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장들의 신작 만찬이 벌어졌던 제71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에 돌아갔다. 이와 함께 화제를 불러일으킨 영화가 또 있었는데, 바로 <가버나움>이었다. 배우 겸 감독 나딘 라바키(<가버나움>에서도 주인공 소년의 변호사로 출연했다)는 세 번째 연출작 <가버나움>은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고소하는 한 소년의 삶을 카메라로 가감 없이 담은 작품으로 심사위원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수상은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것. 과연 심사위원들과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 <가버나움>의 매력은 무엇일까? <가버나움>을 설명하는 세 가지 키워드를 통해 알아본다.
박지한 |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영화가 선물해준 빛나는 순간을 나눕니다
성경 속 지명인 ‘가버나움’
영화의 제목 ‘가버나움’은 성경, 그 중에서도 신약에 등장하는 지명이다. 예수의 두 번째 고향으로 꼽힐 정도로 예수와 크게 인연이 있는 곳인데, 이스라엘 갈릴리 호수 북쪽 끝에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예수는 이곳에서 사역하며 숱한 기적을 일으켰다. 예수의 제자 마태는 이곳에서 제자로 부름을 받았고, 숱한 환자들을 살렸다고 전한다. 앓아 누운 베드로의 장모, 들것에 실려온 중풍환자, 백부장의 하인 등을 고친 예수는 이곳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에 관한 말씀을 전하기도 했는데, 가버나움의 시민들은 회개하지 않았다.
예수는 이곳이 멸망하게 될 것이라 예언했고 실제로 6세기부터 이곳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았다. 그리고 7세기 초, 페르시아의 침략을 받아 폐허가 되었다. 예수의 예언 그대로 이뤄진 셈이다. 20세기에 들어서 유적이 발굴되어 ‘텔 훔’이라는 지역명으로 현재는 성지순례의 한 코스가 되었다. 즉 ‘가버나움’은 한 때 신의 축복이 있었던, 하지만 지금은 폐허가 되어버린 곳을 상징한다.
나딘 라바키의 영화 <가버나움>은 이스라엘이 배경이 아닌 ‘레바논’의 수도 ‘베이루트’가 배경이지만, 이곳은 성경에서의 가버나움이 그러하듯 시민들은 ‘신의 축복’을 빌어도 이미 완전히 폐허가 되어버린 곳이다. 레바논은 동성애자에 사형을 내리는 아랍권의 타국가들과 다르게 동성애자들의 해방구이며, 타 아랍권 국가들보다 개방적인 문화 풍속을 가진 나라이지만, 동시에 오랜 내전으로 행정력이 마비된 국가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딘 라바키의 카메라는 유연하게 움직여 베이루트 최하층 계급의 거주지로 착지한다.
<가버나움>은 ‘불행 포르노’?
영화의 주인공인, 약 12세로 추정되는 소년 자인(자인 알 하지)은 ‘본인을 태어나게 한 죄’로 자신의 부모를 고발한다. 이 납득할 수 없는 고발 사유로 인해 재판이 열리는 법정에 관심이 집중되고, 자인은 자신의 삶을 법정에서 증언한다. 그리고 소년의 입을 통해 지금 현재 베이루트의 하층민들, 신이 버린 폐허에서의 삶이 플래시백으로 재현된다.
믿기 힘들겠지만 126분이란 러닝타임 안에 담겨있는 사회 고발성 주제들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매매혼, 마약, 아동노동 착취에 난민 ‘사업’(돈을 받고 타국으로 옮겨주는 브로커들)에 이르기까지. 영화가 그리는 베이루트는 간결한 표현으로 ‘지옥’에 가깝다.
실제로 <가버나움>에 대한 비판적 태도에는 이런 부분에 대한 지적이 존재한다. 말 그대로 ‘불행 포르노’가 아닌가 하는. 사회 고발적 르포라는 다큐멘터리적 태도 뒤에 숨겨진 관음적 선정성을 지적하는 시선 역시 존재한다. 이 부분에 대해선 많은 토론이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조금 다른 부분을 생각해보고 싶다. 거시적이고 대의적이며 정치적인 주제들을 전부 제거하고 말이다.
‘책임감’ 그리고 ‘자애로움’
주인공 ‘자인’의 삶에서 선명하게 보이는 것은 ‘책임감’ 그리고 ‘자애로움’이다. 비록 자인은 평균적인 성인의 수준을 훨씬 웃도는 비속어 사용으로 점철된 언어관을 가지고 있으나, 적어도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안다. 동시에 자신이 감당해야 할 것 보다 훨씬 더 많은 짐을 기꺼이 짊어지고 가려 한다. 그야말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 박해 받으면서도 전진하는 고행의 인간. 성경을 인용해보자면 ‘애통하는 자’ 자인으로 인해 많은 이들은 위로를 받는다. 서글프고 고달픈 자신의 삶만큼이나, 어쩌면 더욱 고달플 이들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버텨 나가려는 자인의 태도는 그만큼 신실하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 마태복음 5장 4절
그리고 마침내 자인이 도저히 자신의 능력만으로는 돌파할 수 없는 난관에 도달했을 때 자인은 법정으로 온다. 과연, 자신의 나이조차 모르는. 12세로 ‘추정’되는 소년이 보여준 타인에 대한 헌신과, 소년이 자신의 육신으로 증명해낸 인간의 조건 앞에서 회개하지 않는 폐허의 시민들은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
<가버나움>은 이 지점을 준엄하게 묻고 있다. 그리고 엔딩에서, 나딘 라바키는 애통하는 자가 ‘복’을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이 해낼 수 있는 도의적이면서도 윤리적인 타협점을 제시한다. <가버나움>은 야만의 시대를 견뎌내며 애통하는 자들에게 우리가 가져야 할 최소한의 예의를 고민하는 영화다.
약 2시간에 동안 펼쳐지는 <가버나움>의 지옥도를 두 눈으로 지켜보기란 힘든 고행과도 같다. 하지만 홀로 불구덩이 속에 갇혔음에도 자신보다 약한 자들을 위해 애쓰는 ‘자인’의 모습에서 뜨거운 감동과 홍해가 갈리지는 듯한 작은 기적을 맛볼 수 있다. 참고로 자인을 비롯한 아역 배우들은 전문 연기자가 아닌 해당 역할과 비슷한 환경, 경험을 가진 실제 인물들.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 기적은 영화에서만 이뤄지지 않았다는 큰 감동이 밀려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