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티파니, 지방시, 세기의 연인 등 이 몇가지 단어로 유추되는 한 사람이 있다면 바로 오드리 헵번일 것이다.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배우이자, 우리 곁을 떠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회자가 되고 있는 20세기의 아이콘. 시대를 막론하고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으며, 영감의 원천이 되고 있는 오드리 헵번의 주요 출연작과 함께 우리가 알지 못했던 그녀의 삶을 들여다 봤다.
20세기 아이콘의 시작! <로마의 휴일>
로마를 방문한 앤 공주(오드리 헵번). 어느 날 밤 몰래 대사관을 빠져나와 우연히 미국인 기자 조(그레고리 펙)를 만난다. 그리고 그와 함께 로마 시내에서 자유를 만끽하며 하루 동안 사랑에 빠진다. 지금 보면 단순하고 너무나 익숙해서 새로울 것 없어 보이는 <로마의 휴일>(1953)의 서사는 당시 아카데미 각본상을 받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로맨틱 코미디의 클래식이 될 정도로. 이를 반영하듯 휴 그랜트, 줄리아 로버츠 주연의 <노팅힐>로 변주 되었다. <로마의 휴일>은 오드리 헵번을 단숨에 할리우드의 스타 반열에 올려놓은 작품이기도 하다. 당시 인기 배우였던 그레고리 팩과 호흡을 맞춘 무명배우가 할리우드 데뷔작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까지 거머쥐게 된 것이다.
오드리 헵번의 영화 경력의 시작은 1950년이다. 런던에 거주하고 있던 그녀는 오랫동안 해오던 발레를 그만두고 코미디 뮤지컬 무대에 섰고 영화에서 단역으로 출연했다. 그리고 영국영화 <더 시크릿 피플>(1952)에서 발레 무용수 역으로 첫 주연을 맡게 된다. 런던 파라마운트사의 제작부장이 그녀를 <로마의 휴일> 주연배우로 제안한 것은 이 작품이 상영되기 전, <래프터 인 파라다이스>(1951)에서 담배 파는 소녀로 단 30초간 출연한 그녀를 본 후였다.
앤 공주 역에는 미국식 악센트가 없고 공주 교육을 받았다고 느껴질 만한 우아한 분위기의 배우가 필요했는데, 그녀가 딱 이었다. 1929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태어난 헵번은 자라면서 프랑스어를 썼고, 또한 아버지와 어머니가 각각 영국과 네덜란드 국적이었기에 영어와 네덜란드어도 유창했다. 뿐만 아니라 스페인어와 이탈리어까지 무려 5개 국어를 할 만큼 언어에 능통했다. 유럽 대륙에서 교육을 받은 그녀는 영국 계급 체제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고급스러운 억양을 갖고 있었고, 음성은 명쾌했으며, 발레를 전공한 몸짓에는 기품이 있었다.
사실 감독이 처음 캐스팅을 시도했던 배우는 관능적인 매력으로 유명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였다고. 테일러와 전혀 다른 이미지를 가진 헵번의 앤 공주는 당시 선호되지 않았던 마른 몸 또한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 뿐만 아니라 앤 공주가 시내의 미용실에서 충동적으로 얻게 되는 숏 컷, 소매를 걷어 올린 블라우스와 허리를 강조하는 풀 스커트, 목에 쁘띠 스카프를 맨 헵번스타일이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게 된다. 이로서 <로마의 휴일>은 새로운 할리우드 스타이자 유행의 아이콘을 탄생시킨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지방시 뮤즈로서의 헵번, <사브리나>
<로마의 휴일>의 촬영을 끝낸 헵번은 다시 무대로 돌아와 콜레트의 소설 <지지>를 원작으로 한 브로드웨이 연극으로 순회공연을 다녔다. 이후 그녀의 두 번째 할리우드 작품은 <선 셋 대로>(1950)와 <뜨거운 것이 좋아>(1959)로 잘 알려진 빌리 와일더가 메가폰을 잡고, 필름 누아르를 대표하는 배우 험프리 보가트가 출연한 <사브리나>(1954)다.
