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과 로케이션 담당자가 부산을 방문했고, 해운대 일대와 부산영화의전당을 둘러본 뒤 촬영협조 요청서를 작성했다. 영화 제목은 ‘드라이브 마이 카’, 주연 배우는 니시지마 히데토시. 촬영 날짜는 2020년 봄으로 명시되어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한일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고, 급기야 코로나의 시대가 도래하면서 결국 부산 촬영은 무산되고 말았다. 원래의 계획대로 영화의 배경이 히로시마가 아니라 부산이었다면 ‘드라이브 마이 카’는 어떤 모습으로 완성되었을까. 그럼에도 변함이 없을 거라 믿는 건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이 영화라는 언어를 통해 전하는 마법 같은 감동이었을 터. 3시간에 육박하는 영화의 첫 시동을 걸어본다.
옥미나 | 영화 평론가
영화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배웁니다
하마구치 류스케가 무라카미 하루키, 안톤 체호프를 만났을 때!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젊은 감독이다. 도호쿠 기록 3부작 다큐멘터리를 비롯하여 ‘해피아워’(2015), ‘아사코’(2018) 등을 연출했고 올해에는 ‘우연과 상상’(2021)으로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심사위원대상, ‘드라이브 마이 카’(2021)로 제74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서 각본상을 수상했다. 2010년에는 한국영화아카데미와 도쿄예술대학의 공동제작으로 한국에서 ‘심도’를 연출하기도 했다. 올해 열린 제26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봉준호 감독과의 특별 대담으로 주목을 끌었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세 개의 이야기가 서로의 꼬리를 물고 있는 뱀처럼 얽혀 있는 구성이다. 원작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수록된 동명의 소설. 건강 상의 문제로 직접 운전 하기 어려워진 연극 배우, 그를 대신해서 운전을 맡게 된 무뚝뚝한 20대의 여성 운전 기사. 자동차 안에서 이루어지는 두 사람의 소설 속 대화는 공교롭게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전매 특허에 다름 아니다.
이렇게 하루키의 단편이 서사의 큰 얼개를 형성한다면, 그 안에서 오가는 (그러나 말로는 표현되지 않는) 인물들의 감정, 고민과 갈등은 안톤 체호프가 쓴 ‘바냐 아저씨’의 대사를 통해 표면에 드러난다. 주인공 가후쿠(니시지마 히데토시)가 연극 배우라는 지점에 착안한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영리한 선택인 셈이다.
언어를 능가하는 소통과 교감으로 상실과 위로를 전하다!
연극 대사는 얼핏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것처럼 들리지만, 영화의 흐름을 통해 하나하나 곱씹는 동안 차츰 문장마다 힘이 더해지고, 마침내 미세한 톱니바퀴처럼 서사와 완벽하게 맞물리면서 현재의 진실로 거듭난다. 아내 오토(키리시마 레이카)가 취한 듯 중얼거리는 짝사랑 소년의 집에 침입한 소녀 이야기도 그저 흘러가는 대신, 아내와 내연남의 운명과 그 사이에 은밀히 작동했을 그들의 선택에 대한 실마리를 남긴다.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능숙하게 체호프의 대사를 적시 적소에 활용해서 이 세 가지 이야기를 직조하는 것에서 멈추지 않고, 사람 사이의 소통과 관계에서 언어가 어떻게 기능하고, 동시에 은밀히 누군가를 배제하고 소외시키는지 자세히 들여다본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와 한국어가 뒤섞여 바벨탑을 연상시키는 ‘바냐 아저씨’ 공연에는 새로운 의미의 층위와 그로 인한 기묘한 긴장감이 형성된다. ‘대사를 입에 올리면 기어코 내 자신이 끌려 나오고 마는’ 체호프의 문장을 각자의 언어로 말하다 보면, 어느 순간 무대에는 언어를 능가하는 소통과 교감의 순간이 깃든다. 그리고 목소리와 속도, 억양을 지워낸 소냐의 수화는 마치 간결한 시처럼 단정하게 영화의 주제를 전달한다.
네 탓이 아니라거나, 네 잘못이 아니라고 (최근 각종 매체에서 툭하면 마법 주문처럼 통용되는 바로 그 표현!) 죄책감을 털어내고 서로를 위로하는 대신 가후쿠와 미사키(미우라 토코)는 각자 인생의 시련과 고통을 온전히 자신의 몫으로 떠안기를 선택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인생을 끝까지 성실하게 살아가자는 결연한 다짐에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드라이브 마이 카’의 가후쿠와 미사키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와 소냐로 겹쳐진다. 인생에서 정답이나 위로를 찾으려는 시도는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는 헛된 희망일지 모른다. 오히려 필요한 것은 내 삶의 고통을 이해해주는 누군가,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살아보자는 성실한 용기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