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J ENM이 투자·배급한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가 6일 개봉했다. 24년 만에 다시 만난 첫사랑 연인이 그간의 ‘인연’을 돌아보는 운명적인 이야기를 그린 작품으로, 단숨에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의 작품상·각본상 후보에 오르며 화제가 됐다. CJ ENM 작품으로는 <기생충>에 이어 두 번째다.
<패스트 라이브즈>에 대해 오스카 노미네이트만큼이나 글로벌 시장에서 주목하는 사실이 있다. CJ ENM과 미국 할리우드 독립영화 제작사 ‘A24’가 공동제작하고 투자‧배급한 작품이라는 점이다. A24는 <미나리> <문라이트>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성난 사람들> 등 작품으로 주목받는 영화·콘텐츠 업계의 신흥 강자다. 뛰어난 현지 제작사와의 협업을 통해 글로벌 영토를 넓혀 나가는 CJ ENM의 ‘스마트’한 성공 사례가 세계 콘텐츠 시장에서 주목받고 있다.
양사는 서로의 영향력과 노하우를 합쳐 최고의 시너지를 냈다. 북미 시장에서의 유통, 인프라, 노하우, 팬덤까지 갖춘 A24가 북미 지역 배급과 전 세계 해외 세일즈를, ‘기생충’ 등으로 문화 사업의 결실을 맺고 K콘텐츠 대표 기업으로 자리 잡은 CJ ENM이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 지역 배급을 맡았다.
A24의 사샤 로이드 대표는 최근 한국을 찾아 CJ ENM과의 협업에 대한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CJ ENM과의 협업은 값지고 좋은 경험이었다. 함께했을 때 얼마만큼의 파급력과 시너지를 낼 수 있는지 알게 됐다”며 “이제부터가 시작이다. CJ ENM과 함께 할 다음 작품을 고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기생충>의 성공, 글로벌 네트워크에 날개를 달다
문화를 해외에 판매한다는 것은 제조업 등 일반 제품을 파는 것에 비해 어려운 일이다. 특히 미국, 유럽 등에서 우리 고유의 문화를 확산하고 전파하기까진 오랜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다. 아시아 문화를 완전히 이질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배척하는 경향이 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척박한 환경에서도 CJ ENM은 해외 시장을 꾸준히 개척해 왔다.
그 출발점은 지금으로부터 3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해외 시장에서 한국 문화는 사실상 영향력을 거의 미치지 못하고 있었다. 국내에서조차 ‘문화 콘텐츠가 산업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던 시절이기도 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도 CJ ENM은 1995년 스티븐 스필버그, 제프리 카젠버그 등을 중심으로 한 ‘드림웍스’ 설립에 3억 달러를 투자했다. 그리고 이를 기점으로 글로벌 기업, 크리에이터들과 하나둘씩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장 가시적인 효과가 나타나진 않았다. 글로벌 시장의 벽은 예상보다 더 높고 견고했다. 그러다 분위기가 크게 달라진 것은 2020년 CJ ENM이 투자 배급한 영화 <기생충>이 오스카에서 작품상을 포함한 4관왕을 차지하면서였다. 미국, 유럽 시장의 주요 플레이어들은 잇달아 러브콜을 보냈고, 보다 다양한 형태의 합작이 활발히 이뤄지게 됐다. 이로써 ‘K콘텐츠’라는 기존의 날개에, ‘글로벌 네트워크’라는 크고 든든한 날개가 더해지게 됐다.
잘 만든 미드, 알고 보니 CJ ENM이…
현지 노하우를 활용한 CJ ENM의 글로벌 시장 공략은 영화, 드라마, 뮤지컬 등 여러 영역에 걸쳐 전방위로 이뤄지고 있다. 베트남에서 올 설 연휴 기간(2월 10~14일) 동안 역대급 흥행 기록을 세운 영화 <마이>도 CJ ENM의 작품이다. CJ ENM의 베트남 법인 CJ HK엔터테인먼트와 베트남의 국민 감독이자 배우인 ‘쩐 탄’이 합작했다.
