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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소무’, ‘스틸 라이프’, ‘천주정’으로 세계 3대 영화제를 모두 석권한 중국 감독 지아장커가 이번에는 멜로-누아르라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한다. 지아장커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플랫폼’ 이후 꾸준히 함께 작업하고 있는 배우이자 그의 아내인 자오 타오가 묘사하는 중국 사회의 변화가 담긴 17년에 달하는 이 서사시가 더욱 각별하게 다가올 것이다. 옥미나 | 영화 평론가 영화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배웁니다 ‘강호아녀’, 지아장커 유니버스의 퍼즐 한 조각! 지아장커의 신작 ‘강호아녀’ 포스터. 이번에도 지아장커의 페르소나이자 실제 아내이기도 한 자오 타오가 주연을 맡았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지아장커의 필모그래피를 잠시 돌아보자. 영화 ‘소요에 맡기다’(2002)에서는 주인공 차오의 남자친구가 강호(江湖)와 관련된 인물이었다. ‘스틸 라이프’(2006)에는 샨샤의 수몰지역으로 소식이 끊어진지 오래된 각자의 배우자를 찾는 남녀가 찾아온다. ‘산하고인’(2015)에서 지아장커는 멜로 드라마에 도전했고 ‘천주정’(2013)에서는 무협영화의 재해석을 시도했다. 지아장커의 전작을 꾸준히 지켜본 관객들에게라면 강호의 주인공이 헤어지고 다시 만나기를 거듭하는, 중국 사회의 변화를 세밀하게 담은 ‘강호아녀’에서 분명 새롭지만 익숙한 기시감을 느낄 것이다. 영화의 주인공 차오(자오 타오)는 ‘스틸 라이프’에서 우리가 모든 사연을 듣지 못했던 셴홍(자오 타오)을 닮았다. 눈 밝은 관객이라면 각각 ‘소요에 맡기다’와 ‘스틸 라이프’에서 자오 타오가 입었던 의상을 다시 입고 등장한 것을 눈치채고, 이를 통해 지아장커 유니버스의 퍼즐 조각을 맞추는 기분이 들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속 ‘강호’의 의미는? 한 발의 총성으로 운명이 달라진 차오, 이 시점 부터 그녀는 진정한 강호의 길에 들어선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영화는 제목부터 필연적으로 ‘강호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으로 출발한다. 어린 시절 지아장커가 은밀히 흠모했던 지역 갱단의 보스에게서 영감을 얻은 빈(리아오판)은 연인 차오에게 강호의 삶이란 ‘죽이지 않으면 죽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자신은 강호의 외부에 있다는 차오에게 권총을 쥐어 주며 너도 이제 강호에 속하게 되었다고 대답한다. 그러나 빈은 틀렸다. ‘강호아녀’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빈은 비겁하고 비루하게 삶을 연명하며 점점 더 고약하고 쇠약한 인물로 변하고, 차오는 그의 배신을 겪으며 더 강하고 단단해 진다. 강호의 본질이 조직 폭력배 사이에서 오가는 암투와 음모가 아니라, 형제애를 바탕으로 하는 의리에 있다면, 이를 삶에서 지켜내는 건 빈이 아닌 차오다. 2008년 개봉했던 영화 ’24시티’ 현장에서 디렉팅을 하고 있는 지아장커의 모습(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강호라는 개념은 홍콩 영화의 황금기를 목격한 이들에겐 낯선 것이 아니다. 지아장커 역시 1980년대 오우삼 영화에서 영감을 받아, 강호에 대한 프로젝트를 구상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미주 유럽 해외 관객에게 ‘강호’를 설명할 수 있는 단어를 좀처럼 찾을 수 없었다고. 결국, 강호의 여인이라는 의미 대신에 Ash is purest white (재는 가장 순수한 흰색이다)가 영어제목이 되었다. 영화 초반, 차오는 멀리 있는 화산을 바라보며 고온의 결과물인 ‘재’야말로 가장 순수한 것이리라고 말한다. 거칠고 투박해진 중년의 차오에게 그녀가 했던 말을 대입하면, 세월을 견뎌내고 변화 속에서도 잃지 않아야 할 것을 지켜낸 차오야말로 가장 순수한 존재가 된 것 같다. 강호의 여인의 시선으로 바라본 중국 사회의 변화! 차오의 시각을 통해 보여지는 중국 사회의 변화. 참고로 위 스틸 이미지 속 차오가 입고 있는 옷은 영화 ‘스틸 라이프’의 셴홍이 입은 옷과 유사하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강호의 진정한 본질과 인물의 변화를 다루기 위해서, 지아장커는 ‘강호아녀’의 서사에 17년이라는 시간을 안배했다. 볼룸댄스가 중국에 도입되던 2000년대 초반 퇴락한 광산 도시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차오의 여행을 따라 여러 도시를 돌면서 중국 사회의 변화 과정을 세밀하게 묘사한다. 약 7,700km을 여행하면서 3개월 간 이어진 촬영으로 중국 소도시의 쇠락과 개발 열풍, 일자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야 하는 소외된 인물들을 화면에 담았다. 화려한 옷을 입고 발랄하게 춤추며 은근히 결혼을 이야기하던 앳된 얼굴의 차오는 후반에 이르면 심술 부리는 빈을 쥐어 박고, 이럴 거면 차라리 죽으라고 외치는 억척스러운 중년 여성이 된다. 그러나 대신 감옥에 간 차오를 배신했던 빈도, 빈을 윽박지르는 차오도 서로 대립하고 반목하는 구도가 아니다. 미워할 대상이 있는 것조차 간혹 살도록 버티는 힘이 된다고 생각하면, 빈은 차오에게 대체 불가의 절대적인 존재이며, 둘의 인연은 끊어버릴 수 없는 운명에 가깝다.    ‘강호아녀’에는 UFO가 등장한다. 지아장커는 일찍이 ‘스틸 라이프’에서도 남녀를 만나게 이어주는 장치로 UFO를 등장시킨 적이 있다. 이번에는 잠깐 다른 인생을 꿈꿨다가 포기하고 기차에서 내린 차오 앞에 캄캄한 하늘을 가로지르는 빛으로 등장한다. UFO의 존재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인간이 이해하거나 짐작할 수 없는 더 거대한 우주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장치다. 차오의 좌절과 절망, 배신과 상처 그리고 우리가 믿거나 갈구하는 이 모든 것들이 우주에서 얼마나 사소하고 하찮은 것인지 일깨워주는 상징이기도 하다. UFO를 본 차오는 삶의 중량을 감당하며 버텨 나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강호를 지키는 주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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