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11월 5일 우리나라 최초의 하얀 설탕이 쏟아지던 날. 그로부터 70년이 지났습니다.
종합식품회사에서 식품·생명공학·유통·엔터테인먼트의 4대 사업군을 선도하는 미래 라이프스타일 기업으로 자리매김하기까지. CJ가 걸어온 도전과 개척, 창조와 성취의 여정을 돌아봅니다.
2화. 새로운 도전, 제분사업에 뛰어들다
우리나라 국민 평균 하루 세끼 중 한 끼에는 꼭 먹는 이것, 바로 ‘밀가루’입니다. 조선시대 당시 진가루라고 불린 밀가루는 귀한 고급 식재료로, 주로 궁과 사대부 양반가에서 오직 특별한 날에만 먹을 수 있었는데요. 오랜 전통을 가진 밀가루는 우리 근현대사의 굴곡을 함께 견뎌온 식재료로, 과거부터 현재까지 우리의 입맛을 책임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밀가루가 우리의 주된 식재료가 된 시기는 언제였을까요?
밀가루 시대를 책임지고 있는 CJ의 또 다른 도전, 제분사업 진출기를 지금 만나봅니다!
하루 한 끼는 먹는 밀가루를 우리 손으로
1958년 8월 7일, 재무부가 공개한 전국 다액 납세자 조서에서 제일제당은 1위를 차지했습니다. 세금을 가장 많이 냈다는 건 매출이 가장 높은 기업을 뜻하는 만큼 제일제당은 뜻깊은 기록을 세우게 되었죠. 기쁜 소식임은 분명했지만, 1950년대 후반 제일제당의 상황은 그리 좋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설탕 판매가 예전만 못했기 때문인데요. 공급은 수요를 초과했고 설탕 소비량은 점차 줄어드는 상황이었습니다.
이에 제일제당은 신중한 고민 끝에 설탕을 기반으로 삼을 수 있는 새로운 사업 분야, 제분업에 진출했습니다.
밀가루는 설탕과 밀접한 거래 품목이었고,
설탕 취급 대리점에서 제분사업을 함께 해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두 업종을 병행한다면 작업 시간 조정이나
인력 운용 면에서 유리한 점이 많을 것이다.
제분 공장은 우리 기술로 지읍시다
제분사업에 진출함과 동시에 제일제당은 밀가루의 원료인 소맥을 배정받기 위해 공장 건설을 서둘렀습니다.
우리에겐 제당공장 건설 경험이 있습니다.
그때는 경험이 부족해 일본 설비를 사용했지만
이제 우리는 노하우가 있습니다.
제분공장은 우리 손으로, 우리 기술로 지어
국민에게 희망을 주도록 합시다.
1958년 2월, 거대한 철골 구조물이 완성되었습니다. 36기의 제분기와 1,700t 규모의 사일로(저장고) 3기, 원심력 릴, 피 분리기 등 당대 최대 규모이자 우리 손으로 직접 만든 설비가 설치되었죠. 마침내 1958년 3월 5일, 제일제당 제분공장이 완공되었습니다.
첫 브랜드로 이룬 최고의 시장 점유율
1958년 5월, 첫 제품이 출하되었습니다. 제일제당은 경쟁사와의 차별화를 위해 제품 등급에 따라 각각 다른 브랜드를 붙였습니다. 1급분은 ‘삼성’, 2급분은 ‘월세계’, 3급분은 ‘미인’이란 이름으로 출시되었습니다. 당시 제일제당 밀가루는 시장점유율 8.3%를 차지했는데요. 이는 생산을 시작한 지 8개월 만에 거둔 실적일 뿐 아니라 신생기업 가운데에는 최고의 시장점유율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상승세도 잠시, 밀가루의 원료인 소맥 부족 현상과 제당 원료의 양까지 부족해지면서 공장 가동을 중지해야만 했는데요. 제분업계와 제당업계를 파국으로 몰아넣었던 삼분파동의 어두운 그림자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설탕·밀가루 원료 가격 폭등, 어떻게 위기를 넘었나
1962년 톤당 63달러 선이었던 국제 원당 가격은 이듬해 277달러까지 폭등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제당산업이 시작된 이래 원당 가격이 이처럼 폭등한 적은 없었죠. 일부 유통업자들은 설탕 사재기를 일삼기도 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추운 날씨로 인해 인천항이 얼어붙으면서 소맥분 도입도 지연되었습니다. 당장 원료를 구하지 못해 상당수 제분기업들이 가동을 중단하게 되었고, 밀가루 역시 품귀 현상을 빚으면서 설탕과 마찬가지로 가격이 폭등했습니다.
