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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코로나19의 여파가 계속되면서 극장가는 힘든 여정을 이어왔다. 이런 와중에도 소중하고 빛나는 영화들이 관객들을 만나면서 누군가에는 소중한 행복을, 누군가에게는 잊지 못할 추억을 안겨줬다. 여전히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경험이 유효하다는 것을 증명한 2021년, 영화 보는 게 일인 세 명의 큐레이터 또한 느꼈을 터. 그들이 각자 뽑은 국내외 최고의 영화는 무엇인지 물어봤다. 2021년 국내 영화 PICK! ‘당신 얼굴 앞에서’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객석에 앉아 영화를 보고 있으면서도, 벌써부터 처음부터 다시 보고 싶은 영화가 가끔 있다. 그런가하면 첫 관람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 엉뚱하게도 다시는 보지 말아야겠다 은밀하게 다짐하게 되는 영화도 간혹 있다. 그날 내 기분과 날씨, 습도 같은 것들이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르고 어쩌면 내 오해와 착각이 영화의 느낌을 증폭시켰을지 모른다고 스스로 의심하게 되는 –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좋을 수가 있나, 싶은 영화들. 영화 ‘당신 얼굴 앞에서’는 처음부터 극장에서 다시 봐야겠다, 생각했다가 ‘소설’의 술집 장면에 이르러 마음을 고쳐먹었다. 다시는 보지 말아야겠다. 평론가라는 직업윤리에는 분명 위배 되는 일이겠지만, 이 영화가 불러일으킨 마음의 파동은 논리적이고 단정한 문장으로 정리하는 대신 물음표와 느낌표가 뒤섞인 첫인상 그대로 남겨 놓고 싶었다. 어째서 아무것도 모르면서 나무가 흔들리는 장면에서 이미 눈물이 핑 돌았는지, 이혜영 배우가 얼굴을 쓸어내릴 때는 나도 함께 나직하게 한숨을 쉬게 되었는지, 언제부터 영화가 나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말을 건네는 느낌이 들었는지. 상옥(이혜영)은 기도한다. ‘과거도 없고 내일도 없고, 이 순간만이 천국입니다’ 그 나직한 목소리를 길잡이로 삼아 상옥의 짧은 여행을 곱씹으면 그녀가 마주치는 현재의 모든 순간은 과거의 흔적이고, 대화는 내 것으로 기약할 수 없는 미래의 순간을 장담할 뿐이다. 당신 얼굴 앞에 있는 – 온전한 현재의 이 순간은 어떤 것일까. 홍상수 감독의 영화에서 처음으로 ‘죽음’을 감지한 것은 ‘밤의 해변에서 혼자’였고, ‘강변호텔’에서는 기어코 기주봉 배우가 쓰러졌다. 마치 ‘당신 자신과 당신의 것’에서 사람이 사랑을 사랑하는 방식에 대해 새롭게 탐구할 것을 요구했던 것처럼, ‘당신 얼굴 앞에서’는 ‘죽음’을 지렛대로 삼아 살아있다는 것, 현재의 순간들이 어떤 것인지를 우리 인식의 표면으로 끌어 올린다. 그리고는 곁에 나란히 앉아 속삭인다. 무슨 꿈을 꾸니. 2021년 해외 영화 PICK! ‘드라이브 마이 카’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 ‘드라이브 마이 카’에 안톤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유려하게 직조해낸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실력이 놀랍다. 노동의 가치를 설파하고, 현세의 고통을 참고 인내하면 천국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1897년의 세계관과 종교관이 2021년에도 유효하게 마음을 울릴 수 있다는 사실이 믿기 어려울 정도다. 소위 ‘힐링’과 ‘네 잘못이 아니다’ 라는 만사형통의 마법 문구가 현대의 개인주의적인 삶을 기반으로 자급자족식 치유와 구원을 소비하는 방식이라면, 삶의 고통과 비극을 자기 몫의 인생의 무게로 인식하고, 죽는 그 날까지 성실하게 살아가자고 말을 건네는 – 똑같이 고통스러운 삶을 감내하고 있는 주변의 목소리는 인간의 삶과 각자의 고통에 대한 연대의 감각을 일깨운다. 