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칸국제영화제에서 영화 ‘비스트’(2013)로 황금카메라 상을 받고 전세계 영화제에서 90여개 부문 수상을 이뤄낸 벤 제틀린 감독이 8년 만에 ‘웬디’로 돌아왔다. 아이의 상상적 세계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농밀하게 풀어냈던 전작의 힘이 제임스 M. 배리의 동화 ‘피터와 웬디’를 발판 삼아 더욱 확장되고 단단해졌다. 나이 드는 것을 피할 수 없는 현실 속에서 늙지 않는다는 것, 환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 ‘웬디’가 풀어놓는 네버랜드의 풍경을 자세히 조망해본다.
이동윤 | 영화 평론가
툭하면 영화 보고 운다. 영화의 본질은 최대한 온몸으로 즐기는 것
사라지고 외면 받는 존재의 수호자, 벤 제틀린 감독
벤 제틀린 감독은 민속학자인 부모님의 영향으로 많은 영화와 이야기를 접하며 성장했다. 특히 그의 부모님은 뉴욕시의 문화를 보존하고 기념하는 ‘City Lore’를 설립해 문화적 평등과 사회 정의를 위한 교육, 공공 프로그램을 운영 중인데 사라져가는 주변인들의 서사를 지켜내려는 부모님의 의지는 어른들에겐 보이지 않는 아이들의 세계를 무한하게 그려내는 벤 제틀린 감독의 상상력과도 사뭇 닮아 있다.
그는 자신의 영화사 ‘Court 13’을 설립할 때도 웨슬리 대학 주변의 소외된 지역 이름을 따와 지었다. 영화를 만들면서도 항상 주된 배경은 저소득층의 삶이었으며, 배우 또한 실제 그 지역에서 살아가는 이들을 캐스팅하기도 했다. 이처럼 벤의 관심은 사회 체제가 지워가고 외면하는 것들을 영화속에서 어떻게 다시금 회복할 것인가에 온전히 맞춰져 있었다. 이는 ‘웬디’의 네버랜드가 단순히 어리고 미성숙한 상상적 세계로만 여겨지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동화 ‘웬디와 피터’의 철학적 재해석
절대 늙지 않는 세계, 네버랜드는 아이들의 동심이 유지되고 보호받는 세계로 여겨지지만 원작에서 묘사하는 네버랜드의 아이들은 ‘동심’이라는 어른의 시각으로 한정 지어지지 않는다. 아이들만의 잔인성과 미성숙함, 희미한 도덕적 관념들이 네버랜드에서는 존중되며 어떤 아이들도 이런 이유로 차별 받거나 외면 당하지 않는다. 오직 ‘늙지 않는 것’, ‘어린 아이로 남아 있는 것’만이 중요한 삶의 기준이 될 뿐.
‘웬디’는 이러한 네버랜드의 중요한 가치들을 철학적 관점으로 깊게 들여다본다. 과연 나이 들지 않고 살아가는 것만이 유일한 대안일까? 어린 아이들의 ‘거침’(이 단어는 영어로 ‘wild’에 해당하는데, ‘wild’는 벤 제틀린 감독의 ‘비스트’와 ‘웬디’ 두 작품을 모두 관통하는 단어이기도 하다.)이 역설적으로 우리 삶의 원동력이 될 수는 없을까? 순화되고 우화로 포장된 동심의 세계가 아니라 거칠고 역동적이며 위험천만한 세계가 현실 세계에 쉽게 적응해버린 우리의 내면에서 사라져 가는 어떤 불꽃을 다시 지필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가치들이 바로 네버랜드에 남겨져 있는 것은 아닐지, 벤 제틀린 감독은 이번 작품을 통해 이전과는 전혀 다른 관점에서 ‘네버랜드’의 가치를 생각하게 만든다.
대자연의 아름다움으로 재탄생한 네버랜드
감독이 영화를 만들면서 가장 공을 들인 것은 바로 네버랜드의 재현. 그 동안 제임스 M. 배리의 원작을 영화화한 작품들은 모두 네버랜드를 특수효과의 화려함이 가득한 세상으로 그려냈다. 벤 제틀린 감독은 이러한 인위적인 화려함을 배제하고, 대자연이 지닌 숭고한 힘을 고스란히 스크린에 담아냈다.
먼저 웬디와 두 쌍둥이 오빠가 함께 도착한 섬은 카리브해의 몬트세라트 섬에서 촬영했다. 현실적 세계와는 완전히 구별되는 상상 속 아름다움이 대자연의 힘을 통해 온전히 구현된 것이다. 섬 한 가운데 위치한 화산은 몬트세라트 섬 정 중앙에 위치한 수프리에르 산으로 실제 화산이 폭발하고 있는 활화산이다. 여러 위험 요소로 인해 촬영 준비에만 2년이 걸렸지만, 많은 공을 들인 만큼 광활한 화산 폭발의 이미지를 화면에 잘 담아낼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멕시코의 동굴, 루이지애나의 기차 트랙 등 실제 장소를 선택해 컴퓨터 그래픽이 만들어내는 인공적 요소를 최소화했는데 그 결과, 우리는 여태 보지 못했던 네버랜드의 광활함을 볼 수 있게 됐다. 그리고 네버랜드를 단지 상상 속의 세계가 아닌 실제로 경험하고 체험할 수 있는 구체적인 시공간으로 경험하게 되었다. 벤 제틀린 감독이 만들어낸 네버랜드의 아름다운 자연들을 온전하게 만끽하기 위해서라도 ‘웬디’는 꼭 극장의 큰 스크린을 통해 봐야 한다.
벤 제틀린 감독이 한 인터뷰에서 성장하는 것은 결국 ‘사랑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래서일까? ‘웬디’는 아이로 머무르는 것을 온전히 찬양하지 않는다. 아이가 성장하고 성인이 되어가는 과정의 힘을 강조한다. 그 힘은 나를 받아들이고 세상을 품어 안는 ‘사랑’에서 나온다는 이유에서다. 영화 속 ‘웬디’가 전하는 그 사랑의 힘을 많은 관객들이 만나고 누리길 소망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