쌀값 상승은 밀가루 폭등으로 이어졌고, 밀가루 폭등은 다시 쌀값 폭등을 불렀습니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가격 인상을 부추기는 형국이었죠. 삼분파동은 제조업체의 의지와는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유통 과정에서 생긴 무질서와 국제 원료 가격 급등이 주된 원인이었죠.
이에 제일제당은 중간 유통을 배제한 직접 판매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중간 이윤을 없애는 한편 도∙소매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부당이득의 근거를 없애기로 결정했습니다.
1963년 2월, 제일제당은 부산에 10여 개의 직매소를, 서울에는 15개의 직매소를 설치했습니다. 판매 시간은 오전 8시부터 오후 7시까지로 확대하고, 일부 사재기에 악용될 소지를 막고자 한 사람당 판매량을 600g으로 제한했죠. 정부와 업계 그 어느 쪽도 손쓰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제일제당은 신속한 조치로 유통 질서를 확립하고자 노력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이 있어서일까요? 1963년 이후 설탕과 밀가루 가격 폭등은 점차 진정되었습니다.
핵가족 시대 간편하게 즐기는 백설표 프리믹스
1976년을 기점으로 국제 원맥 시세가 하락하고 정부의 지원정책에 힘입어 제분업계는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경기가 안정되자 제일제당은 지속 성장을 추구하겠다는 의지로 새로운 시장으로의 진출을 계획했습니다.
그 시장은 바로, 맛과 간편성 모두를 잡은 ‘프리믹스’였습니다. 지금은 익숙한 프리믹스지만, 당시에는 낯설기만 한 제품이었는데요. 하지만, 제일제당은 당시 맞벌이와 핵가족의 등장에 따라 간편한 식문화로 변화하고 있는 트렌드에 주목했습니다. 또한 글로벌화가 진전되면서 서구 메뉴의 보급이 활성화되는 상황 속 소비자의 기호에 맞는 다양한 신제품 출시에 주목했고, 1960년대 후반부터 프리믹스 개발 및 생산을 검토했습니다.
이러한 트렌드에 맞춰 제일제당이 처음 개발에 나선 것은 도넛가루와 핫케이크 가루였습니다. 적합한 베이킹파우더를 만들기 위해 수없이 많은 베이킹파우더를 만들어냈고 1977년 2월, 도넛가루와 핫케이크 가루 2종의 프리믹스 시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죠. 제일제당은 제분 부문에서 국내 최초로 프리믹스 제품을 개발하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했습니다.
제일제당은 이어 서구식 제품 일변도에서 벗어나 한국형 제품인 ‘백설표튀김가루’, ‘백설표녹두빈대떡가루’ 등을 잇달아 내놓았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제일제당은 1980년 프리믹스 4,350t을 생산, 매년 평균 120%의 놀라운 증가율을 기록했고, 제일제당은 국내 프리믹스 시장을 주도하며 1980년대 제분사업의 안정적인 기틀을 마련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식품업계 최초 매출 1조 기업으로 도약하다
1985년 7월 1일 제일제당은 동립산업을 흡수∙합병하며 제분사업에 새로운 전기를 맞았습니다. 동립산업은 삼양사와 대한제당을 포함한 제당 3사가 1978년부터 공동 관리해온 회사로, 영등포공장을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었는데요. 영등포공장은 일일 제분 생산 능력 600t, 프리믹스 생산능력 40t을 갖추며 기존의 부산공장에 이어 제일제당 제분사업의 새로운 요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이를 계기로 제일제당은 제분업계 전국 시장점유율 1위 기업으로 도약하는 데 성공할 수 있었죠.
제일제당은 단순한 밀가루 가공업의 한계를 극복하고 혼합기술을 개선한
다수의 프리믹스 제품을 연이어 출시, 제품의 다양화를 통해 업계를 리드해나갔다.
제일제당은 이후에도 수많은 위기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어려운 상황에서도 최고의 품질개발과 트렌드를 반영한 차별화된 신제품 개발, 신규시장 확대를 계속 모색해나갔습니다. 그 결과 연평균 30%의 놀라운 성장률을 기록한 제일제당은 1991년 매출 1조 원 시대를 맞이하기도 했죠. 설탕과 밀가루를 시작으로 우리나라 식품 트렌드를 이끌어온 CJ는 오늘날 ‘비비고 만두’로만 연 매출 1조 원을 돌파하며 ‘K푸드 대표주자’로 해외 소비자들의 입맛까지 사로잡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