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권택, 안성기, 박찬욱, 김기영에 이어 CGV아트하우스가 전도연 헌정관을 연다. 여성 인물로는 최초다. <접속>(1997)부터 <생일>(2018)까지 18편.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 동안 전도연은 한국영화를 지피는 불이었다. 타오르기를 멈추지 않는 성실함, 어디로 튈 지 모르는 캐릭터의 변신과 진화, 끊임없이 자신을 세련하는 뜨겁고 엄격한 장인의 태도가 지금껏 ‘전도연의 한국영화’를 만들어 왔다. 헌정관 개관을 기념해 CGV아트하우스가 준비한 전도연 마스터피스 특별전에서는 <접속> <해피엔드> <밀양> <멋진 하루> <무뢰한> 다섯 작품을 상영한다. 이 작품들을 중심으로 어느새 영화가 된 배우, 전도연의 궤적을 간략히 돌아보았다.
김소미 |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제각기 고유하고 무모한, 영화의 틈새가 궁금하다
‘사랑’으로 포문을 열어 자신의 자리를 만들기까지 <접속> <해피엔드>
사랑을 확인하기가, 사랑을 믿기가 점점 불능한 시대. 전도연은 관객 대신 그 절망의 천장을 두드리는 배우였다. 전도연은 언제부터 한국영화계에서 사랑의 화신이 되었을까. 호기롭고 처절하고 비실용적이며 때로는 자기 파괴적이기까지 한 사랑을 그 누구보다도 미묘하고 정확하게 옮겨주리라 믿게 되는 배우. 그녀라면 존재하지 않던 장면의 행간에 숨을 불어넣어 우리 감정의 비밀을 밝혀주리라 고대하게 만든다.
90년대 텔레비전 드라마와 CF를 통해 트렌디한 이미지로 인기를 얻은 전도연은, 개성과 취향의 가치가 대두한 대중문화의 흐름 속에서 환영 받는 존재였다. 대중은 그녀에게 자연스러움, 생기, 독립성과 같은 도시적 감수성을 엿봤다. 활짝 웃거나 소리칠 때, 엉엉 눈물을 흘릴 때 그녀는 살아있는 사람의 표정을 보여주는 스타였다. 그런 전도연이 <접속>으로 첫 스크린 데뷔를 치렀을 때, 사라 본의 ‘A Lover’s Concerto’와 함께 서울의 밤거리로 발을 내딛는 그녀는 곧 PC 통신의 낭만에 흠뻑 취한 도시인의 자아가 되었다. 서울 관객 80만을 동원한 1997년 최고 흥행작인 <접속>은 멜로드라마의 주역으로서 전도연을 향한 신뢰를 단박에 증명한 영화다. 이후 전도연은 섣불리 헛발을 내디딘 적이 없다.
비련의 멜로드라마 <약속>(1998)으로 완연한 성숙을 시도했고, 직후 <내 마음의 풍금>(1999)에서 열일곱 산골 마을 소녀로 분해 관객을 놀라게 했다가, <해피엔드>(1999)에서는 어느 평범한 서울의 한 복도식 아파트에서 정장 차림에 머리를 틀어 올리고 유유히 출근길에 나섰다.
수완 좋은 영어 학원 원장이자 한 아이의 엄마, 직장을 잃은 샐러리맨의 아내, 그리고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여자… <해피 엔드>는 전도연의 전매특허인 ‘사랑하기’가 지금부터 한층 더 복잡한 모순덩어리로 증식할 것임을 예고하는 기폭제 같았다. 액션의 주도권이 배우 최민식에게 슬며시 기울어져 있었음에도, 여성 주인공 보라 캐릭터는 당시 충무로가 전도연에게 엿보는 욕망, 그리고 딜레마적 면모를 생생하게 드러낸다는 점에서 배우의 매력을 빛내기에 충분했다. 그때부터 였을 것이다. 한국영화계에 전도연만의 자리가 따로 있는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자신이 맡은 인물에게 손쉬운 연민을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내면에서 샘솟는 지극히 인간적이고 부끄러운 열망까지 헤아리게 만드는 전도연의 마력이 걷잡을 수 없이 스크린을 장악해갔다. 그녀는 연기를 잘하기 이전에, 그저 잘살아 보고 싶을 뿐인 평범한 인간의 마음을 깊이 이해하는 배우처럼 보였다. <해피엔드>를 거쳐 밀레니얼을 걸어 나간 그녀는 자신이 무얼 가장 잘 알고, 또 무얼 가장 잘하는지 명민하게 익힌 듯 흔들리지 않고 스스로가 부여한 숙제를 극점으로 몰아붙였다.
