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리아’라는 이름의 인물을 등장시킨 세 편의 영화가 있다. 1980년 뉴욕의 <글로리아>, 2013년 산티아고의 <글로리아>, 2018년 LA의 <글로리아 벨>이 그것이다. 1980년의 글로리아와 2013년의 글로리아는 전혀 다르지만 서로 통하는 바가 있고, 2018년의 글로리아는 2013년의 글로리아를 원형으로 하면서도 일련의 변화를 겪었다. 세 편의 영화가 ‘글로리아’라는 주인공을 통해 관객에게 전하는 삶의 감각은 무엇일까?
부르고 싶은 이름, 글로리아!
글로리아는 영화가 특별히 사랑하는 이름이다. 1980년 미국의 존 카사베츠는 기존의 전형에서 벗어난 최초의 할리우드 여성 캐릭터를 ‘글로리아’라고 불렀다. 2013년에는 세바스찬 렐리오 감독이 칠레 산티아고에 사는 중년 여성 ‘글로리아’로 불러냈고, 그는 2019년 미국 LA 를 배경으로 또 다른 ‘글로리아’를 탄생시켰다. 다채로운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줄리안 무어의 투명하고도 강렬한 얼굴로.
1980년, 미국의 감독 존 카사베츠는 글로리아라는 이름의 여성을 주연으로 한 누아르 장르의 영화 <글로리아>를 만들었다. 이 작품에서 지나 롤랜즈가 연기한 이 여성은 가족이 몰살당하고 남은 이웃집 소년을 지키기 위해 자신과 연루된 마피아와 한판 대결을 벌인다. 그는 남성의 도움을 받지도 남성의 모습을 모방하지도 않고, 진한 언더 아이라인을 그린 채 자신을 구속하는 적에게 거침없이 총구를 겨눈다.
그러면서 ‘글로리아’는 성녀 아니면 악녀라는 기존의 전형에서 벗어나 최초의 할리우드 여성 캐릭터 이름이 된다. 이 작품은 1999년 시드니 루멧에 의해 샤론 스톤이 주연을 맡은 동명의 작품으로 리메이크되었고, 뤽 베송의 <레옹>(1994), 왕가위의 <중경삼림>(1994), 박찬욱의 <친절한 금자씨>(2005) 등 많은 영화에 영향을 주었다.
존재의 의미를 찾아 나서는 산티아고의 <글로리아>
2013년, 칠레의 감독 세바스찬 렐리오가 또 다른 글로리아를 스크린에 비추었다. 칠레 산티아고에 사는 글로리아 벨. 그는 이혼한지 십여 년이 지난 50대 후반의, 보험회사에 다니는 싱글 여성이다. 그의 성인 자녀들은 각자의 삶을 사느라 어머니에게 무관심하고, 그의 아파트를 찾는 건 신경 쇠약의 위층 남자가 늦은 밤 내지르는 소음과 초대한 적 없는 못생긴 고양이뿐이다.
중년의 평범한 삶을 사는 글로리아는 30여 년 전 할리우드 장르 영화 속의 카리스마 넘치는 인물과는 무관해 보인다. 하지만 마피아 남성들에게 총을 겨누던 글로리아와 마찬가지로, 남성적 시선으로는 비출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글로리아는 마치 투명 인간이 되어가는 듯한 일상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기 위해 애쓴다. 퇴근 후 중년 싱글들이 모이는 클럽에서 춤을 추고, 운전 중 라디오에서 나오는 옛 가요를 목청 높여 따라 부르며, 웃음 치료 클래스에 참석한다. 그리고 클럽에서 만난 한 남성과 연애를 하게 되면서 감정의 동요와 생각의 변화를 겪게 된다. 영화는 자신을 찾아가는 글로리아의 모습을 그려낸다.
어머니의 삶으로부터 영감을 받은 감독은 존경과 애정 어린 시선으로 글로리아를 비추었고, 이 인물에게 발생하는 감정의 스펙트럼을 탁월하게 표현한 배우 폴리나 가르시아는 제63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여자연기자상)을 받았다.
세바스찬 렐리오가 표현한 또 다른 글로리아? LA의 <글로리아 벨>
5년 후, 세바스찬 렐리오의 <글로리아>가 할리우드에서 <글로리아 벨>로 리메이크되었다. 이 리메이크작의 연출은 독특하게도 세바스찬 렐리오가 맡았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이 오스트리아에서 만든 <퍼니 게임>(1997)을 10년 후 할리우드에서 직접 리메이크한 바 있지만, 이는 극히 드문 경우다. 원작자의 리메이크 연출을 성사시킨 이는 바로 글로리아 역을 맡은 독보적인 배우, 줄리안 무어였다. 원작을 굉장히 좋아했던 줄리안 무어는 남미 도시와 비슷한 에너지를 지닌 LA를 영화의 배경으로 제안하며 제작 과정에도 직접 참여했다.
산티아고에서 LA로 배경이 바뀌고 5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글로리아 벨>에는 원작과 다른 약간의 변화가 새겨졌다. 먼저 글로리아는 전보다 더 활기 있어 보이는데, 이는 줄리안 무어의 얼굴이 주는 느낌이기도 하겠지만, 그의 곁을 지키는 친구들 덕분이기도 하다.
자유로운 삶을 찾아가는 글로리아
<글로리아 벨>에서는 화제가 바뀌면서 영화의 주제가 보다 명확해졌다. 과거 칠레 피노체트 독재정권을 겪은 <글로리아>의 ‘글로리아’는 정치에 관심을 쏟았다면, <글로리아 벨>의 ‘글로리아’는 보다 인간 존재에 대해 집중한다. 이를 통해 감독은 나이 듦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던지기도 했다. 즉, ‘젊음’과 ‘늙음’이라는 상태를 신체가 아닌 태도의 문제로 볼 수 있을까 화두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글로리아 벨>의 글로리아는 나날이 약해지는 시력 앞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고, 확신했던 사랑마저도 쉬이 흘러가지 않는다. 하지만 “엄마, 우리도 내일 죽을지 몰라.” 라는 딸 앤(카렌 피스토리우스)의 말처럼, 글로리아는 주어진 상황들에 굴하지 않고 맞서는 용기를 내본다. 내 인생의 행복을 스스로 찾아 나서겠다는 글로리아의 마음가짐 자체가 그녀의 춤사위 속에 녹아 든다.
이때 흘러나오는 팝송 ‘글로리아’ 또한 사랑스럽다. 1980년대를 풍미한 이 추억의 팝송에서 로라 브래니건의 단단한 목소리가 글로리아라는 이름을 지긋이 부른다. 마치 주인공 글로리아에게 느긋해지라고 속삭이듯이 말이다. 글로리아도 자신의 이름을 불러본다. 결국 글로리아는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고 자신의 삶을 찾으려 하는, 아름다운 사람의 이름인 것이다.
‘글로리아’를 주인공으로 한 세 편의 영화들. 이 작품들이 그려낸 ‘글로리아’는 서로 다른 모습을 하고 있지만, 삶에 대한 어떤 공통된 생각을 이끌어내는 듯하다. 나를 억압하는 것들에 맞서면서 현재의 나에게 집중하는 삶이야 말로 자신의 이름을 지켜내는 인생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