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 라이언, 줄리아 로버츠, 앤디 맥도웰, 산드라 블록 등 1990년대 할리우드를 풍미했던 여배우들은 모두 로맨틱 코미디를 통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로맨틱 코미디 영화는 계속해서 만들어지고 있지만 유독 1990년대 작품들은 뭔가 다르다. 인물들의 대사와 바라보는 관점, 멜로 라는 구조 위에서 삶의 우연성과 보편성을 탐구하는 자세 속에 담긴 성숙한 태도 등 음미해 볼 어른의 맛이 담겨있다. 더불어 지금까지도 그 생명력을 발휘하며 동시대와 접속하는 순간도 그 안에 있다. 누군가의 인생로코라 불리는 1990년 대표 로맨틱 코미디 3편을 소개한다.
박지한 |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영화가 선물해준 빛나는 순간을 나눕니다
로맨틱 코미디의 바이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지금 다시 생각해보면 드림팀이 모인 작품이었다. 연출자 로브 라이너는 이미 골 때리는(?) 페이크 뮤직 다큐멘터리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잭 블랙이 ‘부캐’ JB를 연기하는 ‘터네이셔스 D’ 같은 컨셉의 영화)와 스티븐 킹 원작 영화 ‘스탠 바이 미’를 통해 명장의 반열에 오른 상태였다. 그리고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때’ 이후 1년 만에 다시 스티븐 킹 원작의 공포 영화 ‘미저리’를 연출했으니 그의 창작력이 가장 뛰어났던 시기였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각본가 노라 에프론은 현대적 로맨틱 코미디의 구조를 새롭게 정립한 작가이자, 훗날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유브 갓 메일’의 감독으로 활약한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의 촬영감독 베리 소넨필드는 이 시기 코엔 형제의 초기 촬영감독(‘블러드 심플’, ‘아리조나 유괴사건’,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이후에도 ‘밀러스 크로싱’의 촬영을 맡았다)으로 명성을 쌓고 이후 ‘맨 인 블랙’ 시리즈의 연출자가 된다. 노라 에프론은 2012년에 작고했고 배리 소넨필드와 로브 라이너 역시 노장의 반열에 들어섰지만, 당시 이들의 번뜩이는 재능 발휘 순간이 이 영화에 담겨있다.
영화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우연히 만나게 된 두 남녀가 있고, 오랜 시간 친구로 지내지만 결국 그 두 사람이 서로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걸 깨닫고 연인이 된다는 가장 기본적인 로맨틱 코미디의 구조를 따라간다. 하지만, 그렇기에 이 영화는 되돌아 보고 싶어진다. 누가 봐도 뻔한 이야기를, 뻔한 결말을 거부하지도 않는 이야기를 영화화 하면서 3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로맨틱 코미디의 어떤 ‘전형’으로 기억되도록 만들었다는 것은 조금 다른 의미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뻔하다’고 생각하는 현대식 로맨틱 코미디의 어떤 규칙들을 재정립한 작품이라는 영화사적 가치가 있다. 알고 나면 뻔해도, 그것을 ‘인지’하기 전까지는 그것이 ‘뻔하다’는 것을 생각하기 어렵다. 동시에, 이 작품에는 그 전형성을 벗어나는 의외의 지점들이 매복해 있다. 삶의 우연성과 보편성을 오가면서. 귀여운 허세 캐릭터와 당당하게 삶을 헤쳐나가는 캐릭터 사이에 발생시킬 수 있는 거의 모든 극적 케미스트리를 터뜨리면서도 서로를 보듬는 성숙한 태도에는 멜로의 하위 장르처럼 취급되었던 로맨틱 코미디를 하나의 메인스트림으로 끌어올리는 파괴력이 담겨있다. 아마도, 그 유명한 ‘카츠 델리’ 식당에서의 ‘가짜 오르가즘’ 장면은 지금 보아도 여전히 ‘빵빵’ 터지기에 부족함이 없다.
로맨틱 코미디이자 성장 동화, ‘사랑의 블랙홀’
‘사랑의 블랙홀’은 최근 한국 SF소설의 주요 장르 중 하나인 ‘루프물’의 로맨틱 코미디 버전이다. 이 ‘루프물’ 이라는 개념이 정립되고 보급될수록 평가가 올라가는 신기한 작품으로, 90년대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단골로 언급되던 작품이기도 하다.
이 작품의 내용은 조금 복잡한데, 퉁명스러운 기상 캐스터 필(빌 머레이)은 매년 2월 2일, 펜실베니아에서 열리는 성축절(성모 마리아의 순결을 기념하는 가톨릭 축일. 겨울이 지나가고 농사를 다시 시작하는 기념일이기도 해서 지난해 수확한 밀가루로 크레페를 만들어먹는 전통이 있다. 성축절의 영어 표현이 ‘Groundhog Day’인데 영화의 원제도 ‘Groundhog Day’다) 행사에 취재를 간다.
