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설이 된 영화들이 있다. 국내에 정식으로 극장 개봉을 한 적이 없는데도 다들 어디서 어떻게 보았는지 내내 회자되는 영화들. 일찌감치 영화를 본 이들은 마치 암호를 공유한 것처럼 공감대를 형성하며 이심전심의 미소를 나누고, 나머지 이들은 속수무책으로 대화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다. 세상은 넓고 영화는 많으니 한두 편 보지 못한 게 뭐 어떠냐 속 시원하게 무시하고 싶지만, 번번이 최고의 영화 목록에 오르내리고 하필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 레퍼런스로 거론하면서 ‘인생에서 꼭 봐야 할 7편의 영화’로 손꼽았다는 소문까지 들리면 마음이 초조해진다. 올봄 4K 디지털 리마스터링 버전의 상영 소식은 영화광들 사이에서 속보처럼 퍼졌지만, 전주영화제에서 가장 먼저 순식간에 매진되는 바람에 사람들의 속만 태웠다. 드디어 올여름 전설의 그 영화가 극장에서 개봉된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큐어>다.
옥미나 | 영화 평론가
영화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배웁니다
<큐어>로 새로운 전설을 쓴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경력은 독특하다. 하스미 시게이코의 제자라거나, 아오야마 신지, 수오 마사유키 감독들과 초창기부터 협업한 계보를 따지자면 엘리트 코스를 밟았을 것 같지만, 막상 1981년 데뷔작은 <간다가와 음란전쟁>. 노골적인 제목 그대로 로망 포르노 장르인데, 장르의 취지에 부합하는 장면을 일정 시간 이상 보여주기만 하면 나머지는 감독에게 전권을 맡기는 로망 포르노 제작 시스템을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다양한 영화적 실험의 기회로 활용했다. 섹스와 폭력을 소재로 하는 로망 포르노 B급 미스터리 호러물을 만들던 그는 1997년 <큐어>로 마침내 감독 경력의 변곡점을 맞이한다. 본인이 직접 쓴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완성한 <큐어>는 구로사와 기요시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안겨줬다.
<큐어>와 얽힌 또 다른 전설 중의 하나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이 <양들의 침묵>(1991)을 보고 영감에 사로잡혀 극장 근처 카페에 앉아 1시간 만에 이야기를 완성했다는 것인데. 사이코 스릴러라는 장르뿐 아니라, 형사와 사이코 사이에서 발생하는 유대감과 권력의 전복, 그로 인한 불안과 긴장을 차근차근 쌓아가는 방식과 속도까지 닮았다.
도쿄에서 엽기적인 연쇄 살인 사건이 연속으로 발생한다. 그러나 구속된 범인은 하나가 아니라 각각 다른 인물들이고, 한결같이 사건의 순간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희생자의 사체에 똑같은 표식을 남긴다. 구속된 이들이 모두 같은 사람을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다카베 형사(야쿠쇼 코지)는 마미야(하기와라 마사토)의 정체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페르소나, 야쿠쇼 코지
1985년 <담뽀뽀>로 영화계에 입문한 야쿠쇼 코지에게 1996년과 1997년은 잊지 못할 해였을 것이다. 1996년 역대 흥행 1위를 기록한 <쉘 위 댄스>로 스타덤에 오르기 무섭게 <마약극도>, <잠자는 남자>로 그 해 일본의 모든 영화상을 휩쓸었다. 또, 1997년에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우나기>와 동일 해의 일본 최고 흥행 기록을 세운 <실락원>에 연달아 출연했다.
작가영화와 상업영화를 넘나드는 당시 일본 최고 스타가 로망 포르노와 B급 영화를 만들던 감독의 작품에 출연한 셈이었다. 이에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은 야쿠쇼 코지의 캐스팅 승낙이 사실 본인에게도 의외였다고 회고한다. 야쿠쇼 코지는 <큐어>로 동경국제영화제에서 최우수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이후 <회로>, <절규>, <도쿄 소나타> 등 8편의 영화에 출연하면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페르소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치유’의 이름으로 살인을 전도하는 사이코 스릴러
<큐어>는 아주 정교하게 잘 설계된 사이코 스릴러다. 전형적인 형사물처럼 시작해서 정신 분석을 들먹이고 최면 암시, 사교까지 내달린 다음, 그 경계를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짓뭉개 버린다. 스스로 대상을 물색하는 대신 느슨하게 부유하면서 평범한 이들에게 살인 방식을 전파하는 마미야의 수법은 ‘당신은 누구냐’라는 질문으로 시작한다. 공적인 자아와 개인적인 자아, 드러내는 태도와 감추고 있는 감정을 묻고, 그 간극을 지적하면서 잠재의식에 가둬둔 분노를 터뜨리라고 부추긴다. 그것이 ‘치유’의 과정이며, 그러니 나가서 ‘치유’를 행하라고 권하는 목소리에는 초자연적인 요소가 개입된다. 마미야의 행각이 ‘치유’라는 단서에 이르면, 애초에 <큐어>의 제목이 <전도사>였다는 사실을 납득할 수 있을 것이다.
<큐어>는 1990년대 일본 사회에 만연한 소외감과 폐쇄성을 배경으로, 인간의 실존에 대해 질문하면서 형사물과 공포물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심리 스릴러다. 집요한 롱테이크, 극도로 절제된 편집, 당시에는 파격적으로 느껴졌을 카메라 워크와 앵글, 살해 장면에 어울리지 않게 터무니없이 명랑한 배경음악까지. 장르 영화의 요소와 클리쉐에 통달한, 그리하여 마침내 자유자재로 조립해내는 -어째서 내내 전설적인 작품으로 회자되었는지 즉시 수긍하게 되는-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의 걸작이다.
- <큐어>는 엽기적인 연쇄 살인 사건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들을 섬뜩하고 기묘하게 그려낸 범죄 스릴러다.
- 20세기 걸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으로, 구로사와 기요시 감독을 전 세계에 알린 작품이다.
-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오는 7월 6일 개봉하는 <큐어>는 CGV 아트하우스 기획전 ‘Cinema Adult Vacation’을 통해 오는 6월 30일부터 먼저 만나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