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 감독이 돌아왔다. ‘돌아왔다’는 말은 그가 새로운 신작을 내놓았다는 은유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물리적 표현이기도 하다. 봉준호 감독이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만든 작품은 2009년의 <마더>였다. 이후 미국에서 두 작품(<설국열차>(2013), <옥자>(2017))을 만들었으니 <기생충>은 10년 만에 그가 한국으로 돌아와 만든 작품. 그의 귀환을 반겨주듯 <기생충>은 개봉 10일 만에 700만을 돌파했다. 봉준호 감독은 이번 영화에서 어떤 흔적들을 남겼을까?
이동윤 | 영화 평론가
툭하면 영화 보고 운다. 영화의 본질은 최대한 온몸으로 즐기는 것
희비극을 통한 한국 사회 모순의 흔적
봉준호 감독의 귀환이 반가운 건 단지 그가 올해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는 작품을 통해서 받아들이기 쉽지 않은 한국 사회의 모순들을 날카롭게 벼려내고 그 사이의 문제점들을 여가 없이 드러내 보여줬다. 봉준호 감독에게 웃음은 이를 대면해야 하는 관객들의 아픔을 어루만져주는 도구다. 덕분에 관객은 비극적 결말 이후를 현실의 삶 속에서 적극 고민할 수 있었다.
<기생충>은 이러한 봉준호 감독의 영화적 힘을 다시금 깨닫게 해준다. 어쩌면 우리는 이 작품으로 그가 부재했던 10년 동안의 한국 사회를 다시 돌아볼 수 있게 됐는지도 모른다. 더욱 차갑고 잔인한 현실이 되었지만 그는 이를 비극으로만 그리지 않는다. 비극적 상황 속에서도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놓치지 않는다. <기생충>을 통해서 관객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면밀히 분석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창 밖 소유를 통한 사회적 계급 격차의 흔적
<기생충>의 서사는 기택(송강호)의 가족과 박사장(이선균) 가족의 정면충돌로 추동되는데, 이들의 충돌은 그들이 살고 있는 집 밖의 풍경에서부터 분명하게 드러난다. 기택과 박사장 집은 모두 창을 갖고 있다. 단, 기택의 집 창 밖으로는 다른 이들의 일상이 관찰된다면, 박사장의 집 창 밖으로는 시공간을 알 수 없는 텅 빈 정원이 보인다. 기택의 집 밖 공간은 누군가 침범해 들어올 가능성이 있는 열린 공간이다. 술에 취해 방뇨하는 행인을 예민하게 대하는 것 또한 창 밖의 상황이지만 이는 곧 기택 집 안의 상황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박사장의 공간은 어떤 방식으로든 변형 가능한 공간이다. 인디언의 야영지가 되었다가 곧 파티장이 되기도 한다. 창 밖을 온전히 소유할 수 있는지의 여부는 가족의 삶, 곧 개인의 사적 영역이 얼마나 확보 유지될 수 있는가의 여부로 연결된다. 창 밖의 공간까지 점유할 수 있는 자의 능력은 토지가 곧 자본이 된 사회에서 그의 사회적 계급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이다. <기생충>은 창 밖의 풍경을 응시하는 기택 가족의 시선을 반복함으로 현 사회의 빈부격차가 얼마나 벌어져 있는지 강조한다.
계획 설립 유무를 통한 생존의 흔적
박사장 가족은 굳이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다. 미래를 고민하긴 하지만 이 또한 오직 연교(조여정)의 몫 인데다 자녀들의 미래에 국한되어 있다. 성에 따라 역할이 분리된 가족이기에 자녀의 미래를 고민하는 자도 분리되어 있는 셈이다. 반면 기택은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다. 계획해봤자 뜻대로 된 인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이유는 IMF 사태에서 찾아볼 수 있다.
기우(최우식), 기정(박소담)의 나이를 고려했을 때 기택 부부는 IMF 사태를 직접 경험했을 가능성이 크다. 치킨집과 대만 카스테라집으로 실패를 경험했다는 기택의 고백은 IMF 사태 이후 직장에서 내몰린 많은 실업자들이 택했던 횡보와 고스란히 겹친다. 반면, 기우, 기정은 미래를 계획한다. 기택과 달리 IMF를 직접적으로 경험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IMF 사태 이후, 고도로 발전한 자본주의 사회체제 속에서 생존의 감각을 온 몸으로 체화했기 때문이다.
기우는 박사장 집에 처음 방문하자마자 곧바로 자신의 가족을 집안으로 깊숙이 끌어들인다. 이 순간 기우의 상황 판단과 실행은 동시에 일어난다. 계획을 세우고 그 뒤에 수행하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일치된 수립-실행은 빠른 속도로 회전하는 재생산 구조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기우 스스로 체화 시킨 방법론이다.
