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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몇 년간 미국 영화계가 인종 차별 문제에 이어 젠더 이슈에 집중했다면, 최근 그들이 주목하고 있는 것은 난민과 이민자들을 포함하는 디아스포라의 정서인 것 같다. 연이어 다양한 수상 소식을 전하고 있는 정이삭 감독의 영화 ‘미나리’뿐 아니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페어웰’ 역시 미국 이민을 선택한 아시아 가족들을 주인공으로 문화와 정체성의 문제를 함께 다룬다. 제78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뮤지컬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 최우수작품상을 비롯하여 전 세계 33관왕을 기록한 룰루 왕 감독의 신작 ‘페어웰’을 만나보자. 옥미나 | 영화 평론가 영화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배웁니다 실제 거짓말에 기반한 이야기? 전 세계 33관왕 157개 노미네이트에 빛나는 2월 4일 국내 개봉작 ‘페어웰’ 포스터(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뉴욕에 살고 있는 빌리(아콰피나)는 부모님으로부터 중국에 있는 할머니(자오 슈젠)가 폐암 말기라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그러나 가족들은 이미 그 사실을 할머니에게 비밀로 하기로 결정한 다음이다.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던 가족들은 ‘가짜 결혼식’ 이라는 엉터리 핑계로 할머니를 만나러 가는데, 부모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와 각별한 사이인 빌리는 중국행을 결심한다. 영화 줄거리에 영감을 주었다는 ‘실제 거짓말’의 정체가 드러나는 부분이다. 감독의 자전적 이야기가 반영되었으나 ‘실제 이야기’ 라고 쓰는 대신 ‘실제 거짓말’ 이라고 밝힌 처음부터 룰루 왕 감독의 재치가 돋보인다. 룰루 왕 감독은 2016년 This American Life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본인이 직접 쓴 이야기를 낭독했다. 제목은 ‘What You Don’t Know (당신이 알지 못하는 것)’. 라디오에서 이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은 이들 중에는 크리스 웨이츠도 있었다. 그는 ‘어바웃 어 보이’, ‘뉴 문’ 등의 감독이자 ‘개미’, ‘로그 원: 스타워즈 스토리’등의 각본을 쓴 작가 겸 제작자인 탓에 ‘페어웰’이 가진 가능성을 즉시 눈치챘다. 이후 초기 투자금을 확보하면서 프로젝트를 장편 영화로 개발할 수 있도록 룰루 왕을 도왔다. 이듬해 선댄스 영화제의 지원 프로그램에 선정되면서, 마침내 룰루 왕의 두 번째 작품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미국과 중국 그 사이에서 극중 할머니를 위해 준비한 가짜 결혼식 장면. 애초에 가짜 결혼을 하는 이는 빌리의 사촌이 아닌 빌리였을 수도 있었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페어웰’은 미국과 중국이 합작한 첫 번째 독립영화다. 그래서 마치 ‘페어웰’의 주인공 빌리가 중국의 전통적 가치와 미국식 사고방식 사이에 놓여 있었던 것처럼, 제작 단계에서 미국과 중국 제작진 간의 다양한 주장과 충돌을 겼어야 했다. 미국측 제작자들은 복잡한 감정을 품고 있는 현재의 시나리오가 아니라, 실수 연발의 코미디 장르를 요구했다. 반면 중국 제작자들은 빌리가 이미 너무 서구화된 캐릭터라는 것에 불만을 표시했다. 가짜 결혼을 하는 것도 빌리의 사촌이 아니라 빌리 본인이어야 하며, 결혼 상대는 백인 남자여야 한다는 요구가 있었는가 하면, 오랜만에 중국을 방문한 가족들이 중국 명소를 함께 여행하자는 아이디어까지 나왔다고. 룰루 왕 감독은 제작 과정 내내 ‘스토리 노트’ 외에 ‘문화적 차이 노트’를 하나 더 정리하면서 미국과 중국의 다른 영화관 사이에서 균형을 유지하려고 노력했고, 본인과 자신의 가족들이 투영된 인물들을 나침반 삼아 작업을 진행해 나갔다. 