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기 힘들겠지만 2019년도 보름이 채 남지 않았다. 영화 애호가라면 이 시기에 꼭 하는 게 있으니 올해 최고의 작품을 꼽는 일이다.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도 마찬가지. 한해를 마감하고 내년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2019년 띵작! 2020년 기대작을 보내줬다. 가는 영화 한번쯤 돌아보고 오는 영화 마다하지 않는 마음으로, 올해를 기억할 작품, 내년을 빛낼 작품을 소개한다.
2019년 띵작! <행복한 라짜로>
좋은 영화는 사람들을 상상하게 만들고 각자의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는 지점에서 보는 내내 마음을 어지럽혔다. 영화가 끝난 뒤에도 쉬이 잊혀지지 않았던 이 마법 같은 세계.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의 <행복한 라짜로>를 올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로 꼽는다.
2020년 기대작 <미나리>
한국계 미국인인 정이삭 감독의 연출작. 개인적으로 한인 이민자 가족의 이야기라는 소재가 흥미로운데, 플랜B와 A24가 제작에 참여했다니 시나리오에 대한 기대가 수직 상승한다. (A24는 최근 <문라이트> <플로리다 프로젝트> <레이드 버드> 등을 만든 제작사) 게다가 최근에는 선댄스 경쟁 부문에 초청되었다는 소식까지. 한국 개봉일이 나오면 달력에 별표를 잔뜩 그릴 심산이다.
2019년 띵작! <아사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 받는 신예 감독이다. 전작 <해피 아워>(2015)가 그를 주목하게 만들었다면 <아사코>는 많은 대중들에게 그의 존재를 각인시킨 작품이다. 특별하지만 무책임한 바쿠와 일상적이지만 책임감 있는 료헤이 사이에서 갈등하는 아사코의 선택과 행동은 멜로 서사적 욕망 그 이상이었다.
동일본 지진으로 인해 피해 지역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료헤이와 함께 피해 지역을 찾고, 바다를 보고 싶다던 바쿠의 충동적 선택에 의해 도착한 피해 지역 부근 바닷가를 보고 다시 료헤이에게 돌아갈 것을 결심한 아사코의 행동은 분명 현 일본 사회가 처해있는 위기 속에서 회복해야 할 가치가 무엇인지를 선명히 드러낸다. 이미 상처 받은 료헤이에게 끝까지 사과하는 아사코의 모습은 그런 의미에서 <아사코>를 충분히 정치적으로 해석할 여지까지 제공한다. 이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을 주목해야 할 또 한 가지 이유이기도 하다.
2020년 기대작 <밤쉘>
폭스 뉴스의 창립자인 로저 에일스의 성폭력에 피해당한 여성들이 직접 문제를 제기하고 사내의 남성중심적 문화에 대항해 나아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이미 니콜 키드먼, 샤를리즈 테론, 마고 로비가 동시에 출연한다는 소식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던 <밤쉘>은 세 배우의 열연뿐만 아니라 영화를 통해 남성 중심적 문화에 맞서는 과정이 어떻게 서사화 될지를 궁금하게 만든다.
폭스 뉴스라는 거대 언론 집단 내부의 변화는 분명 큰 파장을 몰고 올 여지가 있고, 실제적 사건이 영화적 재현을 통해 전 세계에 또 다른 영향을 줄 수 있을 거란 기대감도 생긴다. <서프러제트>(2015)가 과거 영국의 여성인권운동의 역사적 사건을 다뤘다면 <밤쉘>은 분명 현재적 시점에서의 여성인권운동의 또 다른 역사적 사건을 다루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런 작품을 기다리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2019년 띵작! <행복한 라짜로>
제71회 칸국제영화제 각본상 수상작 <행복한 라짜로>는 스크린에 놓인 어떤 시간을 꾹 참고 견뎌야만 비로소 보이는 영화다. 시대 배경도, 공간도, 인물의 정체도 선명히 가늠할 수 없는 모호한 우화의 터널을 통과하면, 그제야 마음이 시릴 정도로 익숙한 현대의 풍경이 모습을 드러낸다. 여전히 맑고 투명한 눈을 빛내는 라짜로(아드리아노 타르디올로)를 제외하고는 주변 사람들 모두가 피로에 찌든 얼굴로 늙어버렸고, 야속하게도 그들 모두 전보다 더 가난해졌으며, 서로를 향한 정서적 유대마저 단절된 듯 보인다. 이 즈음에서 영화는 이탈리아에 실재했던 현대판 노예 이야기를 표방하는 사회파 영화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건 사실 콘셉트 정도에 가깝다.