코미디(<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누아르(<피도 눈물도 없이>), 시대극(<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판타지(<인어 공주>), 통속 멜로드라마(<너는 내 운명>)까지. 전도연의 첫 액션 도전으로 화제가 됐던 <피도 눈물도 없이>(2000)에서 조차 그녀는 주인공 수진의 동력이 사랑의 정념임을 잊지 않았다. 거창한 장르적 야심이 그녀를 이런 행로로 이끈 것은 아닐 터다. 사랑의 울타리 안에서 야생동물처럼 날뛰고 싶은 에너지가, 컨셉과 장르를 가리지 않고 그녀를 이곳저곳에서 내달리게 했을 것이다. 세간은 이를 뭉뚱그려 “멜로 퀸”이라는 수식을 붙이거나, 한편으로는 도무지 다음 행보를 가늠할 수 없다며 호기심을 보탰다. 그만큼 그녀는 분명히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가까이 다가가면 스르르 옷깃을 휘날린 채 한걸음 달아나버리는 배우였다.
전도연의 연기 인생의 분기점을 마련하다! <밀양>
그러다 <밀양>이 찾아왔다. 전도연은 <해피 엔드>의 보라와 <밀양>의 신애를 배우 인생에서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꼽은 적 있다. “<해피 엔드>의 최보라는 배우의 길을 열어준 캐릭터고, <밀양>의 신애는 그때까지와 다른 연기 인생을 걷게 해준 캐릭터”(<씨네21>) 라는 이유였다.
<인어 공주>처럼 한없이 맑고 순수한 섬마을 해녀 캐릭터도 있었지만, 스크린 속 전도연은 대개 수난과 시련의 담금질을 겪어야 했다. <밀양>의 신애는 밀양이 가진 이름의 뜻(비밀 밀(密), 햇볕 양(陽), 비밀의 햇볕)에 감탄하는 아직 어딘가 순진한 구석이 있는 대도시의 여자다. 그녀는 딴 여자와 바람을 피웠던, 죽은 남편의 고향에 아들과 단둘이 내려와 정착하려 한다. 신애의 선택은 지고지순한 사랑일 수도, 설명하기 힘든 오기일 수도 있다. 신애는 무사히 집도 얻었고 새 피아노 학원도 열었으며 자신에게 호의가 있는 카센터 사장 종찬도 만나게 되는데, 영화는 거기서 신애가 온순히 만족하도록 내버려두지 않는다.
그리고 여기서 전도연과 신애가 절묘하게 머리를 맞댄다. 신애는 손님이 없는 동네 옷가게에 들어가 인테리어를 환하게 바꾸면 장사가 잘될 거라 참견을 하고, 부동산 투자를 할 재력이 있는 양 괜히 땅 보러 다니는 시늉을 한다. 만만하게 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신애를, 배우는 슬프고 처연한 사람으로 해석하지 않았다. 전도연이 만든 캐릭터는 그 정도 허영과 자존심쯤이야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 아니겠냐고 삐죽거리는 것 같다. 그런 신애가 동네 아줌마들과 노래방에서 힘껏 몸을 흔들며 나름의 사회생활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는 바로 그 순간에, <밀양>은 아들이 사라지는 비극을 터뜨린다. 마치 신애 자신이 저지른 기만에 죄라도 받는 것처럼.
이후 그녀는 철저한 수난과 희생을 견딘다. 그런 의미에서 신애는 우화적 존재다. 남들보다 조금 덜 현실적인 여자, 그러나 교회 사람들보단 의심이 많은 여자. 복잡하고 모호한 신애를 객석에 납득시킨 것은 배우 전도연의 힘이었다. 하느님에게 잠시간 구원받았다가, 어느새 그 대상을 부정하고 능멸하려 애쓰기까지, 전도연은 <밀양>에서 한 번도 이해 받으려 한 적이 없다.
순교자이자 영웅인 잔 다르크의 철제 갑옷 안에 16세 소녀가 들어있는 것처럼, 배우 전도연이 지닌 상반된 면모들이 자연스레 신애를 이끌었다. 영화의 시련과 싸워나가는 배우가 완고했기에, 정말로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던 한 여자의 이야기가 당위를 잃지 않았다. <밀양>에서 전도연은 표정을, 소리를, 몸짓을, 심지어는 피를 분출한 다음 자신을 텅 비워버리고 마침내 맑아지기까지 한다. 요컨대 그녀는 한 사람이 자신을 구원하고 정화하는 과정을 시각적이고 물리적인 체험으로 각인시킨다. 이것을 할 수 있는 배우는 많지 않다.
