을 통해 작품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에 큰 의의를 두고 있는 셈이다. 그런 그가 관객들에게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고.
정말 액션 장면이 좋았다면 엔딩크레딧에서 우리들의 이름을 꼭 확인해주세요.
그러면 더 힘이 날 것 같아요.
유미진 스턴트우먼의 꿈은 자신의 롤모델인 허명행 무술감독처럼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무술감독이 되는 것이다. 올해 개봉한 <돈>과 현재 참여 중인 tvN 드라마 <아스달 연대기>에서 무술팀장을 맡는 등 그는 무술감독으로서의 새로운 도전의 길을 가고 있다. 이제 후배들을 잘 이끌고 그들이 오래 일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자신의 몫이라 여긴다.
앞으로 공부 열심히 해서 생명을 존중하며
저만의 액션 스타일을 보여줄 수 있는 무술감독이 되고 싶습니다.
유미진 스턴트우먼은 이 일을 하면서 가벼운(?) 어깨 수술을 받았고, 오른쪽 아킬레스건과 무릎 연골이 없다. 그만큼 스턴트우먼으로서 부상은 안고 살아가야 한다. 이렇게 위험천만한데 이 일을 하는지 물어보니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하는 일’이라며 자부심을 표했다. 위험을 무릎 쓰고 카메라 앞으로 향하는 그에게 이 일은 천직이 아닐까. ‘레디 액션’이라 외치면 언제든 뛸 수 있다는 그의 에너지가 오랫동안 작품에 분출되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