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주 출신의 빌보드·그래미 스타 스토리를 한국계 감독이 영화로 만들었다? 가수 헬렌 레디가 자신의 히트곡으로 당대 여성들의 마음 속 불씨를 지핀 것만큼이나 품이 넓고 강력한 크로스 오버 프로젝트인 영화의 제목은 ‘아이 엠 우먼’이다. 이 작품은 1970년대를 대표하는 여성 보컬이자 당대 성평등 운동의 테마송 ‘아이 엠 우먼’으로 각인된 주인공 헬렌 레디의 역경과 성공 신화를 좇는 전기 드라마이자 음악 영화다. 문은주 감독은 시종 차분하면서도 생동감 있게 과거의 디바를 재현함으로써, 지금의 젊은 세대가 복기하고 연대할 중요한 목소리를 되살려내는 작업에 성공했다. 제44회 토론토국제영화제 오프닝 나이트 개막작으로 소개된 ‘아이 엠 우먼’의 찬란한 여정을 소개한다.
김소미 |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제각기 고유하고 무모한, 영화의 틈새가 궁금하다
‘I Am Woman’, 최초의 여자들
“여가수는 방송에 못 나가요.” 1966년 뉴욕. 호주에서 날아와 머큐리 레코드의 문을 두드린 싱글맘 헬렌(틸다 코브햄-허비)에게 별안간 맥이 쭉 빠지는 말부터 날아온다. 음반사 프로듀서가 헬렌의 데뷔보다 관심을 가지는 건 그녀의 이혼 사유다. “남편이 생일 선물을 안 챙겨줘서 이혼했나요?”
영화 ‘아이 엠 우먼’의 초반부는 1960년대 서구 문화의 중심지였던 미국 뉴욕 한복판에서 공공연히 떠도는 여성 혐오의 일상어를 들려주며 시작한다. 남자들의 호쾌한 로큰롤이 아니라는 이유로, 여성이 부르고 여성에게 사랑받는 음악은 대관절 취급 받지 못하던 시절. 불법 이민자 신세로 지하 클럽의 보컬로 취직한 헬렌은, 밴드 단원들보다 눈에 띄게 적은 보수에 항의해보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남자들은 부양 가족이 있으니 더 많이 주어야 한다”는 궤변이다.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딸과 함께 암담하기만 한 헬렌의 뉴욕 생활은, 저명한 음악 저널리스트 릴리언 록슨(다니엘 맥도널드)과의 연대를 통해 뜻밖의 빛으로 나아간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헬렌 레디의 대표곡 ‘I Am Woman’은 그녀가 직접 작사, 작곡에 참여해 1972년 발표와 동시에 음원 차트를 정복한 대중음악사의 전설적인 명곡이다. 헬렌 레디가 가난한 싱글맘에서 엔터테인먼트 산업의 영광과 고통을 모두 떠안은 스타가 되기까지 약 30년에 걸친 긴 시간을 명쾌하게 훑는 ‘아이 엠 우먼’에는 격동의 도약을 일궈낸 1970년대 여성 운동사가 녹아 들어있다.
그녀는 여성 투표권 부여 50주년을 맞아 5번가 거리를 행진하는 2만 5천명의 여성들을 보면서 희망을 얻고, 훗날 여성 최초로 로큰롤 사전을 쓴 기자로 불리게 된 동료 릴리언으로부터 값진 격려를 받으며 성장한다. 남자들의 장르인 로큰롤을 탐구하면서 갈증을 느꼈던 릴리언과 가수로서 직접 차별을 경험한 헬렌은 곧 ”여자들은 어떤 음악을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개척의 역사를 쓴 셈이다. 비로소 자기 목소리와 자유를 체감하기 시작한 여성의 내면적 깨달음을 담은 곡 ‘아이 엠 우먼’은 이처럼 헬렌 자신의 뼈아픈 경험과 주변의 유능한 여성들, 그리고 강력한 시대의 조류 속에서 숙명적으로 탄생했다.