이 영화는 첫날 22만 5000명에 달하는 관객을 모으며 베트남 영화 사상 오프닝 스코어 1위에 올랐다. 베트남 영화 중 역대 박스오피스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던 <더 하우스 오브 노 맨>보다도 빠른 속도이다. 그런데 <더 하우스 오브 노 맨> 역시 CJ ENM과 쩐 탄이 공동 제작한 영화이다. 결국 CJ ENM이 베트남에서 자체적으로 기록을 경신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애플TV플러스에서 방영된 <더 빅 도어 프라이즈(The Big Door Prize‧운명을 읽는 기계)>도 큰 화제가 됐다. 이 작품은 미국 배우들이 영어 대사를 하는 미국 드라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을 만든 회사는 CJ ENM의 자회사이자 국내 최대 규모의 제작사 스튜디오드래곤이다. 총괄 프로듀서는 이미경 CJ그룹 부회장이 맡았다.
스튜디오드래곤은 이 작품을 미국 제작사 스카이댄스와 공동 제작했다. 스카이댄스는 영화 <터미네이터>, <미션임파서블>,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 등을 만든 곳이다. CJ ENM과 스튜디오드래곤은 앞서 2020년 스카이댄스와 영화, 드라마 등 글로벌 콘텐츠 공동제작과 투자를 위한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다. 이들의 시너지 덕분에 해당 드라마는 참신한 설정과 탄탄한 구성을 갖췄다는 호평을 받았다. 시즌 1의 성공에 힘입어 시즌 2 제작도 확정됐다.
CJ ENM은 공연 시장에서도 이같은 전략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CJ ENM은 글로벌 공동 프로듀싱을 통해 미국 브로드웨이, 영국 웨스트엔드 작품 제작에 참여하고 있다. 뮤지컬 본고장에서 협업을 통해 역량을 키운 후 글로벌 시장을 직접 겨냥한다는 방침이다. 또한 글로벌 공동 프로듀싱한 뮤지컬 <킹키부츠>, <비틀쥬스>, <물랑루즈!> 등을 한국 무대에도 올려 호평을 받았다.
‘글로벌 IP 파워하우스’로의 힘찬 도약
<패스트 라이브즈> 이후에도 CJ ENM의 글로벌 사업은 활발히 진행될 전망이다. CJ ENM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뛰어난 실력을 갖춘 글로벌 기업, 크리에이터와 관계를 맺고 신뢰를 구축해 왔다. 작업을 함께 하며 노하우를 습득해 온 시간과 공력이 폭발적인 글로벌 성과로 이어질 시간이다.
CJ ENM은 올해도 해외 영화사와 공동 제작하는 작품 2편을 크랭크인할 예정이다. 박찬욱 감독이 연출을 맡은 미국 HBO맥스 드라마 <동조자>, <인터스텔라>의 제작자인 린다 옵스트와 공동 제작하는 영화 <케이 팝:로스트 인 아메리카> 등을 잇달아 선보일 예정이다.
구창근 CJ ENM 대표는 지난해 7월 임직원을 대상으로 한 타운홀 미팅에서 ‘글로벌 IP 파워하우스’로의 도약을 강조했다. 글로벌 IP 파워하우스는 콘텐츠 경쟁력을 바탕으로 글로벌 시장에서 통할 수 있는 지식재산권(IP) 제작을 늘려 K콘텐츠 대표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겠다는 CJ ENM의 중장기 전략이자 목표이다.
물론 해외 시장엔 여전히 많은 어려움과 변수가 존재한다. 할리우드의 파업으로 인한 여파도 지속되고 있다. 하지만 CJ ENM이 가진 글로벌 파급력은 막강하며, 앞으로 더욱 커질 것으로 보인다. K콘텐츠, 글로벌 네트워크라는 두 날개로 힘찬 날갯짓을 이어가고 있으니 말이다. 전 세계를 뜨겁게 달굴 글로벌 메가 IP의 연이은 탄생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