헵번은 부유한 롱아일랜드 가문에서 일하는 운전기사의 외동딸 사브리나로 등장한다. 어린 사브리나는 이 가문의 사고뭉치 둘째 아들 데이비드(윌리엄 홀든)을 오랫동안 짝사랑해왔는데, 이를 걱정스럽게 여긴 아버지가 그녀를 파리에 있는 요리학교로 유학 보낸다. 그리고 파리에서 2년의 시간동안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성숙한 여성으로 변화하는데, 그것이 표현되는 영역이 바로 패션이다.
파리에서의 장면들과 롱아일랜드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사브리나는 프랑스 디자이너 지방시가 만든 옷을 입고 등장하는 것이다. 이는 헵번이 감독에게 직접 제안한 것으로, 이로써 <사브리나>는 영화배우에 대한 의상 협찬이 이루어진 최초의 영화가 된다. 특히 헵번의 길고 가느다란 다리가 시크하게 소화해낸, 복숭아뼈가 보이는 길이의 팬츠와 플랫슈즈는 이후 사브린느 팬츠와 사브린느 슈즈라는 명칭으로 굳어져 불릴 정도로 유명해졌다. 이후 지방시는 헵번이 출연하는 모든 영화에 의상을 협찬하고, 헵번은 지방시의 살롱에 영감을 불어넣는 뮤즈가 되었다.
한편, 이 영화에서 사브리나가 파리에서 돌아온 후 파리행 배는 삶을 속박하는 것으로부터의 자유, 변화 없는 삶으로부터의 도약을 상징하게 된다. 재미있게도, 헵번이 출연한 영화들에서 로맨스란 미국이 아닌 유럽과 관련된 경우가 많다. 로맨스는 영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 발화되는 과정에서 표현되기도 한다. 예컨대, 험프리 보가트가 연기한 라이너스가 사브리나에게 불어를 묻는 척 하면서 자신의 진심을 드러내는 것이 그렇다. 이어서 달리는 차 안에서 사브리나가 라이너스가 알아듣지 못할 불어 가사로 에디트 피아프의 노래 ‘라 비 앙 로즈(La Vie En Rose)’를 부르는 순간은 무척 아름답다.
뮤지컬 영화에도 찰떡궁합! <화니 페이스>
포스터를 보기 전까지는 영화 제목의 의미를 잘 모를것이다. 영화 수입 당시, 영문표기 방식에 따라 ‘화니’로 표기된 단어는 바로 ‘funny’, 그러니 제목은 ‘웃긴 얼굴’이다. 그런데 그 웃긴 얼굴의 주인이 바로 오드리 헵번이라는 게 믿어지는가?
영화를 봐도 좀처럼 납득되지는 않지만, 고급 패션잡지 종사자들은 헵번이 연기한 서점 점원 조 스탁톤의 얼굴이 웃기다 말한다. 게다가 실제로 헵번은 영화 속 조처럼 자신의 외모에 자신이 있는 편이 아니었다고. 그러나 이 영화에서 사진작가 딕(프레드 아스테어)이 과장된 표정으로 찍힌 조의 사진을 확대하며 ‘웃긴 얼굴’이라 부르는 장면을 보면, 이 말은 그녀가 가진 밝고 순수한 에너지와 개성을 가리키는 것이란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원래 <웨딩 데이>라는 제목의 무대극이었던 <화니 페이스>는 뉴욕 패션잡지의 사진작가가 그리니치빌리지의 서점 점원을 모델로 발견하는 이야기로, <사랑은 비를 타고>(1952)의 스탠리 도넌 감독이 연출한 즐거운 뮤지컬 영화다.
원작 무대극에서 주연을 했던 전설적인 춤꾼 프레드 아스테어가 영화에서도 같은 역을 맡았다. 아스테어의 나이가 많아 캐스팅에 관한 지적이 있기도 했지만, 헵번은 아스테어와 함께 작품을 함으로써 인생의 꿈을 이루었다고 생각했다. 또한 조가 자신과 실제로 가장 비슷한 성격의 캐릭터라 말하기도 했다.
