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전주국제영화제, 서울국제여성영화제에서 주목받은 한국영화 ‘담쟁이’가 28일 개봉한다. 한제이 감독의 장편 데뷔작인 이 영화는 서로 사랑하는 두 여성이 어린 아이를 가족으로 맞아 들이며 새로운 삶을 계획해 나가는 과정의 고난들을 애틋하게 그린다. 한제이 감독은 올해 서울국제여성영화제 피칭 프로그램인 피치&캐치 프로젝트에서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탁월한 안목과 차기작에 대한 기대감까지 입증했다. 연극 무대와 영화, 드라마를 종횡하며 내공을 쌓아온 배우 우미화, 올해 단연 주목할 만한 신인인 배우 이연, 영화 ‘생일’ 등에서 성숙한 해석력을 보여주었던 아역 배우 김보민의 자연스러운 앙상블만으로도 충만한 영화 ‘담쟁이’를 소개한다.
김소미 |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제각기 고유하고 무모한, 영화의 틈새가 궁금하다
연인에게 닥쳐온 불행은 예견되어 있었다?
엄마와 딸인가. ‘담쟁이’의 처음 몇 장면들은 가벼운 오인을 유도하는 방식으로 꾸며져 있다. 나이 차가 꽤 나 보이는 두 여자가 말끔해진 얼굴로 목욕탕에서 함께 걸어 나오고, 아침이 되자 부엌에서 달걀을 굽던 중년의 여자가 적당한 잔소리와 함께 어린 여자를 서둘러 깨운다. 가정 내 모녀의 풍경으로 치환되기에 더없이 일상적인 상황은 곧이어 거리에서 손을 잡는데 주저하거나 침대 위에서 속삭이며 입을 맞추는 모습에서 서둘러 아늑한 연인의 것으로 자리잡는다.
영화 초입에서 펼쳐지는 이 일련의 장면들이 말하는 것은, 어떤 관계든 간에 두 사람이 이미 지극히 안온한 일상과 가족의 풍요를 누리고 있다는 사실이다. 열정과 신뢰, 그리고 안락함이 더해진 두 여자의 사랑은 모자람 없이 충만해 보인다. 국어교사인 은수(우미화)가 의류매장 직원으로 일하는 예원(이연)의 학업을 독려하는 것으로 볼 때, 이들은 더 나은 미래를 꿈꿀 준비마저 되어 있다. 두 여자가 탄 자전거가 힘들여 페달을 밟지 않고도 얼마간 유유히 나아가는 것 같은 바로 그 때, 삶은 바람에 불행을 실어 둘을 무참히 넘어뜨린다.
진화한 한국 퀴어영화
언니를 만나러 고향을 방문한 은수는 큰 교통사고를 겪는다. 동승한 언니가 세상을 떠나고 은수는 다리를 쓸 수 없게 된다. 사고 소식에 뛰쳐나온 예원이 처음 만난 상대는 은수의 어린 조카 수민(김보민)이다. 졸지에 엄마를 잃은 소녀는 어쩐지 예원을 잘 따른다. “누군가를 하염없이 기다리는 아이의 모습”에서 영화를 출발시켰다는 한제이 감독의 말처럼 사고를 당한 커플만큼이나 어린 수민의 혼란은 ‘담쟁이’를 견인하는 중요한 정서다. 이윽고 깨어난 은수는 재활 상황에 따라 몇 년간은 거동이 힘들 거라는 소식 앞에서 어느새 말수가 줄어든다.
‘담쟁이’는 어느 날 갑자기 장애를 얻게 된 한 여자와 그를 사랑하는 또다른 여자, 그리고 엄마를 잃고 보호자가 필요한 어린 여자가 어떻게든 함께 살아보려는 이야기다. 하지만 세 여자는 가족이 되기는커녕 우선 만남 조차 쉽지 않아 보인다. 죽은 언니 외에는 이렇다 할 가족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예원은 은수의 보호자로 인정받지 못한다. 응급실 문간에서 유리창 너머로 멀찍이 연인을 지켜보아야만 하는 현실이 시작부터 두 여자의 불안감을 키운다.
영화는 앞서 이미 두 여자가 생활 속에 포진한 차별의 감시망을 익숙하게 피해가는 모습을 제시한 바 있다. 직업이 국어교사인데다 상대적으로 사회의 공고한 편견에 더 많은 상처를 입어왔을 은수는 거리에서 예원과 손을 잡는 일에도 신경을 곤두세웠고, 은수가 누구냐고 묻는 직장 동료의 질문에 예원은 익숙한 듯 사촌언니라고 대답했다. 은수의 언니 장례식에 찾아온 조문객들은 홀로 열심히 일하는 예원의 정체를 놓고 “좀 이상하잖아?”라고 수군대기도 한다.
다시 말해 ‘담쟁이’는 목욕탕에 가고, 아침을 차려 먹고, 출근을 하는 일상사부터 사고를 겪으면 병원에 입원하고, 장례식을 치르는 등의 중대사에 이르기까지 동성 커플에게만 적용되는 돌부리의 실체를 가시화하는 영화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만 가지의 돌부리에 발이 걸려 신음하는 연인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일어나 사랑하려 한다.
연인의 고난에 다음 세대를 상징하는 어린 수민이 동행하면서 ‘담쟁이’는 성소수자가 중심이 되는 대안 가족에 대한 사회적 인식과 제도적 한계까지 목도하게 만든다. 막강한 악역이나 잔혹한 폭력 없이 사회의 시급한 과제를 환기한다는 점에서 동시대적이고, 로맨스를 넘어 가족에 대한 고민을 더했다는 점에서 한국 퀴어영화의 확장으로 기억될 만하다.
진정한 가족의 의미를 묻는다
‘담쟁이’엔 건드리기만 해도 아프고 쉽사리 풀리지 않는 몇 겹의 매듭이 있다. 영화는 불시에 걷지 못하게 된 사람의 절망을, 고통에 휘감긴 연인과 낯설고 어린 존재를 동시에 보살펴야 하는 사람의 고난을, 감당하기엔 너무 이른 상실에 처한 사람의 슬픔을 모두 찬찬히 쓰다듬는다. 세 인물 모두 저마다의 생에 무게로 휘청이고 있다는 사실을 섬세히 그려내는 태도가 이 영화를 미덥게 한다.
예고된 차별 앞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는 성소수자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신체적 장애 역시 대중이 체감하는 것보다 보편적인 공동의 이슈다. 장애 인권 연구에서는 비장애인들을 예비장애인 혹은 일시적 비장애인으로 간주한다. 장애인의 90%가 후천적으로 당한 사고나 질병에 의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남들에게 폐를 끼치고는 못 사는, 다소 금욕적이고 완고한 성격의 은수가 부상을 이유로 학교에서 계약 해지를 통보 받는 장면에선 장애를 바라보는 사회의 위선이 서늘하게 드러난다. 교감 선생님은 해고를 통보하면서도 ‘우리는 가족’ 또는 ‘가족같은 관계’를 들먹이고 화가 난 은수는 “참 가족 같네요!” 일침하고 자리를 떠난다.
‘가족’과 ‘사랑’이 사회적 무대에서 그 뜻을 잃은 채 남용되는 동안, 정작 정당한 기회를 잃은 소수자들은 늘어간다. “누가 우리를 가족으로 인정해줘?”라고 날선 분노를 뿜어내는 은수를 품어내는 예원은, 그런 의미에서 세대의 진화를 보여주는 인물이기도 하다. 더 나은 긍정, 더 큰 희망은 은수와 예원을 통과해 수민에게도 이어질 것임을 ‘담쟁이’는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