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밥, 혼술, 혼영… 1인 고객이 마케팅 시장의 주류로 떠오르고 혼자서 무얼 하는 것이 더이상 새삼스럽지 않은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가끔 ‘혼자’라는 단어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고민하게 한다. 혼자서 잘 살아간다는 것은 언젠가 혼자서 잘 죽는 것까지 의미해야 마땅하므로 우리는 혼자됨의 발전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19일 개봉작 ‘혼자 사는 사람들’은 한국영화아카데미를 졸업한 홍성은 감독의 데뷔작으로 고독과 외로움에 지지 않는 1인분의 삶에 명민한 지향점을 설정한다. 제22회 전주국제영화제에서 배우상(공승연)과 CGV 아트하우스 배급지원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배우 공승연은 첫 장편영화 주연작에서 스크린 배우로서의 존재감과 안정감, 섬세한 표현력을 모두 입증하며 스크린 스타로서의 미래를 기대하게 만든다.
김소미 |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제각기 고유하고 무모한, 영화의 틈새가 궁금하다
혼자 사는 삶에 들어온 잔잔한 동요!
카드사 콜센터에서 일하는 진아(공승연)는 다부진 성품과 적당한 수완을 겸비한 우수 사원이다. 그녀는 때가 되면 어김없이 전화를 걸어와 한달치 카드 실적을 모조리 읽어달라는 주부나 타임머신을 타고 시공간을 이동한 뒤에도 카드를 사용하고 싶다는 정신 질환자에게도 익숙하게 응대한다.
진아는 자신의 일에 관해 프로페셔널인만큼 1인 가구로 살아가는 혼자로서의 삶에도 흔들림이 없다. 정확한 효율과 절도를 추구하는 것이 그녀의 창이라면, 시종 빈 틈 없이 무신경한 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그녀의 방패다. 출퇴근길 내내 핸드폰 화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매일 같은 식당에서 국수로 끼니를 해결하는 여자. ‘혼자 사는 사람들’은 좀처럼 사건이라고는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진아의 지루한 삶에 들어온 주변인들이 무심한 듯 표표히 만들어내는 동요를 따라간다.
주인공을 둘러 싼 세 개의 공간과 인물!
‘혼자 사는 사람들’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주제를 배양하기 위해 찬찬히 이야기의 교직을 엮어가는 재능이다. 중심인물 진아를 둘러싸고 세 개의 공간과 인물이 미묘한 상호 교류의 폭을 키워간다.
우선 그녀에겐 미운 아버지라는 거대한 적이 있다. 얼마 전 엄마를 여읜 진아는 십수년 전에 집을 나갔다 돌아온 아빠(박정학)가 여전히 껄끄럽기만 하다. 그러던 중 아픈 엄마를 살피려 부모님 집 거실에 설치했던 웹캠을 통해 아빠의 생활을 염탐하게 된다.
모친의 죽음에 버금가는 사건은 아니지만 진아가 혼자 사는 집에도 또다른 죽음이 벌어진다. 오래된 복도식 아파트에 사는 그녀는 출퇴근길에 종종 담배를 태우는 옆집 남자(김모범)와 마주치게 되는데, 옆집 남자가 실은 한참 전에 집 안에서 홀로 목숨을 잃은 은둔형 외톨이임을 알고 충격에 빠진다.
한편, 진아는 직장에서도 예기치 않은 이별을 경험한다. 교육 담당자가 되어 신입사원 수진(정다원)과 짝을 이룬 진아가 자기 옆의 싹싹한 초심자에게 습관적인 냉담함을 건네는 사이 수진이 말없이 사라져 버린다.
요컨대 ‘혼자 사는 사람들’은 엄마, 옆집 남자, 동료의 상실을 경험하는 진아의 일상에 조금씩 미세한 균열이 이는 과정이다. 외부를 차단한 채 혼자 사는 삶으로서 흔들림없이 견고했던 그녀의 삶은 이윽고 심리적 위기를 맞는다.
주변인과의 관계로 빚은 삶의 터닝 포인트
좀처럼 한 데 모일 것 같지 않던 이야기는 진아의 옆집에 서글한 성격의 새 이웃 성훈(서현우)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지대로 성큼 나아간다. 새 집에 자리잡은 성훈은 어느날 대문을 열어두고 홀로 외롭게 죽어간 이전 세입자를 기리는 제를 지낸다. 어두운 복도에서 따뜻한 불빛 아래 제를 지내는 성훈의 집 모습을 들여다보던 진아의 얼굴에 그 빛의 온기가 묻어날 때, 어느덧 진아의 마음에도 전에 없던 온기가 감돈다. 진아는 더이상 연락할 수 없는 죽은 사람들 대신, 지금이라도 붙잡아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넬 수 있는 가까운 누군가에게 먼저 연락하기로 결심한다.
아주 오래된 누군가의 무표정에 생동감이 싹트는 순간은 얼마나 경이로운가. ‘혼자 사는 사람들’은 바로 그 결정적 순간을 향해 진아와 주변인들의 느리고 성근 조우를 한 땀 한 땀 이어나간 결과물이다. 수화기 너머의 고객, 웹캠 속의 아버지, 냄새로 자신의 죽음을 알린 옆집 이웃과 진아 사이에 세워져 있던 투명한 장벽은, 문득 마주하게 된 어느 집의 열린 문 틈새를 통해 허물어진다.
‘혼자 사는 사람들’은 세태를 시의적절하게 바라보는 통찰의 시선에서 실마리를 풀어 현명하고 건강한 성숙을 향해 매듭 짓는다. 우리는 혼자인 채로도 충분히 공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긋한 위로의 여운은 꽤나 길고, 유용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