가호쿠(니시지마 히데토시)와 미사키(미우라 토코)가 바냐 아저씨와 소냐로 겹쳐지는 순간, 러시아의 고전은 스크린 위에 훌륭하게 되살아나 관객들의 마음을 울린다. 안톤 체호프가 하마구치 류스케를 만난다면 분명 그를 끌어안고 수염을 부비며 뜨겁게 키스해줄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한 걸음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다가, 나중에 체호프와 정중하게 예의 바른 악수를 나누지 않을까. 2021년 국내 영화 PICK! ‘휴가’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우리 모두의 노동은 신성하다. 노동은 나의 존재 가치를 되새길 수 있는 기회이며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모든 필요 자원을 공급할 수 있는 도구이다. 그런 노동의 가치가 고용주에 의해 강압적으로 훼손되었을 때 과연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영화 ‘휴가’는 그 가치를 지키기 위한 노동자들의 투쟁 과정을 담아낸다. 단, 이 작품의 관심은 투쟁의 순간이 아닌 그 이후의 ‘포스트-투쟁’ 과정에 집중되어 있다. 복직을 위해 제기했던 소송은 결국 패소하고 함께 투쟁하던 동지들도 곁을 떠난 상황. 남아 있는 세 명의 노동자들은 잠시 휴가를 갖기로 한다. 재복(이봉하)도 휴가를 맞아 집으로 돌아가지만 지난한 투쟁 과정 동안 돌보지 못했던 가정은 힘든 위기 속에 놓여 있다. 자신의 존엄을 되찾기 위한 노력이 가장 소중한 가치들을 희생해야 얻을 수 있는 현실이라면, 우리는 결국 영원히 존엄성을 지닐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이란희 감독은 그럼에도 불구하게 한 노동자로서 존재가치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얼마나 숭고한 행위인지를 역설한다. 2020년 서울독립영화제에서 대상, 독불장군상, 독립스타상을 수상했다. 수상의 결과가 작품성을 보장한다 말할 수 없지만 ‘휴가’ 만큼은 충분히 근거 있는 결과였다. 이 땅 위의 모든 노동자라면 반드시 필(必)시청 해야 하는 영화다. 2021 해외 영화 PICK! ‘아네트’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홀리 모터스’를 통해서 배우의 얼굴과 신체, 역할에 대해서 논의 했던 레오스 카락스가 이번에는 영화의 스펙터클과 장르, 배우와 사건이 결합해 만들어내는 영화적 서사성에 대해 논의한다. ‘아네트’의 장르는 형식적으로 뮤지컬이지만 내용면에서는 미스테리 스릴러이며 그 기원은 그리스 비극으로부터 출발한다. 1920년 미국의 경제공황 시절, 뮤지컬 장르는 지리멸렬한 현실로부터 관객들이 도피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잠시라도 환상 속에 잠겨 폭신한 깃털을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 절대 현실에서는 느낄 수 없는 황홀경을 제공하며 관객들을 영화적 세계 속으로 이끌었다. 반면 ‘쉘부르의 우산’으로 대표되는 프랑스 뮤지컬은 환상이 아닌 일상을 노래하며 관객들에게 지극히 현실적인 감정들을 증폭시켜 전달했다. 레오스 카락스는 이러한 두 가지 경향의 뮤지컬 특성 경계에 서서 인간의 탐욕과 질투, 파괴적 욕망을 노래하기 위해 이 형식을 활용한다. 스탠드업 코미디언 헨리(아담 드라이버)와 오페라 가수 안(마리옹 꼬띠아르)은 세간의 화제를 낳으며 연인이 되었고 결혼해 가정을 이룬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헨리의 인기는 시들해지는 반면 안의 인기는 날로 치솟자 둘의 관계에 균열이 생긴다. 결국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떠났던 여행은 파국으로 변하고 안이 세상을 떠난다. 