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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1월 5일 우리나라 최초의 하얀 설탕이 쏟아지던 날. 그로부터 70년이 지났습니다. 종합식품회사에서 식품·생명공학·유통·엔터테인먼트의 4대 사업군을 선도하는 미래 라이프스타일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CJ가 걸어온 도전과 개척, 창조와 성취의 여정을 돌아봅니다. 1980년대 중반부터 한국의 음식 문화엔 엄청난 변화가 있었습니다. 비약적인 경제성장으로 국민들의 외식 소비가 폭발적으로 늘던 시기였죠. 햄버거, 피자, 프라이드치킨을 필두로 세계적인 패스트푸드 업체들이 한국인 입맛을 공략하기 시작했습니다. 패밀리 레스토랑 등 외국계 프랜차이즈 외식업체들이 한국에 상륙해 젊은 층을 중심으로 외식문화를 급격히 변화시켰고요. 대기업들이 외식 사업에 속속 진출하면서 90년대 우리나라 외식 산업은 연평균 10%씩 성장했습니다. 내수 식품 산업에 주력하던 제일제당이 외식 사업 등으로 포트폴리오를 넓히며 외연을 확장한 시기도 이때입니다. 이 시기 제일제당에선 ‘빕스’ ‘뚜레쥬르’ ‘햇반’ 등 지금까지 국민들에게 오래도록 사랑받는 CJ의 대표 식품 브랜드들이 생겨났습니다. 이들의 시작은 어떤 모습이었을까요? CJ뉴스룸이 1990년대로 시계를 돌려볼게요. 부담 없는 패밀리 레스토랑… ‘스카이락’을 기억하시나요? 1994년 9월 9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에 ‘스카이락’이 문을 열었습니다. 햄버그스테이크, 스파게티, 샐러드 등 양식 메뉴 100여 종을 팔던 1세대 패밀리 레스토랑이었죠. 일본 최초의 패밀리 레스토랑 체인이던 스카이락을 한국으로 들여온 게 제일제당이었습니다. 종합 외식 서비스 기업 ‘CJ푸드빌’의 시초가 된 사업입니다. 1993년 독립경영을 시작한 직후였습니다. 그 무렵 외식 산업은 가능성이 무궁무진했죠. 1988년 6조 5000억 원이던 국내 외식 산업 규모가 1994년 18조 원으로 세 배 가까이 뛰었습니다. 그 무렵 제일제당은 설탕·밀가루·조미료·식용유부터 냉동식품·육가공 식품까지 생산하며 우리나라 최고의 식품기업으로 위상을 굳혔습니다. 그러나 식품 소재만으로는 성장에 분명한 한계가 보였죠. 신사업 동력을 고민하던 제일제당에게 외식 사업은 큰 기회이자 도전으로 다가왔습니다. 제일제당은 1994년 2월 외식사업부를 신설하며 본격적으로 새 사업에 첫 발을 내디뎠습니다. 김정순 당시 사장이 일본을 직접 방문해 기술 도입 계약을 맺었죠. 스카이락은 전 세계 9000여 개의 점포를 개설할 정도로 외식 사업 경험이 풍부했습니다. 가격대도 합리적이어서 외식 사업 초창기인 우리나라 사정에도 적합했지요. 젊은 세대가 즐겨 찾던 강남구 논현동에 부지를 마련한 스카이락은 오픈 즉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습니다. 스파게티, 피자 등 수십 가지 메뉴를 저렴한 가격으로 맛볼 수 있어 특히 젊은 층들이 환호했죠. 저가 브랜드라는 한계에도 불구, 제일제당의 외식사업에 중요한 교훈과 노하우를 안겨준 사업이었습니다. 우리 입맛대로, 100% 국산 패밀리 레스토랑 ‘빕스’ 1990년대 중반은 ‘패밀리 레스토랑 전성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소비 밀집 지역에선 ‘한 건물 건너면 패밀리 레스토랑’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왔죠. 스카이락 14개 지점을 운영하던 제일제당에게도 특별한 전략이 필요했습니다 “해외 업체들에게 로열티를 지불하면서 외국에서 개발된 메뉴로 승부한다면 아무리 잘해도 2등이다.” 당시 경영진의 판단이었습니다. 1996년 제일제당은 ‘우리의 브랜드로 우리 입맛에 맞는 메뉴’를 내건 토종 브랜드 진출을 확정했습니다. “스테이크와 해산물 요리를 중심으로 하는 패밀리레스토랑을 만들 계획입니다. 