<사브리나>에 이어 이번 영화에서도 헵번은 파리로 향한다. 조가 자신이 열렬히 빠진 ‘감정이입주의’의 창시자를 만나기 위해 모델 제안을 받아들여 파리행 비행기를 타는 것. 낭만의 도시 파리를 흥분에 차서 활보하는 등장인물들을 통해 우리는 당시의 샹젤리제 거리와 몽마르뜨 언덕, 에펠탑과 루브르 박물관의 모습을 볼 수 있다. 게다가 뮤지컬을 좋아하는 팬이라면 놓칠 수 없는 장면들이 가득하다. 특히 감정이입주의자들이 모인 카페에서 올 블랙의 파리지앵 룩을 한 헵번이 독특한 재즈 음악에 맞춰 괴랄한 춤을 추는 장면, 한밤중 숙소 앞 공터에서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을 달래기 위해 투우사 흉내를 내는 아스테어의 솔로 장면이 눈을 즐겁게 할 것이다.
영화 역사상 유명한 오프닝, 그리고 ‘문 리버’ <티파니에서 아침을>
오드리 헵번 하면 <로마의 휴일>의 앤 공주와 더불어 새벽녘 티파니 보석상 앞에 서서 블랙원피스에 선글라스,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한 채 커피와 빵으로 끼니를 때우는 <티파니에서 아침을>(1961) 속 홀리를 빼놓지 않는다. 마치 TV 광고 같기도 하고, 화려한 패션과 길거리 식사의 어울리지 않는 만남이 초현실적인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이 장면은 영화 역사상 가장 유명한 오프닝 중 하나일 것이다.
헵번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이 영화는 뉴욕의 한 아파트에 살면서 부유한 남자와의 만남을 통해 신분상승을 꿈꾸는 고급 창부 할리와 같은 아파트에 들어온 가난한 작가 폴(조지 페파드)의 이야기다. 사실 원작자인 트루먼 카포티가 애초에 홀리 역으로 염두에 둔 배우는 마를린 먼로였고, 오드리 역시 이 역할을 내켜 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핑크 팬더> 시리즈로 더욱 유명한 이 영화의 감독 블레이크 에드워즈는 오프닝 장면을 촬영한 후, 헵번이 연기한 홀리가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일 거라는 확신을 가졌다.
수수한 차림으로 비상계단 창틀에 걸터앉아 기타를 치면서 ‘문 리버(moon river)’를 노래하는 또 하나의 유명한 장면은 헵번이 편안한 연기를 끌어내도록 할리의 성격을 정화시켜 주는 장치로서 도입된 것이다. 도시적인 세련미와는 어울리지 않는 이 곡은 할리가 시골 출신의 여자라는 배경을 암시해주는 동시에 그녀가 가진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을 드러낸다. 헨리 맨시니가 작곡한 이 곡은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상과 주제가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그래미상 올해의 음반에 뽑혔고, ‘문 리버’는 영화의 주제곡을 넘어 헵번의 주제곡이 되었다.
오드리 헵번의 변신은 무죄! <샤레이드>
오드리 헵번은 <화니 페이스>를 연출한 스탠리 도넌 감독과 <샤레이드>에서 재회한다. ‘샤레이드Charade’는 위장이나 속임수, 혹은 몸짓으로 단어를 설명해서 맞추는 제스처 게임을 가리키는 단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알프레드 히치콕이 만든 듯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 장르에 로맨틱 코미디가 가미된 작품이다. 그것도 히치콕의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 <나는 결백하다>(1955)로 잘 알려진 배우 캐리 그랜트와 함께 말이다. 이 영화에서 헵번은 죽은 남편에 대해 모르는 게 너무 많았던 미망인으로, 캐리 그랜트는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있으면서 그녀를 보호하는 수수께끼 남성으로 등장한다.
