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에서 몇 번쯤 의심 – 혹은 의구심을 품게 될 것이다. 최근의 컴퓨터그래픽 기술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세대라면, 유인원이 등장하는 첫 장면부터 저건 그냥 원숭이 분장을 한 사람이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보다 SF영화라고 했는데 난데없이 유인원이라니 – 엉뚱한 극장에 잘못 들어온 것은 아닌지 주변을 둘러볼 수도 있겠다. 우주에 대한 영화가 왜 유인원에서 시작되는지, 거대한 검은 석판의 정체는 무엇인지, 인공지능 컴퓨터는 왜 저러는지, 좀처럼 쉽게 답을 귀띔해 주지 않는 서사를 따라가다 좀이 쑤실 수도 있다. 어쩌면 걸작이라는 소문의 진위를 의심하게 될 것이다.
옥미나 | 영화 평론가
영화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배웁니다
괜찮다, 당연한 일이다. 1968년 개봉 당시에도 극장을 뛰쳐나갔다고 당당히(!) 밝히고 혹평을 쏟아내는 이들은 얼마든지 많았다. 그럼에도 평론가들의 찬사가 아니라 스탠리 큐브릭이라는 이름을 믿고 인내심과 집중력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극장 스크린으로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난생처음으로 볼 수 있다면(진심으로 부럽다!) 영화와 우주에 대한 상상력의 차원이 달라질 것이다.
우주에 관한 과학적 사실과 인간의 상상력을 담아내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원작 소설이 있다는 말은 절반쯤 맞고 절반은 틀렸다. 1964년, 아서 C. 클라크와 스탠리 큐브릭은 ‘우주에서 인간의 자리가 무엇인지 다루는 – 신화처럼 웅장한 이야기’를 만들자고 의기투합한다. 클라크의 소설 <파수꾼>을 출발점으로 삼아 공동 작업이 시작되지만, 영화의 개봉이 소설의 출판보다 몇 개월 더 빨랐다. 클라크가 편집 필름을 보고 소설의 내용 일부를 수정하기도 했다고 밝힌 만큼, ‘원작 소설의 영화화’로 작품의 순서를 정리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각각 독립된 두 걸작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해냈다는 묘사가 가장 사실에 부합할 것 같다.
설령 소설을 꼼꼼히 읽더라도 서사의 퍼즐 조각을 찾아내기는 쉽지 않다. 그저 영화의 장면에서 소설의 몇몇 문장이 떠오르는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는 아서 C. 클라크의 소설을 반드시 읽어 보기를 권한다. 클라크가 설계한 소설 속 세계가 과학적 사실에 기반한 정밀한 우주이자 완벽한 지도라는 사실에 동의한다면, 스탠리 큐브릭의 영화는 지도에 등고선으로만 존재하던 지형의 실제 윤곽과 그림자를 포착해 낸 걸작이라는 사실에도 수긍하게 될 것이다.
아울러 영화란 무엇인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은 덤이다. 때때로 위대한 작가들은 매체가 가진 가능성의 경계 너머를 상상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영화의 마지막 몇 분 동안, 어쩌면 스탠리 큐브릭의 머릿속에서 – 그의 상상을 목격하는 진귀한 체험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전대미문의 기념비적인 SF 영화의 탄생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스탠리 큐브릭은 보편적인 영화 서사의 공식을 내팽개친 대신, 우주와 우주선의 묘사에 골몰한다. 우주선 내부의 원형 복도를 보여주기 위해 27톤에 달하는 ‘원심분리기’ 세트를 제작하는 식이다. 하지만 복도는 중대한 서사적 사건이 발생하는 공간이 아니다. 세트의 압도적인 면모가 드러나는 것은 보우먼이 조깅하는 잠깐이 전부다. 제작자 입장에서는 재앙에 가까운 선택이지만, 이것은 오히려 우주를 다루는 영화에 대한 스탠리 큐브릭의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예시인 셈이다. 큐브릭은 우주를 단순히 서사의 새로운 배경으로 활용하거나, 재현의 한계를 ‘영화적 허용’으로 퉁 치거나, 제작비를 핑계로 변명하거나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가 생각하는 우주는 인간이 가진 시간과 공간에 대한 개념이 완전히 뒤틀리고, 지구의 중력과 상식이 무효해지는 절대 공간이다. 크기를 가늠할 수도 없는 거대한 미지의 시간이자 공간이며, 우주에는 과거와 미래가 중첩된다는 것을 전제로 스탠리 큐브릭은 두 번째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우주에서 인간은 무엇이고, 무엇을 할 수 있는 존재인가.
그 유명한 수수께끼의 거대한 석판, 모노리스 혹은 스타게이트가 등장한다. 모노리스의 의미를 어떻게 파악하느냐에 따라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암울한 아포칼립스로도, 인류의 희망으로도 해석될 수 있다. 소설과 영화가 차이를 드러내는 것도 바로 이 지점이다. 아서 C. 클라크는 누가, 왜 인류에게 모노리스를 제공했는지 설명하고, 서사의 끝에 등장하는 거대한 태아에게도 행동과 선택의 시간을 할애한다. 그에 비해 스탠리 큐브릭은 단호하게 – 모노리스의 진실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태아의 등장에 맞춰 영화를 끝낸다. 스탠리 큐브릭은 서사를 완결하는 대신 – 어차피 우주는 미지의 시간과 공간이 아닌가 – 관객들에게 우주에 대한 그의 상상에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광활한 우주 속 인간의 존재론적 의미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개봉한 것은 1968년 봄. 인류가 달에 착륙하기 1년 전의 일이다. 이후 5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우주를 탐험하고 새로운 사실이 밝혀질 때마다 우주인들과 우주과학자들은 여전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언급한다. 책과 영화의 상상력이 1968년에 이미 보여주었던 상황과 장면의 예지력에 감탄하기도 하고, 이제 막 파악한 – 영화와는 다른 것으로 밝혀진 사실에 대해 설명한다.
지난 55년 동안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어떻게 현실에 개입하고 미래를 묘사했는지 가늠하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경이로운 일은 또 있다. 수많은 우주과학자들이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보고 우주에 매혹되어 우주 연구에 입문했다고 고백한다는 것이다. 우주는 무엇이며, 우주 속의 인간은 어떤 존재인지 관객에게 질문하고 답을 얼버무린 대신, 스탠리 큐브릭은 인류에게 예술이란 무엇이며, 무엇을 할 수 있는지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로 직접 증명한 셈이다.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스탠리 큐브릭 감독 작품으로, 1968년 개봉 이후 최고의 SF 걸작으로 손꼽히고 있다.
- 전국 CGV 아트하우스 상영관에서 오는 4월 26일부터 5월 9일까지 ‘워너브러더스 100주년 특별전’을 통해서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