스카이락을 통해 운영 노하우를 익힌 만큼 이번에는 독자적인 브랜드로 시장에 진출해야 합니다.” 그렇게 1997년 3월 25일, 국산 패밀리레스토랑의 신기원을 연 ‘빕스(VIPS)’가 탄생했습니다. 모든 고객을 VIP로 대접하겠다는 서비스 정신이 담긴 이름이었습니다. “빕스는 제일제당의 40년 노하우가 담긴 고급 패밀리 레스토랑입니다. 이 패밀리 레스토랑에 의의가 있는 것은 외국에 로열티를 지불하지 않는 국내 토종 브랜드라는 데 있습니다. 그간 우리 입맛에 맞는 메뉴 개발을 위해 정성을 다했습니다. (중략) 빕스는 우리 국민들에게 새로운 외식문화를 안겨줄 것으로 기대됩니다.” 이재현 당시 부사장의 성공 기원은 오픈과 동시에 현실이 되었습니다. 개점 4개월 만에 10만 명이 넘는 고객이 빕스를 찾았고 주중 주말할 것 없이 높은 고객 회전율로 인기를 증명했습니다. 특히 우리나라에서 첫선을 보인 ‘샐러드 바’는 큰 화젯거리였죠. 우리 입맛에 맞춘 차별화된 맛은 빕스를 국내 패밀리 레스토랑의 선두 주자로 우뚝 서게 했습니다. 식품업계 최초 매출 2조 원 달성! ONLYONE으로 한계 돌파 독립 이전인 1992년 제일제당의 매출액은 1조 2600억 원이었습니다. 4년 뒤인 1996년 제일제당은 매출액 2조 366억 원을 기록해 식품 업계 최초로 2조 원을 돌파했습니다. 불과 4년 만에 두 배 가까운 매출 신장을 이뤄낸 것입니다. 외환위기를 앞두고 우리나라 경제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분석이 나오던 때였습니다. 어려운 시기 사양사업군으로 분류되던 식품 부분에서 이뤄낸 성과라 더 의미 있었죠. 2조 원의 매출은 단일 기업 가운데 30위였고, 어지간한 중견 그룹의 전체 매출액과도 같은 규모였습니다. 그 배경엔 ‘ONLYONE’ 정신에 바탕을 둔 끊임없는 제품 개발, 고객 만족을 최우선으로 추구해온 기업정신이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외식 분야 등 신규 사업 진출도 매출 실적의 큰 부분을 차지했습니다. ‘단체 급식’도 제일제당… 40년 노하우를 발휘하다 1993년 제일제당 신사업팀은 식품 분야의 또 다른 신사업으로 ‘단체 급식 사업’을 제안했습니다. 빠른 경제 성장과 여성의 사회 진출 증가로 단체 급식 시장은 급성장 중이었습니다. 40여 년간 식품소재산업을 이끌며 노하우를 쌓아온 제일제당이 진입하기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죠. 제일제당은 이듬해인 1994년 5월 3일 푸드서비스 사업부를 신설하고 본격적인 사업 참여를 선언했습니다. 식자재 유통 및 푸드서비스 전문 기업 ‘CJ프레시웨이’의 시작입니다. 제일제당은 당시 일본 내 푸드서비스 분야 1위 기업이었던 시닥스사와 기술제휴 계약을 맺고 5만 명에게 음식을 공급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축했습니다. 1995년부터는 남산 본사 사옥과 12개 사업장의 사원식당을 시범 운영했는데, 직원들의 만족도가 매우 높았죠. 사업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내 단체급식 시스템을 완비한 것입니다. 1995년 8월 24일 신사업팀이 드디어 첫 번째 계약을 따냈습니다. 경산대학교 한의대 구내식당을 위탁 운영하기로 한 것입니다. 이후 경제 불황이 닥치며 단체급식사업이 크게 성장했습니다. 기업과 병원 등이 비용 절감을 위해 단체급식 시스템을 속속 도입했기 때문이죠. 제일제당은 시장 진출 1년 만에 전국 50여 개 기업, 학교, 병원, 군부대 등과 위탁급식 운영 및 식자재 공급 계약을 체결했습니다. 시장 진입 첫해에 올린 매출만 200억 원으로 예상을 뛰어넘는 수치였죠. 이후 식사 제공량을 최대 5만 명에서 10만 명으로 두 배 이상 늘리고 카페테리아 방식으로 메뉴를 다양화하는 등 타 업체와 차별화 노력을 이어갔습니다. 이런 노력은 실적으로 이어졌습니다. 