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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의 미로 – 오필리아와 세 개의 열쇠>(2006, 이하 <판의 미로>)는 <셰이프 오브 워터: 사랑의 모양>으로 제90회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 감독상을 거머쥔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최고작 중 하나다. 그의 영화 중 가장 처연하고 환상적인 <판의 미로>는 2007년 제79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촬영상, 미술상, 분장상을 받고 제41회 전미영화비평가협회 작품상을 수상하면서 진즉 감독을 21세기 할리우드의 중요한 작가(author) 반열에 올렸다.
데뷔작부터 꾸준히 뱀파이어(<크로노스>), 거대 곤충(<미믹>), 유령(<악마의 등뼈>)을 등장시키며 ‘괴물들이 사는 나라’를 건설하는 데 독보적 재능을 뽐냈던 감독은 <판의 미로>에 이르러 역사적 상흔과 판타지의 뼈아픈 공존을 파고들었다. 아직 이 영화를 보지 않은, 그래서 곧 눈부신 경험하게 될 분들을 무척 부러워하면서, 5월 2일에 재개봉하는 <판의 미로>를 몇 가지 관전 포인트로 정리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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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미 |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제각기 고유하고 무모한, 영화의 틈새가 궁금하다
기예르모 델 토로 판타지의 정수
내전은 끝났지만, 아직 혼란스러운 분위기가 감도는 1944년의 스페인. 오필리아(이바나 바쿠에로)는 재혼한 엄마 카르멘(아리아드나 길)을 따라 새아버지를 만나러 먼 길을 떠난다. 숲 속 깊은 곳에서 잠시 차를 세운 사이에 소녀는 길 위에 떨어진 비석의 파편을 주워서 원래 자리에 돌려 놓는다. 한쪽 눈을 잃은 상태였던 비석이 마침내 두 눈을 가진 수호신의 형상으로 완성되고, 그 안에서 불쑥 커다란 곤충 한 마리가 튀어나와 마치 요정처럼 소녀 곁을 따라다니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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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불구불한 비포장도로를 달려 오필리아 도착한 곳은 산 밑에 자리한 군대 주둔지다. 생존한 인민군이 숲에 숨어 싸움을 지속 중인 상황에서, 프랑코 정부군은 산 주위에 결계를 치고 잔혹한 소탕 작전을 준비한다. 군 책임자인 오필리아의 새아버지 비달(세르지 로페즈) 대위는 게릴라군으로 몰린 무고한 농민을 맨 손으로 때려 죽이는 것도 마다 않는 지독한 냉혈한이다. 위압적인 아버지의 존재가, 을씨년스러운 산악 지대의 밤이 무섭기만 한 오필리아는 불면의 밤을 보낸다. 이윽고 비밀스레 모습을 드러낸 곤충 요정의 안내와 함께 집 밖을 나선 소녀는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미로처럼 설계된 정원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바로 그 곳에서, 나무의 신 ‘판(더그 존스)’을 만난다.
현실과 공명하는 기괴한 모험담
<판의 미로>에는 빛의 세계를 너무나 동경한 나머지 지상으로 도망친 지하왕국의 공주 ‘모안나’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고 판은 오필리아가 바로 그 모안나라고 속삭인다. 보름달이 뜨기 전까지 오필리아에게 주어진 세 개의 과제를 수행하면, 다시 공주가 되어 안전한 지하왕국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일종의 계시를 내린 것. 이처럼 판타지 장르의 강렬하고 영화적인 매혹으로 관객을 유인한 영화는, 환상의 장막을 서서히 들춰내며 스페인 역사의 상처로 나아간다. 스페인 내전(1936~1939)은 인민전선 내각이 집권하자 프랑코 장군이 군부 반군을 조직해 벌인 비극적인 전쟁이다. <판의 미로>의 배경은 이미 프랑코 정권이 들어선 어느 때로, 힘 없는 시민들을 둘러싼 억압과 공포 정치의 위용이 횡행하는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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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차가울수록 환상은 격렬해진다고 했던가. 비달 대위의 가정부인 메르세데스(마리벨 베르두)가 게릴라군을 돕기 위해 몰래 대위의 열쇠를 훔치는 서늘한 장면이 있는데, 이는 악몽처럼 끔찍한 경험을 이겨내고 황금열쇠를 손에 넣어야 하는 오필리아의 첫 임무와 짝을 이룬다. 어른들이 피를 흘리며 싸우는 동안, 소녀의 무의식 또한 외부의 파시즘에 강렬히 저항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절묘한 연결인 셈.
<판의 미로>는 하나의 슬픔을 두 개의 버전으로 나누어 보여주면서, 두 개의 눈(오프닝 시퀀스의 비석, 손바닥에 눈을 끼운 괴물 등)이미지를 종종 상기시킨다. 비슷한 맥락에서 <판의 미로>를 가득 메우고 있는 동화적 상상력은 그 어떤 것도 단면적이지 않다는 점에서 새삼 중요하다. 아름답고 먹음직스러운 것은 이내 끔찍하고 부패한 것으로 변하고, 신비로운 생명체는 언제든 기괴한 괴물로 모습을 바꿀 수 있다. 이 이중성과 평행성을 기예르모 델 토로 판타지의 섭리라고 불러도 좋겠다.
독보적인 비주얼, 풍성한 상징과 은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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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시네마틱한 미덕을 중시하면서 현실의 역사적 조각도 허술하게 다르지 않은 작품은 그리 많지 않다. 두 가치의 공존이 <판의 미로>를 진정 더욱 섬세하고, 또 처절하게 만든다.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의 세 번째 장편영화 <악마의 등뼈>(2001)도 이와 비슷했다. 스페인 내전 중 고아원에 들어간 소년이 누군가의 유령을 보게 되면서, 죽은 이의 억울한 죽음을 파헤치고 나아가 대신 복수한다는 이야기다.
<악마의 등뼈>는 10살 소년 카를로스가 앓는 내전의 트라우마를 유령과 영혼의 움직임으로 치환했다. 한편 <판의 미로>에 더욱 직접적인 영향을 끼친 작품으로 스페인의 거장 빅토르 에리세 감독의 <벌집의 정령>도 꼽을 수 있다. 한층 더 깊고 고요한 세계를 지향하는 <벌집의 정령>에는 조용하고 몽상적인 6살 소녀가 나온다. 역시 스페인 내전 직후를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는 소녀가 상상 속 존재였던 프랑켄슈타인 괴물을 만나고, 외딴 곳에 버려진 집에서 다친 게릴라군을 만나는 과정을 비선형적 내러티브로 풀어냈다.
이처럼 고단한 세계의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현실을 벗어나려 하고, 지칠 줄 모르는 환상은 점점 더 아름답고 위태로워진다. 그리고 기예르모 델 토로 감독은 많은 예술가들이 매료되었던 이 서사에 자신만의 독보적인 비주얼, 풍성한 상징과 은유를 더해내면서 <판의 미로>를 잊을 수 없는 경험으로 완성시켰다.
마음을 할퀴고 또 어루만지기를 반복하는 이 잔혹 동화에 관해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점은, 영화를 다 보고 난 뒤에도 관객 각자의 믿음에 따라 엔딩의 의미가 다르게 파생된다는 사실이다. 한 가지 경우를 미리 말하자면, 나는 아직까지 이 영화만큼 ‘처참한 해피 엔딩’을 또 본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