이 작품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선함, 진실함, 그리고 믿음에 관해 역설하려 한다.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과 문학으로부터 출발한 마술적 리얼리즘의 계보를 절반씩 이어받은 알리체 로르와커 감독은 장면의 리듬을 기묘하게 늘어뜨리거나, 바람 소리와 같은 특정 사운드를 부각하는 방식으로 그 어려운 주제를 미장센과 연결 지었다. 이렇게 차곡차곡 쌓인 감독 특유의 스타일은, 영화 말미에 결정적인 영화적 허용을 제시함으로써 완성된다. 이 장면에서 춥고 배고픈 라짜로 일행은 어느 성당에 들어갔다가 차별 대우를 받고 쫓겨나듯 빠져나온다. 상심한 라짜로의 동료들이 고개를 푹 숙이고 야외를 걷기 시작하는데, 어느새 성당 내부의 노랫소리가 천사처럼 그들의 행렬을 따라와 주위를 감싼다. 이 순간 라짜로는 그 어떤 연출적 기교 없이도 마치 빛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을 안긴다.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로 <행복한 라짜로>를 해설할 때, 단지 이 장면의 세부를 찬찬히 정리해 다시 언급했을 뿐인데 객석의 어느 중년 여성 관객분이 참았던 눈물을 터뜨린 적이 있었다. 나는 멀리서 그 눈물을 바라보면서, <행복한 라짜로> 같은 영화가 있는 한 아직 세상은 살만 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처럼 가능한 더 섬세하고 정확하게 영화의 미덕을 발견하자고 다짐했다. 그 순간 하나만으로 <행복한 라짜로>는 내게 올해의 영화다.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체험에 기대어 연말결산을 적는 이 뻔뻔함이 적어도 <행복한 라짜로> 앞에서는 용인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 영화에 관해 이야기할 때만큼은 라짜로가 우리에게 그랬던 것처럼 마음껏 순수해질 수 있지 않을까.
2020년 최고의 기대작 <작은 아씨들>
그레타 거윅이 <레이디 버드>에서 감독으로서 보여준 역량과 존재감은 데뷔작이라고 믿기 어려운 종류의 것이었다. 그의 영화엔 어떤 자연스러움이 있었다. 틴에이지 성장담의 장르적 외피 아래에 있으면서도 그레타 거윅만의 유머, 괴짜스러움, 그리고 사랑스러움이 날 것 그대로 살아있는 광경은 얼마나 즐거웠던지. 그런 맥락에서 <작은 아씨들>은 다시 한번 그 생기 넘치는 세계가 마음껏 펼쳐질 것으로 기대되는 작품이다.
그레타 거윅의 페르소나가 되었음이 분명한 시얼샤 로넌을 필두로 전작보다 더 많은 여자들이 스크린에 나타나 울고 웃고 소리치며 서로를 감싸 안을 것이다. 특별히 이번엔 <미드소마>에 이어 곧 <블랙 위도우>로 첫 히어로 무비에 도전할 플로렌스 퓨의 활약이 예고되었다. 티모시 샬라메의 팬들은 벌써부터 SNS에서 <작은 아씨들>의 배우들 사이에 혼자 다소곳이 자리하고 있는 청일점인 그의 귀여움을 공유 중이며, 로라 던과 메릴 스트립은 묵묵히 작품을 받치고 선 거대한 기둥처럼 믿음직스럽다. 감독과 배우의 이름만으로 어떤 작품을 열렬히 기다릴 수 있다는 것. 영화 팬에게 허락된 이 순진한 즐거움을 <작은 아씨들>은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만족스럽게 꽉 채워주는 영화다.