기정도 마찬가지다. 박사장 집으로 들어가기 전 “독도는 우리땅” 곡조에 맞춰 암기 내용을 되뇌는 장면은 삶의 문제를 입시 교육처럼 풀어내는 세대에 대한 풍자이기도 했다. IMF 사태 이후 더 이상 미래를 계획하지 않는 기택과 달리 기우, 기정은 IMF 사태 이후 생존방법을 온 몸으로 각인한 자들인 것이다.
지하 공간을 통한 중간계급 몰락의 흔적
봉준호 감독이 한국을 배경으로 만든 전작에서 지하는 중요한 사건이 벌어지는 시공간이다. <플란다스의 개>에서 지하는 강아지가 감금당하는 곳이었다. <살인의 추억>에서 땅 속은 억울하게 희생당한 피해자들이 묻힌 곳이었다. <괴물>의 수면 아래, 하수구는 폐수로 변형된 고통을 온 몸으로 토로하던 괴물의 은신처였다. <기생충>에서도 박사장의 집은 지하와 지상으로 구분되는데 이전 작품들과 달리 그 사이공간이 출연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수직계열화 되어 있는 공간 구분이 계급의 격차를 시각화 한 것이라면 기택의 사회적 계급 또한 저층과 상층 사이에 존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하지만 영화는 기택 가족의 삶의 조건을 분명한 하위계급으로서의 면모로 묘사하지 않는다.
공교롭게도 이는 한국 사회의 또 다른 비극을 암시한다. 중간계급의 몰락, 중간계급의 하위계급화가 한국 사회의 현주소임을 밝힌 것이다. 박사장의 집 지하에서 문광(이정은)과 기정의 입장이 뒤바뀌는 것 또한 이들의 삶의 조건이 수직적으로 구분된 것이 아님을 드러낸다. 지하실 냄새는 반지하든, 지하든, 동일한 법이다.
<기생충>은 한국 사회를 아니 자본주의를 지향하는 전 세계 모든 사회를 뼈아프게 분석하고 풍자한다. 극중 현실 비판적 시선은 계급의 문제가 어느 한 지역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게 하는 동시에 현 시대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대중들에게 그 문제점을 각인시킬 수 있는 기회를 전한다. 이렇듯 봉준호 감독은 영화의 순기능을 작품에 오롯이 남긴다.
<기생충>이 한국영화에 남긴 흔적은?
<기생충>은 영화 한 편이 관객을 포함한 동시대 사람들에게 현실의 이야기를 전하는 통로로서 기능해 왔다는 걸 보여줬고, 이번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을 통해 이를 입증했다. 이 작품이 갖는 또 하나의 의의는 바로 한국영화 100주년 해를 기념하는 상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나라 영화의 우수성을 전 세계적으로 알리게 된 계기인 셈이다.
이런 성과의 동력을 살펴보면 투자의 힘을 간과할 수 없다. 영화가 대자본이 투여되는 자본주의 체제의 문화 상품임을 감안한다면, 영화의 완성도와 더불어 적극적인 지원이 수반되어야 한다. <기생충>은 이 두 가지 요소가 잘 맞물렸다. 봉준호 감독의 뛰어난 연출력, 그리고 CJ의 적극적인 투자가 바로 그것.
<오아시스> <밀양> <친절한 금자씨> <박쥐> 등 장르와 예술의 합일을 이뤄낸 작품이나 새로운 형식을 추구하는 이 작품들의 탄생도 그 맥락을 같이 한다. CJ는 투자와 배급에 그치지 않고 세계 영화제에 출품했고, 앞서 언급한 영화들은 각각 베니스, 칸영화제에서 주요상을 수상했다. 세계 영화제에서 한국 영화의 가능성을 내비친 작품들이 소개되지 못했다면 황금빛 영광은 다음을 기약해야 했을 것이다.
<기생충>의 또 하나의 의의는 표준근로계약서를 기반한 좋은 제작 환경 안에서 나왔다는 점이다. 그동안 지적됐던 열악한 영화 제작 근로 환경은 문제가 되었었는데, <국제시장>을 시작으로 서서히 정착해 나가고 있는 있는 제작 시스템의 긍정적인 효과가 <기생충>으로 널리 퍼지게 되었다.
자본이 투여되어 만든 기생충이 역설적으로 자본주의 폐해를 지적한다는 건 아이러니한 일이다. 하지만 앞서 소개했듯 영화는 자본이 투여 되야 만들어지는 문화다. 대자본의 재생산 구조가 계급 구조를 더욱 공고히 한다면, <기생충>처럼 현실을 비판할 수 있는 순기능 또한 대자본에서 출발할 수 있다는 좋은 선례가 또 나올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