영화의 배경은 또 다시 파리다. 이제 파리는 로맨스뿐만 아니라 미스터리까지 공존하는 도시가 된다. 의심과 사랑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을 안은 레지가 캐리 그랜트와 세느강 유람선에서 저녁을 보내는 장면에서는 파리라는 도시 자체가 로맨스의 클래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그를 믿게 된 레지는 ‘이제 배고프지 않다’고 말하는데, 이 대사가 흥미롭다.
레지는 끊임없이 먹는다. 영화는 친구와 함께 스키장에 놀러간 레지가 음식을 우걱우걱 먹고 있는 장면에서 시작하는데, 그것은 레지가 남편과 이혼하도록 마음먹은 후 나타난 불안증상의 일종이다. 그리고 이후 끔찍한 사건들에 휘말리며 신경과민에 시달리면서 그녀는 자주 허기진다고 말하거나 달콤한 것들을 찾는다.
이는 어린 시절 부모의 불화와 이혼으로 인해 이상식욕항진증이 생겼던, 그리고 2차 대전 시기 네덜란드에서의 기근으로 아사직전에 이르렀을 때 군인이 준 초콜릿으로 목숨을 건진 후 초콜릿을 끔찍이 좋아하게 된 헵번 자신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한다. 또한 그녀는 이 영화에서 동시통역 일을 하는데, 5개 국어에 능통한 헵번은 십대시절 언어능력을 살려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었던 것이다.
오드리 헵번의 두 번째 뮤지컬 영화, <마이 페어 레이디>
<마이 페어 레이디>(1964)는 <화니 페이스> 이후 헵번이 출연한 두 번째 뮤지컬 영화다. 런던을 배경으로 한 이 시대극에서 음성학자인 히긴스 교수(렉스 해리슨)는 친구와 내기를 한다. 길거리에서 방황하는 하층 계급 여성 일라이자(오드리 헵번)를 집으로 데려와 교육시킴으로써 그녀를 귀부인으로 만들 수 있을지 없을지에 대한 것이다. 10여년 전 누구보다 우아한 유럽의 공주였던 헵번이 이 작품에서 너저분한 차림새에 거친 억양을 가진 하층민 여성으로 처음 등장한다. 이후 그녀의 변화된 모습에서 사람들이 얼마나 감탄하게 될지는 예상 가능한 일일 것이다.
버나드 쇼의 이 작품은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먼저 만들어졌는데, 1956년 초연된 이후 크게 성공했고, 인기에 힘입어 워너브라더스가 판권을 사들였다. 그런데 영화화 과정에서 뮤지컬의 초연 배우인 렉스 해리슨이 영화 속 히긴스 교수 역을 이어받았지만, 같은 해 <메리 포핀스>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는 줄리 앤드루스는 캐스팅 당시 영화계에서의 낮은 인지도 때문에 밀려났고, 그 자리를 오드리 헵번이 채웠다.
하지만 헵번은 이 작품의 뮤지컬 넘버들을 익힐 만한 충분한 시간과 가창력을 갖지 못했고, 제작사에 의해 그녀의 노래는 마니 닉슨의 더빙으로 채워졌다. 이 더빙 논란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엄청난 흥행에 성공했고 1965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12개 부문에 노미네이트되어 작품상, 감독상, 각색상 등을 포함한 8개 부문을 휩쓰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한 인기는 오드리 헵번이라는 우리 시대가 사랑한 스타의 출연과 더불어, 입센의 <인형의 집>에 영향을 받았던 원작과 달리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할리우드식 서사의 인기 덕분이기도 했을 것이다. 막대한 제작비를 투여해 만든 완성도 높은 뮤지컬 대작으로 뮤지컬 팬이라면 놓쳐선 안 될 작품이다.
이처럼 다양한 오드리 헵번의 매력을 스크린에서 마주할 수 있는 기회가 열린다. 오는 30일부터 5월 27일까지 4주간 CJ CGV에서 오드리 헵번의 대표작 <로마의 휴일> <사브리나> <화니 페이스> <티파니에서 아침을> <샤레이드> <마이 페어 레이디>를 상영한다. 보다 큰 화면에서 아름답고도 개성 넘치는 오드리 헵번의 연기를 감상해 보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