영화는 올리비아 뉴튼 존, 앤 머레이와 함께 70년대 3대 디바로 불렸고, 미국 여성 최초로 자신의 이름으로 신용카드를 만든 여성으로 등극한 헬렌의 삶을 개인과 사회의 관점에서 침착하게 병렬해 나간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 그녀를 있게 한 수많은 ‘최초의 여자들’을 새겨 넣는다. 20세기 초 참정권을 위해 폭력 투쟁도 불사했던 과거의 여성들, 1970년대 페미니즘 운동의 불길을 주도했던 새로운 세대의 여성들, 헬렌 자신과 주변의 유능한 동료들, 그리고 미래의 바통을 이어받을 헬렌의 딸까지. ‘아이 엠 우먼’은 영화 안팎으로 이름없는 영웅들이 수놓아지는 과정에서 비로소 충만해진다.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문은주 감독의 스토리
한국계 호주인 문은주 감독은 촬영 감독인 남편 비브 디온과 함께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시상식에 참석했다가 실제로 헬렌 레디를 만난다. 호주 출신 가수 중 대중음악계에서 가장 큰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받는 헬렌 레디를 문은주 감독이라고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을 터. 감독은 자기 어머니 세대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헬렌 레디와 대화를 나누며 윗세대는 물론, 자신과 미래 세대까지 아우르는 헬렌 레디의 아이코닉한 힘과 영감을 발견하고 영화화를 결심하기에 이른다.
“무시하기에는 우린 너무 커졌지. 모르는 척 살기에는 너무 많은 걸 알게 됐어. 이제 지혜를 얻었네. 지혜는 고통의 산물. 큰 대가를 치렀지만 엄청난 것을 얻었네. 나는 뭐든 할 수 있어. 나는 강해. 나는 꺾이지 않아. 나는 여자”라는 가사가 드라마틱한 무대 위의 퍼포먼스로 재현되는 순간, 문은주 감독이 헬렌 레디의 인생사를 들으며 느꼈던 희열은 관객에게도 어렵지 않게 체감된다.
한편 문은주 감독이 영화 제작에 있어 가장 공들인 부분은 실존 인물의 긴 세월을 모두 소화해 줄 배우의 캐스팅이었다. ‘아이 엠 우먼’으로 한국 관객에게 각인될 틸다 코브햄-허비는 25세의 나이에 헬렌 레디의 20대와 40대를 모두 소화하면서 나이답지 않은 성숙하고 안정적인 존재감을 빛낸다. 어깨에 닿는 층진 머리, 조금 수줍은 듯 부드러운 미소, 곧고 흔들림 없는 무대 위의 자태를 재현한 그녀의 명연기를 보고 있으면 2020년 9월에 세상을 떠난 헬렌 레디가 삶의 마지막 무렵에 자신의 전기 영화를 제법 흡족해했으리란 추측을 더하고 싶어진다.
담백한 진정성의 미덕
전기영화로서 ‘아이 엠 우먼’의 미덕은 섣불리 동요하지 않음에 있다. 수난과 역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인물의 삶을 묘사하는 영화가 자주 빠지기 쉬운 함정이 센티멘털한 어조로 인물을 비련하게 바라보거나 영웅화하는 것이다. ‘아이 엠 우먼’은 놀라우리만치 침착하게, 한 개인이 자기 앞의 역경을 통과하는 과정을 유유히 비추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저 그런 지하 클럽에서 공연할 때나 눈부신 라스베가스 무대를 휘어잡을 때나 카메라는 동등한 무게로 헬렌의 노래를 주의 깊게 듣고 그 아름다움과 의미를 전달하려 애쓴다.
그 가운데 이 영화가 성취하는 것은 (비록 이 단어가 조금 오염되었을 지는 몰라도) 진정성이다. 당대를 지배했던 가부장적 질서에 부서지지 않았던 한 사람. 그러나 스스로 영웅이나 상징이 되려 애써 욕망한 적은 없었던 한 사람. 주인공 헬렌 레디와 닮은 담백한 태도가 장점인 ‘아이 엠 우먼’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보내는 여성들의 메아리에 기꺼이 화답하고 싶게 만든다.
올해도 어김없이 3월 8일 ‘세계 여성의 날’이 돌아온다. ‘아이 엠 우먼’을 본 관객들이라면, 이 날을 더 기억하고, 전보다 거리의 풍경에 더욱 민감해질 것 같다. 어디선가 헬렌 레디의 목소리가 들려오지는 않는지 귀를 열고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