물론 필은 툴툴거리고 어서 취재를 마치고 돌아가고 싶어하지만 폭설로 인해 결국 마을에서 하루를 묵게 된다. 그리고, 끝없이 반복되는 2월 2일을 살게 된다. 처음에는 끝없이 반복되는 2월 2일에 재미를 느끼고 못된 장난을 치지만 그것도 지루해지자 결국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으로도 2월 2일을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그는 심경의 변화를 느껴 자기가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주변의 사람들에게 선행을 베풀기 시작하고, 조금씩 삶의 변화를 느낀다. 그리고 이전 알지 못했던 PD 리타(앤디 맥도웰)의 매력을 알게 되어 사랑에 빠진다.
‘사랑의 블랙홀’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온기를 품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지만, 삶을 바라보는 태도에 있어서는 진중한 작품이기도 하다. 주변에 짜증을 내던 사람이 나 자신의 변화를 통해 주변을 바꾸고, 주변을 바꾸자 더욱 훌륭한 인간으로 변모한다. 그렇게 보자면 <사랑의 블랙홀>은 성장동화가 이룩한 어떤 문학적 성취에 가닿은 작품으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 같다.
산드라 블록의 또 다른 매력! ‘당신이 잠든 사이에’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제목이 가진 그 자체로 ‘로맨틱’한 무드 덕에 수없이 다른 영상물의 제목으로 차용되는 작품이다. 당장 ‘꿈’을 주요 소재로 삼은 2017년 드라마 ‘당신이 잠든 사이에’가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산드라 블록과 빌 풀만이 지하철 플랫폼에서 포옹하고 있는 포스터는 워낙 유명해서 그 시절 카페에는 이 영화의 포스터가 걸려있곤 했다. 그러다 보니 너무 익숙해서 ‘본 것 같은데 사실은 안 본’ 영화 목록에 오르는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의 주인공은 시카고에서 철도국 토큰 판매 부스 직원으로 일하는 루시(산드라 블록)이다. 크리스마스날에도 일을 하러 온(가족이 없어 누구라도 꺼리는 크리스마스 당일에 출근한 것) 그녀는 평소에 흠모하던 남자 피터(피터 갤러거)가 불량배에게 떠밀려 선로에 떨어지는 것을 발견, 가까스로 그를 구한다. 이후 루시는 병원에서 피터의 약혼녀로 오해를 받고, 얼떨결에 약혼녀라고 말해버린다. 오해가 오해를 낳고 피터의 가족을 만나게 된 루시. 하지만 그녀를 의심하는 피터의 동생 잭(빌 풀만)을 만나게 되고, 이후 아주 당연하게 루시와 잭은 서로 사랑에 빠진다.
이 영화는 ‘오해’로 인해 형성된 관계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전개된다는 점에 있어서 ‘스크루볼 코미디’의 전통을 따르는 작품이다. 진부할 것 같지만, 이 요소를 잘 다듬어 멋지게 구현해낸다. 지금이야 영화 ‘블라인드 사이드’(이 작품으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는데 바로 전날 최악의 영화 시상식인 골든 라즈베리에서 ‘스티브의 모든 것’으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골든 라즈베리와 아카데미를 동시 석권한 것) 같은 휴먼 드라마나 넷플릭스 영화 ‘버드 박스’ 같은 스릴러에서 강인한 보호자를 연기하고 ‘그래비티’ 에서는 자살충동을 느끼는 우주비행사를 연기한 산드라 블록은 사실 로맨틱 코미디 장르에서 크게 성공한 작품은 드문 편이다.
하지만, ‘당신이 잠든 사이에’는 산드라 블록의 커리어에서 손꼽히는 로맨틱 코미디 히트작이다. 당시 국내에서는 1994년에 개봉한 ‘스피드’로 얼굴을 알린 그녀였기에 로맨틱 코미디에서 어떤 연기를 보여줄지 기대를 모았던 상황. 이 기대를 충족하 듯 산드라 블록은 가족 없이 홀로 사는 ‘캔디’형의 여성으로 우연한 기회에 잭을 사랑하게 되고, 자신에게 없던 가족을 얻는 설렘과 불안감을 연기로 잘 표현했다. 지금 봐도 그녀의 연기는 물론 리즈 시절 미모도 매력적으로 느낄 터. 이 영화를 보게 되면 그녀가 1990년대 중후반에 번뜩이는 재능을 가진 배우였음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이다.
CGV는 오는 26일부터 다큐멘터리 ‘로맨틱 코미디’ 개봉에 앞서 ‘로맨틱 코미디 특별전’을 개최한다. 앞서 소개한 세 작품 외에도 줄리아 로버츠를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한 ‘귀여운 여인’, 세기의 아이콘 마를린 먼로 주연작인 ‘뜨거운 것이 좋아’, 코미디 연기의 귀재 아담 샌들러의 색다른 연기를 맛볼 수 있는 ‘펀치 드렁크 러브’를 만나 볼 수 있다. 과거 삼촌, 이모들의 추억을 소환하고, 로맨틱 코미디 장르의 매력을 다시 한 번 느껴볼 수 있는 기획전을 놓치지 않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