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아카데미 시상식은 백인/남성 위주의 차별적인 행사로 꾸준히 비난 받았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수상작뿐만 아니라 시상자 지정에도 여성 및 다양한 인종의 영화인들을 안배해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가 눈에 띈다. 이런 변화의 흐름에 <기생충>은 6개 부문 노미네이트가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영화제가 아니라 시상식이고, 로컬 행사이지만 전 세계 이목이 집중되는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은 어떤 영화가 받게 될까? 옥미나 큐레이터가 <기생충>을 포함한 총 9편의 작품을 소개한다.
옥미나 | 영화 평론가
영화를 통해 사람과 세상을 배웁니다
결혼만큼 새로운 시작은 이혼! <결혼 이야기>
먼저 노아 바움백 감독의 <결혼 이야기>는 결혼이라는 것이 모든 로맨스가 꿈꾸는 완벽한 해피엔딩이 아니라 새로운 생활의 시작을 의미하듯, 이혼 역시 분노와 증오의 비극적인 파국이 아니라 또 다른 형태의 생활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섬세하게 그려낸다. 부부는 이혼으로 끝을 맺지만 아이가 중심에 놓인 가족의 연결 고리는 아이가 성장하는 내내 서로에 대한 양보와 배려를 통해 일상으로 단단히 이어져야 하는 것이다. 좌절과 분노, 용서와 이해의 감정들을 능숙하게 넘나드는 스칼렛 요한슨과 아담 드라이버의 연기가 빛난다. 작품상 보다 기대를 모으는 건 여우주연상. 올해 스칼렛 요한슨은 여우주연상과 여우조연상(<조조 래빗>) 양쪽에 이름을 올렸으니, 뭐든 하나라도 받아 가지 않을까.
그레타 거윅 버전의 19세기 여성들의 삶 <작은 아씨들>
<작은 아씨들>에는 우리가 이미 알고 있었던 이야기들과 우리가 미처 몰랐던 이야기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촘촘히 얽혀 있다. 가난하지만 다정한 네 자매에 관한 원래의 이야기에 그레타 거윅 감독은 작가를 꿈꾸는 조(시얼샤 로넌)를 주인공으로 삼아 1860년대 여성의 삶의 무게에 관한 퍼즐을 완성한다. 시대의 공기를 머금고 새로워진 네 자매들은 허영과 변덕을 부리는 대신, 인생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을 진진하게 고민하는 입체적인 캐릭터로 다시 태어났다. 지난해 <레이디 버드> 작품상, 각본상 후보에 그치고 만 그레타 거윅은 이 영화로 또 한 번 수상에 도전, 가능성은 각색상에 좀 더 무게추가 실린다.
로컬의 장점으로 쾌속 질주! <포드 V 페라리>
시간과 공간의 감각을 모두 지워버린다는 7,000RPM의 세계, 이제는 전설이 되어버린 실화, 자본의 논리에 포획되지 않는 고집스러운 기술자의 이야기에 매혹되면 2시간 30분이 눈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완벽한 차를 만들기 위해서 쏟아 붓는 열정과 신념, 대결이나 경쟁의 결과가 아니라 스스로 만족할 때 비로소 경험하게 되는 승리감 같은 진귀한 감정들이 오래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가장 미국 관객들의 마음을 끌 수 있는 영화라 말할 수 있다. 딱 그 정도만.
넷플릭스로 한 데 뭉친 전설들의 갱스터 무비 <아이리시맨>
<아이리시맨>은 마틴 스코세이지가 연출을 맡고 로버트 드 니로, 알 파치노, 조 페시가 함께 출연한 마피아 갱스터 영화라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기념비적인 작품. 지미 호파 실종 사건을 중심으로 마피아 세계와 미국의 현대사가 맞물려 펼쳐지는 성공과 야망의 비장한 대서사시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인생의 무상함과 비애를 증폭시킨다. 단, 마틴 스코세이지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보수적인 아카데미 회원들의 성향과 넷플릭스와의 협업을 통해 완성한 점은 수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터. 지난해 아케데미 시상식에서도 넷플릭스와의 협업을 통해 완성한 <로마>는 작품상(감독상 수상)에 고배를 마셨다.
