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보고 난 다음, 임솔아 작가의 동명 원작 소설을 사서 읽기 시작했다. 소녀들이 가출을 모의할 때 즈음, 그제서야 이미 읽었던 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따지고 보면 소녀들의 이야기는 달라진 것이 없는데, 스크린에서 마주한 소녀들의 번민과 감정이 새삼 낯설어 읽지 않은 소설로 착각했다. 영화 ‘최선의 삶’은 임솔아 작가의 원작 소설에서 영화로 넘어오면서 어떻게, 얼만큼 달라진 것일까.
옥미나 | 영화 평론가
영화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배웁니다
단편영화로 축적한 이우정 감독의 연출 스타일
단편 영화는 한 편만 보게 되는 일이 좀처럼 없다. 상영 프로그램이건 혹은 심사이건 적어도 대여섯 편, 못해도 십여 편은 한 번에 몰아 보게 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제목과 내용이 연결되지 않는 일이 태반이고, 하필 소재가 비슷한 영화들을 연달아 보기라도 하면 머리 속에서는 서사와 인물들이 번번히 뒤엉키게 마련이다.
그러나 아무리 수많은 작품들과 함께 보아도 이우정 감독의 단편 영화들은 매번 유독 오래 정확히 기억에 남았다. ‘개를 키워봐서 알아요’(2009), ‘애드벌룬’(2011), ‘서울생활’(2013) 같은 영화들은 오히려 시간이 한참 지난 다음에도 이따금 다시 떠오르곤 했는데, 그것은 이야기를 결말까지 끌고 가는 대신 어느 순간 똑 끊어버리는 이우정 감독 특유의 서사 구조 탓이었다.
아직 봐야 할 내용이 더 남은 것 같은데, 혹시 편지의 마지막 한 장이 빠진 게 아닐까 편지 봉투를 뒤적거리는 기분으로 영화의 내용을 복기하면서 그래서 그것은 정말 무엇이었을까, 그 이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곤 했다.
성공적인 단편영화의 차별화 전략일까. GV에서 만난 이우정 감독은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서사 내부에서 발생한 사건의 의미를 굳이 본인의 시각으로 단정지어 해석하고 싶지 않다는 것. 본인을 사로잡은 이미지와 이야기에서 영화를 시작하되, 그것이 무엇이고 어떤 의미를 가졌으며 그래서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 그녀는 정리하고 분석하려 시도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런 일이 있었어요, 말을 건네고 가만히 관객의 얼굴을 응시하는 편이다.
자주 우리의 인생에 출몰한 인물들과 사건들이 그러한 것처럼, 우리가 정확히 알고 있는 것은 직접 경험한 몇몇 장면에 불과하고, 맥락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나중의 시도라는 사실을 이우정 감독은 이미 진작부터 깨달은 눈치다. 혼자 나름의 결론을 내리거나 단정 지어서 일련의 사건들을 과거로 밀어내는 대신, 복기하고 공유하며 타인의 해석에 귀를 기울이는 것. 그래서 이우정 감독의 단편들은 과거의 어떤 순간으로 이름 붙여 박제되는 대신, 현재와 연결된 상태로 매번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되는 어느 하루로 되살아난다.
소녀들의 관계와 그 변화 과정에 집중한 ‘최선의 삶’
그래서 이우정 감독의 각색과 연출을 거쳐 영화로 완성된 ‘최선의 삶’은 소설과 그 결이 사뭇 달라졌다. 지방 소도시에 살고 있는 주인공 강이의 영리하고 예민한 1인칭 시점으로 명문고에 진학하기 위한 위장전입, 부유한 동네에 대한 은밀한 자격지심과 거짓말로 시작해서 빈부격차가 또렷한 소녀들 사이의 불안과 고민, 소외감 등을 다양한 층위에서 묘사했던 소설에 비해 영화는 오롯이 소녀들의 관계와 그 변화 과정에 집중한다. 원가 내용과 설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의무감을 일찌감치 떨쳐버린 이우정 감독의 선택에 의해서다.
절친하던 소녀들이 왜 멀어지고 급기야 칼을 겨누게 되었는지, 영화는 소녀들의 우정에 비밀과 거짓말, 우정을 담보로 하는 협박과 권력관계가 스며들어 결국 파멸에 이르게 되는 일련의 과정을 촘촘히 따라간다. 기존의 단편 작업에서 그러했듯이 감독은 서사의 어떤 순간들을 능숙하게 생략하고 비약하면서, 감정과 신뢰에 균열이 발생하는 소녀들의 미묘한 순간들을 솜씨 좋게 포착해낸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이야기의 결말은 관객의 몫으로 넘긴다.
오랫동안 한국 영화에서 10대 소녀들은 매번 지나치게 밝고 명랑하거나, 학교에서 귀신에 쫓겨 다니거나, 장르 영화에서 쉬운 표적이 되는 역할에 갇혀 있었다. 최근 한국독립영화계를 중심으로 재능 있는 여성감독들이 대거 등장한 덕분에 이제야 비로소 10대 소녀들의 서사가 풍부해지고 있는 참이다. 이우정 감독은 90년대 후반을 연상시키는 다큐멘터리 푸티지를 통해 ‘최선의 삶’의 학교 풍경과 주인공들의 얼굴을 우리의 기억에 연결시키는 것에 성공한 듯 보인다.
돌이켜보면 10대는 의지와 무관하게 흘러가버리는 것 같은 날들의 연속이었다. 우리에는 딱히 선택의 여지가 없었고, 학교와 친구들이 유일한 세계였으며, 시간은 우리 편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이런 기억들이 되살아날 때쯤에는 ‘최선의 삶’ 속 누군가의 얼굴, 누군가의 순간 혹은 누군가의 최선이 더 이상 낯설지 않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