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에 대한 찬양은 예술사에서 이미 오래 반복된 주제였다. 유명한 예술가들이 저마다 애정했던 술 브랜드가 지금까지도 회자될 정도로 술은 예술가들에게 절대 없어서는 안 되는 벗이기도 했다. 하지만 무엇이든 과하면 문제가 되는 법. 과한 음주는 결국 중독으로 이어져 생활을 파괴하기에 적당히 즐기는 것이 중요한데 술을 곁에 두며 ‘적당한’ 간격을 유지하기란 여간 쉽지 않다. 토마스 빈터베르크 감독도 이러한 술의 양면성에 주목한다. 덴마크를 대표하는 감독으로서 그가 바라보는 ‘술’에는 어떤 의미가 담겨 있는지 살펴본다.
이동윤 | 영화 평론가
툭하면 영화 보고 운다. 영화의 본질은 최대한 온몸으로 즐기는 것
술에 관한 흥미로운 실험
여기 네 명의 남자들이 있다. 모두 고등학교 선생님들이고 중년이며 인생의 고비를 만나는 중이다. 이때 심리학을 가르치는 페테르(라르스 란데)가 친구들에게 한 가지 실험을 제안한다. 노르웨이 정신과 의사인 핀 스코르데루(Finn Skårderud)의 이론을 직접 적용해보자는 것인데, 모든 인간에겐 0.05%의 혈중알코올농도가 부족하고 이를 유지하면 일상이 더욱 느긋해지고 침착해지며 개방적으로 변한다는 이론이다. 일상의 돌파구가 필요했던 이들은 페테르의 제안을 받아들여 곧바로 술을 마시며 변화를 관찰하기 시작한다.
술은 그들의 삶을 즉각적으로 변화시킨다. 수업에 열정이 없어 학부모에게까지 항의를 받아야 했던 역사교사 마르틴(매즈 미켈슨)은 순식간에 인기 선생님으로 등극한다. 합창을 가르치던 음악 교사 니콜라이(마그누스 밀랑)는 음악을 통해 서로가 교감하는 방법을 가르치고 체육선생 톰뮈(토머스 보 라센)는 자신이 맡고 있던 유소년 축구팀을 승리로 이끈다. 술이 가져온 변화 속에서 이들은 더욱 술의 힘에 의존하게 되고 술을 통해 더 높은 경지의 초월적 가능성을 맛보고자 욕망한다. 과연 이들의 실험은 성공을 거두게 될까?
술이 지닌 모든 가능성에 대한 찬사
토마스 빈터베르크 감독은 술의 작용을 단순히 긍정, 부정으로 이분화하면서 재단하지 않는다. 오히려 술이 지닌 다양한 가능성들을 그 자체로 수용하고 받아들이려 한다. 이러한 감독의 시선은 마르틴을 통해 잘 드러난다. 그는 학생들에게 퀴즈를 낸다. 이름을 말하지 않은 채 세 명의 역사적 인물들이 지닌 특징들만 나열하곤 이 중 누구에게 표를 던질 것인지 묻자 학생들은 모두 모범적이고 긍정적 장점들만 지닌 인물을 뽑는다. 마지막 마르틴이 공개한 그 자는 바로 히틀러였다. 대상을 가린 채 인물이 지닌 도덕적 요인들만으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 오히려 종합적으로 그들의 생활상이 지닌 모든 요인들과 함께 그들이 이룬 업적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는 사실을 감독은 이 장면을 통해서 제시한다.
빈터베르크에게 술은 텅 빈 기호일지도 모른다. 그 텅 빈 공간에 인간의 어떤 욕망과 의도가 담기는가에 따라 술은 날카로운 칼날이 될 수도, 화려한 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술에 투영한 인간의 욕망에 면죄부를 주기 위해서 술을 터부시한 것은 아닐까? ‘어나더 라운드’는 술을 긍정하든 부정하든 이 사실을 결국 인정하고 받아들이도록 만든다. 결국 우리의 삶에서 술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사실을 말이다.
술을 통해 경계 허물기
‘한 잔 더 마시다’라는 뜻의 ‘어나더 라운드’ 원제는 ‘Druk’, 폭음이다. 한 잔이 두 잔을 부르고, 또 다음 잔을 부르며 결국은 폭음에 이르게 되는 영화 속 인물들은 이미 그 자체로 제목의 의미를 수행하는 존재들이다.
영화는 이들의 여정을 통해서 젊음과 늙음, 이성과 비이성,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조증과 울증의 경계를 해체한다. 키에르케고르의 명언으로부터 시작한 영화는 중년의 위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치는, 다시 젊었던 시절의 에너지를 회복하려는 인물들에게 집중한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것들만을 강조하는 세계에서 벗어나 보이지 않는 것들의 가치를 발견해 나가는 인물들의 변화를 그려낸다. 이 과정 속에서 겪는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들은 그 자체로 소중하고 영감 어린 기록들이다. 결국 이들은 술에 의해 비극적 순간을 맞이한다.
‘어나더 라운드’는 이 순간에 머물지 않고 한걸음 더 나아가 술이 불러온 효과들을 가만히 응시한다. 빈터베르크 감독은 바로 이 순간에서 어떤 가능성을 발견한다. 삶에 대한 충만한 애정과 찬양을 드러내는 영화의 강렬한 엔딩에서 모든 관객들은 감독이 전하려는 이 가능성을 선명하게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악동에서 명감독으로, 빈터베르크 감독의 변화
토마스 빈터베르크 감독은 이 영화를 자신의 딸인 아이다에게 바쳤다. 그녀는 촬영 시작 4일 째 되는 날,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아이다는 감독의 시나리오를 보고 좀 더 희망을 전해 달라 주문했다. 그 덕분에 술에 대한 도발적 아이디어에서 시작한 프로젝트는 인생을 조망하고 모든 희로애락을 받아들이는 깊은 통찰을 성취해낸다. 1990년대 중반, 라스 폰 트리에 감독과 함께 ‘도그마’ 선언을 하며 영화계 악동으로 활약하던 감독이 중년의 나이가 되어 삶을 침착하게 응시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영화 속 인물들처럼 아픔과 위기를 결국 자신의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였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이러한 감독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래서 이 영화는 극장 문을 나선 뒤 친한 친구들을 삼삼오오 모아 술 한 잔 기울이고 싶어 하도록 만든다. 비록 힘든 시기라 실현하긴 어려울 수 있겠지만 그래도 감독이 건네는 위로의 술 한 잔에 흠뻑 취해보라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