11개 부문으로 올해 최다 후보작 등극! <조커>
<조커> 토드 필립스 감독은 소외와 차별이 일상이 된 도시를 배경으로 조커의 기원을 추적한다. 불안과 망상에 시달리던 인물이 누적된 분노와 좌절 끝에 마침내 거대한 악을 상징하는 조커로 탄생하는 일련의 과정이 호아킨 피닉스의 압도적인 연기로 완성되었다. 총 11개 부문에 후보로 오르면서 올해 아카데미 최다 부문 후보작의 영광을 얻은 <조커>가 단 하나의 상을 받아가야 한다면 (골든 글로브에 이어서) 아마도 남우주연상이 아닐까.
소년의 시각으로 바라본 2차 세계대전! <조조 래빗>
<조조 래빗>에서 어린 아이의 눈에 비친 전쟁은 어떤 것일까! 겁쟁이 조조(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는 용감하다고 위대하다는 히틀러(타이카 와이티티)를 상상의 친구로 삼아 나치가 되기를 꿈꾸지만, 집에 숨어 있던 유대인 소녀 엘사(토마신 맥켄지)와 마주치고 혼란에 빠진다. 환타지와 현실을 분주하게 오가는 천진난만한 소년의 모험담은 귀엽고 깜찍하지만 그의 유년시절에도 어김없이 전쟁의 비참이 스며든다. 전쟁, 그것도 세계 1, 2차대전은 아카데미가 군침을 흘릴 소재. 하지만 이번엔 세계 1차대전을 배경으로 한 <1917>이 있어 수상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아카데미의 악연 종지부?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할리우드>
딱 10편만 만들고 은퇴하겠다는 할리우드의 악동 쿠엔틴 타란티노 감독의 9번째 작품. 여전히 장황하고 요란하지만, 할리우드 황금기로 돌아간 이야기 속에는 노스텔지어가 담겼다. 샤론 테이트 살인 사건에 대한 배경 지식이 풍부한 미국 관객들에게는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브래디 피트의 능청스러운 조합이 더 즐거웠을 법하다. 이미 골든 글로브에서 작품상(코미디/뮤지컬 부문), 남우 조연상, 각본상을 수상했다. 쿠엔틴 타란티노 경우, 단 한 번도 작품상을 받지 못했는데, 할리우드 영화 산업의 향수를 불러 일으킨 이번 영화는 어떤 결과를 낳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가장 늦게 도착한 셈 멘더스의 전장 스토리 <1917>
작품상을 포함하여 감독상, 각본상, 촬영상 등 총 10개 부문에 후보로 오른 샘 멘데스 감독의 신작. 1917년, 독일군의 함정에 빠진 아군을 구하기 위해 적진을 뚫고 달려가는 두 영국인 보병의 하루를 따라간다. 골든 글로브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현재 가장 유력한 아카데미 작품상 후보로 떠올랐다. 이미 셈 멘더스 감독은 <아메리칸 뷰티>(1999)로 작품상을 받은 이력의 주인공. 20년 만에 작품상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지 기대를 모은다.
노미네이트부터 놀라운 기록! <기생충>
칸 국제 영화제 황금종려상과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을 모두 석권한 작품은 영화사상 1955년 델버트 만 감독의 <마티>가 유일하다. 이제껏 아카데미에서 아시아인 감독이 연출한 영화가 작품상을 수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후보에 올랐던 작품은 역대 총 8편. 그러나 <와호장룡>(2000)과 <라이프 오브 파이>(2012)조차 작품상에는 실패했고, 대신 <브로크백 마운틴>(2005)과 <라이프 오브 파이>로 동양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이안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했다. 이런 상황을 고려, 개인적으로 국제영화상은 확정인 걸로 알고, 작품상 대신 감독상에 은근한 기대를 걸어본다.
지난 1월 12일(현지시간) 제92회 아카데미 시상식 후보 발표가 있었다. 작품상 후보의 맨 마지막을 장식한 건 바로 <기생충>. 한국계 배우인 존 조의 발표라 더 의미가 남달랐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시상식 당일, <기생충>의 수상 소식이 들렸으면 하는 바람은 있지만 노미네이트 된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기쁘다. 그해 최고의 영화가 작품상 수상작으로 국한되지 않기 때문. 후보에 오른 모든 작품이 그해 최고의 영화라는 건 이견이 없을 것이다. 축제 분위기로 사싱식의 결과를 기다려 보는 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