아내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헨리에게 제기되는 상황. 헨리는 자신의 범행을 감추기 위해 또 다른 범행들을 이어간다. 레오스 카락스는 헨리의 심리 변화를 통해서 인간의 부정적 심연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그의 얼굴이 결국 우리 모두의 얼굴이 될 수 있음을 각인 시킨다. 2021년 국내 영화 PICK! ‘갈매기’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세속의 논리에 가리워진 사람들의 삶에 가능한 구체적인 감정과 형태를 부여하는 것이 문학의 일이라고 배웠다. ‘갈매기’의 시나리오는 영화 이전의 문학적 성취로서 그것을 해낸다. 주인공 오복(정애화)은 장년 여성, 생선 파는 상인, 결혼을 앞둔 딸의 엄마다. 성폭행 피해자에게 ‘피해자다움’을 따지려드는 사회가 거론할 만한 악조건을 두루 품은 이 영화는 그 척박한 영토를 뻔히 알고서도 홀로 걸어 나간다. 미투 시대 영화의 뉴웨이브 속에서도 자못 외롭고 담대한 선택이다. 작품 전반을 일관된 미학으로 아우르는 장악력은 다소 투박하지만 그 안에서 펄떡이는 처절하게 인간다운 것들이 숭고함을 묻는다. 내면의 혼란과 상처를 그리는 세심한 시선, 외부의 폭력을 묘사하는 카메라맨으로서의 윤리가 절묘한 균형을 이루며 통속적인 일상을 포용하는 대사 또한 생생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갈매기’의 주목할 만한 성취는 성실한 재현에 그치지 않고 현실에 물러서지 않는 영화적 결기를 지켜낸다는 데에 있다. 생선을 내리치던 인물의 칼끝은 끝내 폭력을 저항하는 투쟁과 고백으로 향한다. 땅에 두 발을 딛고 홀로 선 오복의 마지막 이미지는 분열과 혐오 속에서 페미니즘의 현실 담론이 끊임없이 위협받는 이 때에 더 열렬히 논의될 필요가 있다. 연극무대에서 쌓은 경륜을 오롯이 펼친 배우 정애화 또한 기억할 것. 2021년 해외 영화 PICK! ‘스파이의 아내’ 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구로사와 기요시의 첫 역사영화이자 전쟁 영화인 ‘스파이의 아내’는 거장의 고약한 농담 또는 절실한 자기고백 같다. 첫 해외 로케이션 촬영작이었던 전작 ‘지구의 끝까지’에서 우즈베키스탄의 낯설고 광활한 사막 지대를 부유했던 기요시의 카메라는 이 영화에서 제2차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고베의 어느 저택 속으로 회귀한다. 구로사와 기요시의 인장을 펼치기에 더없이 적절한, 밀도높은 실내극 셋팅 아래서 피어오르는 건 자신을 속인 남편을 끝까지 사랑하기로 한 여자 사토코(아오이 유우)의 기묘한 여정이다. 스파이로 의심되는 남자와 그의 정체를 골몰하는 여자 사이에 놓인 진실의 복잡한 레이어. 구로사와 기요시는 영화 속의 영화로 그 모호한 지대를 파고든다. 영화 만들기와 영화 보기라는 행위, 그리고 초기영화의 환각적 이미지를 교직해 감정을 조직하는 노련한 능력이 가히 경탄스러울 정도. 스릴러, 호러, 서스펜스의 거장으로 자주 호명되지만 ‘스파이의 아내’는 구로사와 기요시가 오래 전부터 일본 멜로드라마의 중요한 작가였다는 사실 또한 상기시킨다. TV드라마를 의식한 촬영구도와 편집, 리듬감이 선명함에도 구로사와 기요시만의 엄격한 숏이 여전히 불가사의한 마력을 발휘한다는 점도 놀랍다. 한편 남편인 유사쿠(타카하시 잇세이)를 통해 생체 실험을 자행한 731 부대의 만행을 알고 자신의 삶을 기꺼이 스파이의 아내로서 재편하려는 사토코는 영화 ‘산책하는 침략자’에서 남편이 외계인인 줄 알면서도 사랑하는 나루미(나가사와 마사미)를 연상시킨다. ‘산책하는 침략자’, ‘지구의 끝까지’, ‘스파이의 아내’로 묶어보는 구로사와 기요시 영화 속 여성 캐릭터의 흐름 또한 흥미로운 요소라 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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