당시 규모가 가장 크면서도 까다롭기로 이름난 대한항공과 서울시청 구내식당을 운영하게 된 것입니다. 1997년 7월 25일엔 시장 진출 2년 만에 100호점 계약을, 1999년 8월 31일엔 300호점 계약을 이뤄냈습니다. 업계에서 유례없는 성과였습니다. 2023년 현재 CJ프레시웨이는 단체급식뿐 아니라 식자재 유통과 외식 컨설팅을 제공하는 푸드 서비스 기업으로 거듭났습니다. 올해 1분기 기준 식자재를 납품하는 전국 외식 가맹 점포 수는 1만 곳을 넘어섰습니다. 제일제당 최초의 프랜차이즈, ‘뚜레쥬르’의 건강한 탄생 90년대 중반 우리나라 프랜차이즈 산업은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베이커리도 마찬가지였지요. 1995년에는 크라운베이커리·파리크라상·고려당·신라명과 등 11개 브랜드가 682개 점포를 개점하는 등 시장경쟁이 치열했습니다. 이들 업체가 전체 65.2%를 차지할 정도로 시장의 벽이 높았고요. 그러나 제일제당은 이미 수십 년에 걸친 식품 사업으로 높은 경쟁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우수한 원료, 기술력, 냉동 유통 기술, 유통망 등을 활용해 기존의 베이커리 전문점들과의 차별화 요소를 집중 발굴했습니다. 핵심은 빵의 ‘신선도’였습니다. 최고급 원료를 활용하고 매일 매장에서 빵을 세 차례 직접 구워 판매한다는 전략이었죠. 당시 다른 브랜드들은 매장에서 빵을 굽지 않고 완제품을 데워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또 또 체내 당 흡수율을 줄이는 프리미엄 설탕 ‘자일로스’와 호밀·사과 등을 자연 발효해 얻은 천연 발효종 등의 재료를 활용했습니다. ‘빵은 건강에 좋지 않다’는 해묵은 편견 대신 ‘빵으로 건강을 지킨다’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것입니다. 제일제당은 신선도를 높이기 위해 ‘냉동생지’ 방식을 적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빵을 반죽부터 성형까지 마친 상태로 냉동 보관하다가 영업점에서 2차 발효와 굽기를 거쳐 완제품을 만드는 방법입니다. 판매량에 따라 생산을 조절할 수 있어 시간과 경비도 절약할 수 있었죠. 이름은 ‘뚜레쥬르(Tous les Jours)’로 지었습니다. 프랑스어로 ‘매일매일’이라는 뜻입니다. 처음 이 이름이 제안되었을 땐 발음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반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제일제당은 당시부터 해외 진출을 고려해 이 이름을 밀어붙였죠. 1997년 9월 1일, 경기도 구리시 교문동에 뚜레쥬르 가맹 1호점이 문을 열었습니다. ‘매일 새롭게 구운 빵’은 베이커리 업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자체 개발한 전산시스템·POS 시스템은 물론, 베이커리 업계 최초의 고객 마일리지 제도 등도 화제였습니다. 선진 서비스 시스템에 우수한 맛과 품질이 더해지며 뚜레쥬르 점포당 일일 매출액은 80만 원대로 올라섰습니다. 당시 제일제당은 IMF 외환위기로 퇴직하는 임직원들과 점포 개설 계약을 맺어왔습니다. 뚜레쥬르가 인기를 모으면서 제일제당은 가맹점 계약을 일반인에게도 확대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수많은 샐러리맨들이 거리로 내몰리는 상황에서 프랜차이즈 업종은 중요한 새 출발의 기회가 되어주었습니다. 제빵 인력 양성을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습니다. 영등포공장에서 매일 무료로 제빵 기술을 교육했습니다. 2001년에는 서울과 부산에 제빵훈련원과 기술 아카데미를 설립해 전문 교육을 시행했습니다. 