영화 촬영 내외적으로 조력자 역할을 담당했던 이모할머니 홍 루(사진 속 아콰피나 오른쪽에 앉아있다.)는 실제 룰루 왕의 이모할머니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감독은 베이징에서 태어나 6살에 마이애미로 이주한 이민 1세대다. 첫 번째 장편 데뷔작이었던 2014년 ‘러브 인 베를린(Posthumous)’는 예술가로서 명성을 얻지 못해 좌절한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웠다. 그의 그림과 소지품을 훔쳐간 노숙자가 사망하는 바람에, 그가 죽었다고 오해한 대중들이 작품에 대해서 다시 재평가하는 이야기다. 룰루 왕은 ‘러브 인 베를린’의 주인공부터 ‘페어웰’ 빌리까지, 꿈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는 예술가들을 주인공으로 꾸준히 삼고 있는 셈이다. 중국에서는 피아노 신동 취급을 받았지만 미국에 도착한 이후 교회 피아노로 간신히 연습을 계속한 것도 감독 본인의 이야기다. 영화에 등장한 이모할머니 홍 루는 실제로 룰루 왕 감독의 이모할머니로, 실제 할머니 몰래 촬영을 이어 나갈 수 있도록 감독을 도왔다. 묘소 참배 장면도 촬영 허가를 받지 못해 결국 룰루 왕 감독의 할아버지 묘소 앞에서 촬영했다고. 여러모로 빌리에게는 룰루 왕 감독 자신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는 셈이다. 완벽한 빌리, 아콰피나! 그리고 사라져가는 고향 극중 빌리 역을 맡은 아콰피나는 이 영화로 제78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뮤지컬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사진 출처: 네이버 영화) 본명은 노라 럼. 가수, 코미디언, 배우로 활동하고 있으며 ‘오션스8’,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등을 통해 할리우드에 얼굴을 알렸다. ‘아콰피나’라는 이름은 생수 상표에서 따온 작명이라고. 기존 작품에서는 속사포처럼 빠르게 대사를 뱉아내는 캐릭터들을 주로 맡았으나, ‘페어웰’에서는 대사가 아니라 육체로 표현해야 하는 빌리의 감정들을 능숙하게 연기해 낸다. 중국에 도착한 이후 자신의 역할을 알 수 없어, 소외된 채 눈치를 살피느라 내내 등을 웅크리는 자세도 아콰피나의 아이디어였다고. 제78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뮤지컬 코미디 부문 여우주연상 수상 소감으로 “봐, 아빠. 내가 취직했다 그랬지!” 라고 외쳐 박수 갈채를 받기도 했다. ‘페어웰’이 작별을 준비하는 것은 폐암 말기의 할머니뿐만 아니다. 어린 시절 떠나온 중국의 모습은 기억 속에 어렴풋하게 남아있지만, 개발과 성장이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도시는 낡은 것들을 밀어내고 부지런히 새로운 건물을 올린다. 빌리가 기억하고 있는 마을의 풍경은 결국 완전히 새로운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빌리가 질문하는 것처럼, 중국에 살고 있는 친지들까지 모두 죽고 난 다음에는, 빌리가 돌아올 수 있는 고향은 과연 남아있을까. 그래서 영화는 이따금 서사와 무관하게 빌리의 시선으로 중국인들의 모습과 거리의 풍경을 응시한다. 영화를 끝까지 본 관객들이라면 분명 이 거짓말의 결말이 궁금할 것이다. 할머니의 집에서 불과 한 블록 떨어진 곳에서 촬영했던 탓에, 촬영장에 할머니가 직접 방문하기도 했으나 ‘이민 가족이 중국에 돌아와서 결혼 축하 파티를 한다’는 내용으로 속였다고. 이모 할머니의 활약 덕분에 무사히 몇 번의 위기를 넘기면서, 여차하면 ‘할머니에게는 그냥 영화라고, 다 지어낸 이야기라고 설명하겠다’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그러나 최근 룰루 왕 감독의 인터뷰에 의하면 ‘거짓말’은 여전히 잘 지켜지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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