2019년 띵작!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와 역시 타란티노 선배님 완전히 무대를 뒤집어놓으셨다’. 물론,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가 감독의 가장 위대한 작품이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올해 쿠엔틴 타란티노 회고전을 통해 <펄프픽션>을 다시 본 다음은 더더욱 그렇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감독은 자신이 사랑하는 대상들에 대한 넘치는 애정과 여전히 넘실거리는 음율로 충만한 대사들, 발가락 끝부터 전기가 오르는 듯한 서스펜스를 담아 이 영화를 완성했다. 특히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화염방사기를 들고 수영장에 나타나는 장면은 감히 올해의 베스트(<조커>의 계단춤과 고민했지만)로 꼽히기에 손색이 없다.
2020년 기대작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번스타인>
2020년은 지휘자이자 작곡가, 피아니스트이자 뮤지컬 작가, 그리고 교육자였던 레너드 번스타인의 서거 30주기다. 그의 서거 30주기를 맞아 두 편의 번스타인 영화가 준비중이다. 하나는 스티븐 스필버그의 믿을 수 없게도 ‘첫 번째’ 뮤지컬 영화인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레너드 번스타인이 작곡하고 스티븐 손드하임이 작사한 음악들로 채워진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1961년 영화화 되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이 1961년 버전의 리메이크를 연출한다. 동시에 스티븐 스필버그는 레너드 번스타인의 전기영화 <번스타인>을 제작한다. 연출은 <스타 이즈 본>으로 감독의 재능을 입증한 브래들리 쿠퍼다.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는 2020년 12월 18일, <번스타인>은 2020년 북미 개봉예정. 극장 상영하기까지의 공허함은 시몬 볼리바르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연주한 뮤지컬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mambo’로 살짝 채우기 바란다.
2019년 띵작! <강변호텔>
나누고 반복하며 차이를 드러내는 홍상수 영화의 구조는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2016) 이후 인물과 장소 안으로 녹아 들어 더욱 부드러운 방식으로 작동한다. 어느 강변 호텔의 1층 카페, 그곳의 스크린처럼 펼쳐진 창이 비추는 풍경에 주목하면, 우리는 이곳에 묵고 있는 한 시인을 찾아온 그의 두 아들이 그를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한편, 강이 얼어붙고 눈으로 뒤덮인 새하얀 풍경 속으로 검은 코트를 걸친 두 여자가 걸어 들어간다. 스크린 표면을 찢고 심연이 드러난 듯한, 이 장면에 매혹된 시인은 그들과 인사를 나눈 후 두 아들과 재회한다. 이처럼 홍상수의 영화는 매번 일상을 향해 조여진 나의 시각을 잠시 우주의 시간으로 풀어놓는데, <강변호텔>은 그 중 가장 아름다운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020년 기대작 <레미제라블>
마티유 카소비츠의 <증오>(1995)와 비견되며, 올해 칸국제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작이자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프랑스 후보로 선정된 이 작품은 레주 리 감독의 데뷔작이다. 빅토르 위고의 동명 소설과는 공간적 배경을 공유하고 있으며, 시간적 배경은 동시대로, 도시 빈민층 아이들이 어른들의 범죄에 휘말려 희생되는 비극적인 현실을 그려냈다. 레주 리는 19살에 산 캠코더로 자신이 사는 파리 외곽 몽페르메유의 모습을 찍기 시작해 오랜 시간 다큐멘터리 영상 작업을 해왔다. 그의 다큐멘터리스트로서의 시각은 장르 영화의 문법 속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을까.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이 작품을 본 친구들의 지지를 빌려 이 영화를 2020년 기대작으로 꼽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