그동안 뚜레쥬르 가맹점은 크게 늘어 1999년에는 214개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습니다. 25년이 지난 지금 뚜레쥬르는 1300여 개의 가맹점을 보유 한 장수 브랜드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건강함과 신선함의 가치를 담은 빵, 케이크, 커피 등을 통해 소비자에게 일상의 행복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일제당에서 밥이 나왔어요” 햇반의 탄생 1990년대에 시작된 제일제당의 히트상품이 하나 더 있습니다. ‘햇반’입니다. 1980년대 후반, 여성의 사회 진출로 맞벌이가 늘고 핵가족화가 보편화되면서 간편식품 선호도가 높아졌습니다. 주식인 ‘밥’에 대한 간편식 수요는 커질 수밖에 없었죠. 시장 변화를 알아본 제일제당은 1989년부터 즉석밥 개발에 나섰습니다. 1992년 다른 기업들이 냉동 방식의 즉석밥을 시장에 출시했지만 시장의 반응은 미미했습니다. 밥맛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죠. 제일제당도 밥을 지은 다음 급속 탈수한 ‘알파미’, 밥을 지어 얼린 후 얼음을 증발시키는 ‘동결건조미’ 등 여러 방식을 시도했지만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식품연구소에서 개발한 즉석밥은 직원들을 모두 놀라게 했습니다. 포장을 뜯은 후에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고, 시식을 위해 밥을 입에 넣자 고소한 풍미가 입안 가득 들어찼습니다. 1994년의 일입니다. 오랜 연구 끝에 가장 적합한 밥의 제조법과 보관 방법을 개발한 것입니다. 문제는 예산이었습니다. ‘클린 룸’ 등 생산 설비를 갖추는 데만 100억 원이 필요했습니다. 사내에선 반대 의견이 거셌습니다. “집에서 직접 해 먹는 게 밥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소비자들이 과연 즉석밥을 사 먹을까? 실패 가능성이 높은 프로젝트에 100억 원은 과하지 않은가?” 제일제당은 대대적인 소비자 조사를 시행했습니다. 가장 좋은 품질의 이천쌀로 밥을 짓고 무균포장법으로 시제품을 만들었죠. “정말 맛있다. ‘집밥’이 생각난다”. 테스트 결과는 한결같았습니다. 1996년 3월, 제일제당은 무균포장법 설비 구축을 위해 100억 원의 투자를 단행했습니다. 제품명은 ‘방금 지은 맛있는 밥’이라는 의미가 담긴 ‘햇반’으로 결정했습니다. ‘제일제당에서 밥이 나왔어요’라는 카피의 TV 광고는 즉시 화제를 불러일으켰죠. ‘밥은 엄마가 차려주는 것’이라는 뿌리 깊은 고정관념이 햇반과 함께 서서히 흔들렸습니다. 출시 직후부터 돌풍을 일으켰던 ‘햇반’은 15일 만에 2억 5000만 원어치가 팔려나갔습니다.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이 시작된 5월에는 월평균 8억 원의 매출을 기록해 최초 목표를 두 배 이상 뛰어넘었습니다. 1997년 470만 개의 매출 실적을 올린 햇반은 이듬해에는 720만 개의 판매 기록을 수립했습니다. 한 언론은 햇반의 성공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햇반은 비록 상품밥 시장에서 경쟁업체들에 선점 기회를 내줬지만 ‘무균포장밥’이라는 차별화된 카테고리를 창출해 새로운 시장을 개척했다. CJ제일제당이 올해 실시한 조사에 따르면 소비자의 95% 이상이 즉석밥으로 가장 먼저 햇반을 떠올린다. 햇반의 혁신 유형을 정확히 간파하고 지속적인 투자를 한 CJ제일제당 경영진의 뚝심도 빼놓을 수 없는 성공 포인트다. 1인 가구 증가 등 라이프스타일 변화에 비춰봤을 때 혁신을 지속할 경우 매출이 폭발적으로 치솟는 변곡점이 분명히 올 것이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 <신동아> 2011년 12월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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