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드 럭 뱅잉>은 작년 개최된 제71회 베를린 영화제에서 최고작품상에 해당하는 황금곰상을 수상했다. 같은 해 홍상수 감독은 <인트로덕션>으로 각본상을,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우연과 상상>으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다. 이 수상작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세 작품 모두 서사의 결말을 향해서 전진하는 대신, 인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분절된 단편들을 병렬로 배치하고 그사이를 선회하면서 점차 다른 차원과 층위를 드러내는 구조를 선택했다는 것. 베를린 영화제가 서사나 스타일이 아니라 영화의 형식을 탐구하고 영화의 영역과 범위를 확장하는데 골몰하는 감독들에게 애정과 지지를 선언했던 셈이다.
옥미나 | 영화 평론가
영화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배웁니다
강렬한 도입부, 가장 현실적인 주제
일기장을 상상해보자. 차마 남들 앞에서는 입 밖으로 내지 못했던 음험한 생각들과 못난 마음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일기가 남의 손에 들어가 만천하에 공개된다면? 그래도 일기라는 형식을 깨닫는 순간 누구든 내용에 대해 왈가왈부하기 전에, 어떤 경로로 누가 일기장을 손에 넣었는지, 왜 지금 이것이 유출됐는지, 자의가 아니라 누군가 악의적인 의도로 공개했다면 그 일기를 정말 읽어도 되는지, 행여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읽었더라도 남들에게 내가 그 일기를 읽었다고 자신 있게 말해도 될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그것이 타인의 사생활에 대한 우리의 일반 상식이기 때문이다.
왜 애초에 일기를 작성했냐고 혀를 찰 사람은 없을 것이다. 도대체 어디 보관했던 것이냐고 힐난하는 이는 있을 수도 있다. 그래도 보관의 경솔함과 방심은 실수의 범주에 해당될망정 비난의 대상이 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제 일기장이라는 단어를 ‘부부의 섹스 비디오’로 바꿔서 문단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자. 무엇이 달라졌나?
이야기의 발단이 된 사건은 고등학교 교사인 에미의 섹스 비디오 유출이다. 라두 주데 감독은 바로 그 비디오 영상을 영화의 도입부로 삼는다. 집요하게 신체 특정 부위를 강조하는 카메라와 음란하고 민망한 대화가 오고 가는 날 것 그대로의 부부 영상이 다짜고짜 스크린에 펼쳐지는 것. 사정이 이렇다 보니 영화는 베를린 영화제에 상영된 ‘무삭제판’과 ‘극장 개봉판’ 두 가지 버전으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라두 주데 감독은 극장 개봉을 위해 해당 장면을 삭제하거나, 화면 일부를 흐리게 처리하는 대신 ‘검열은 돈이다’라는 문장으로 선정적인 화면을 가린다. 도입부 장면의 충격이 가라앉았다면, 이제 시작부터 외설과 구호를 천연덕스럽게 오가는 영화의 속내를 들여다볼 차례다.
이야기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우리 사회의 문제점이 보인다
영화는 몇 개의 챕터로 구분된다. 발랄한 음악으로 소개되는 각각의 챕터에는 <일방통행>, <일화, 기호, 경이에 대한 소사전>, <실천과 빈정거림(시트콤)>, <세 가지 가능한 결말>이라는 소제목이 붙었다. 첫 번째 챕터에 해당하는 <일방통행>은 내내 거리를 걸어가는 에미를 뒤따르는 관찰 다큐멘터리다. 어디로 가는지, 왜 걷고 있는지도 설명하지 않고 에미는 부쿠레슈티 거리를 걷고 또 걷는다. 그동안 카메라는 에미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마치 ‘마음 내키는 곳에 멋대로 드러눕는 개처럼’ 사방을 둘러보고 어떤 풍경을 응시하고, 에미를 아주 놓쳤다가 길모퉁이에서 다시 따라잡기를 거듭한다. 그렇게 에미의 동선을 묵묵히 따르다 보면, 도시의 표면을 선으로 연결한 길에서 도시의 현재와 과거가 함께 공존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도시는 기억의 수단이며, 산책하는 자는 기억한다. 카메라의 시선이 닿은 공간들은 그 이미지 속에 내포된 역사를 드러낸다. 에미가 도시 산책자라는 사실을 포착하는 순간, 비로소 <일방통행>이라는 소제목은 발터 벤야민의 <일방통행로>와 겹쳐진다.
<일화, 기호, 경이에 대한 소사전>에 이르면 라두 주데 감독의 의도는 보다 선명해진다. 몽타주 형식의 비디오 에세이에 해당하는 이 챕터는 벤야민, 하이데거, 브레히트, 부르디외, 시오랑 등 다양한 철학자와 사상가들의 인용문을 직관적인 이미지들과 병치시킨다. 얼핏 무작위적으로 느껴지는 다양한 주제와 문구들은 루마니아 현대사의 순간들을 재해석할 것을 요구하고, 소비주의 사회를 풍자하며, 지식인들의 위선을 거침없이 비웃는다.
마침내 <실천과 빈정거림(시트콤)>에 이르면 <배드 럭 뱅잉>의 전체적인 구조가 드러난다. 영화의 도입부, 다짜고짜 섹스 비디오 영상을 배치한 것은 짓궂은 감독의 위악이나 장르에 대한 선언이 아니라, 변증법적 구조를 완성하기 위한 포석이었던 것. 앞서 섹스 비디오 영상을 관람했던 관객들은 3번째 챕터 <실천과 빈정거림>에 이르면 학부모들과 동일한 위치에 나란히 놓이게 된다. 영상을 보는 동안 떠올리거나 상상했을 모든 것들 – 도덕, 외설, 사생활의 범위, 교육자의 의무와 윤리, 문화와 역사, 종교, 여성, 정치, 혐오와 차별, 폭력, 과학과 디지털의 미래까지. 막연한 불안과 공포에서 출발한 분노는 다양한 소재를 넘나들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이들은 마침 그들이 섹스 비디오의 주인공이 아니라 관객이라서 정당한 도덕적 우위를 점하기라도 한 것처럼 목소리 높여 분주하게 각자 판정을 내린다.
<배드 럭 뱅잉>의 이야기는 섹스 비디오의 유출로 출발하지만, 라두 주데 감독은 이야기 자체가 아니라, 그 이야기의 이면에 무엇이 있는지를 질문한다. 이 사건이 어떻게 다른 사건과 연결되고, 다른 가치와 충돌하면서 우리 사회의 문제를 드러내는가, 그리고 현대 사회의 문제들이 내포하고 있는 역사 속의 인과 관계는 무엇인가. 아울러 우리는 영화를 통해서 표면 아래 숨겨진 것들, 더 심오한 것들을 읽어낼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바로, 라두 주데 감독의 이름을 기억해야 할 이유다.
- <배드 럭 뱅잉>은 제7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황금곰상을 수상하는 등 유수의 영화제에서 작품성을 인정받았다.
- 코로나 시국을 반영해 스태프는 물론 영화 속 등장인물 모두가 마스크를 쓴 채 연기했다.
- 오는 7월 28일 개봉해 CGV 아트하우스 상영관 등 전국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