전도연이 만들어내는 미세한 기류 <멋진 하루> <무뢰한>
<밀양>으로 칸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전도연이 <멋진 하루>를 택했을 때, 반은 당황했고 반은 끄덕였다. 지극히 전도연다운 선택이었다. 어울리지 않는 스모키 화장을 하고 과거의 애인에게 떼인 돈을 받으러 경마장까지 찾아간 여자 희수. 그녀는 모멸감과 수치심에 자주 분을 삭이더니 어느새 남자 앞에서 다시 마음이 몽글거리는 듯 피식피식 웃곤 한다. 다른 무엇도 아닌 금전적인 이유로 서울 이곳저곳을 배회하는 남녀의 누추한 여정은 보여주는 것보다 보여주지 않는 게 더 많았다. 이렇게 감정의 끓는 점을 좀처럼 드러내지 않는 <멋진 하루>를 반짝이는 눈으로 따라갈 수 있었던 데에는 역시나 인물의 맥락을 확장하는 전도연의 해석법이 작용했다.
<멋진 하루>로 가뿐히 부담감을 털어버린 후 전도연은 <하녀> <카운트다운> <집으로 가는 길> <협녀, 칼의 기억>을 지나 <무뢰한>을 만났다. <멋진 하루>의 희수에게는 최소한의 숨 쉴 구멍이라도 있었지만 <무뢰한>의 혜경은 달랐다. 한때 잘나가는 텐프로였던 혜경은 이제 도시 변두리 술집에 출입하며 빚을 갚느라 허덕인다. 사랑하는 연인마저 수배자로 전락한 마당에 혜경은 이 세계의 밑바닥 어딘가에 들러붙은 채 곪아가는 중이다.
사실 영화의 외피부터 혜경에게 불리했다. 남성 중심적 전통을 지닌 누아르 장르에서 그녀는 우뚝 솟은 여성 캐릭터가 되어야 했다. 결과적으로 전도연이 연기한 김혜경은, <무뢰한>에서 가장 강했고, 가장 끈질겼으며, 무엇보다 그 누구에게도 쉬이 대상화되지 않으려는 듯 결코 방심하지 않았다. <멋진 하루>의 하정우처럼 <무뢰한>의 김남길 또한 상대 배우 앞에서 한껏 재기를 부릴 준비가 된 태세를 취했다.
의외로 쉽지 않은 상대였다. 연기가 액션-리액션의 총합이라면, 전도연은 언제나 이런 지점에서 빛을 발했다. 능글맞고 귀여워서 허를 찌르는, 어설픔 마저 무기가 되는 상대 배우의 액션에 전도연은 어떻게 한 수 위 리액션을 보여줬을까? 그녀의 무기는 솔직함이었다. 하정우와 김남길이 훅 치고 들어올 때 전도연은 불편함 혹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않았다. 밀릴 것 같으면 밀렸다. 그런 다음 그녀는 씩 웃었다. 관객은 그 순간마다 긴장했고, 거기에서 어떤 로맨스가 피어나고 있음을 감지했다. 전도연이 만드는 미세한 기류는 언제나 그 누구보다도 관객에게 가장 빨리 가 닿았다.
사람 전도연이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배우 전도연이 뛰어난 상상력으로 <무뢰한>에서 도덕이 부서진 시궁창의 삶을 살아가는 김혜경의 피로를, 그 야생성을 이해했음은 분명하다. 어쩌면 시나리오의 혜경은 영화에서 나타난 실체보다 훨씬 전형적인 인물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삶이 탁하고 우울해질수록 사람들이 서로를 불신할 수밖에 없음을 날카롭게 꿰뚫은 배우가 있었기에 혜경은 한국 누아르 장르에서 잊을 수 없는 여자가 됐다.
다시 이 글의 첫 문장으로 돌아가 보자. 사랑을 확인하기가, 믿기가 너무 힘든 시대에 전도연은 놀라우리만치 자신을 깎아가며 관객의 대리자가 되기를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가 실험하는 지속하는 한, 우리는 계속 보고 싶다. 비정하고 답 없는 세상에 처박혀 흐느끼거나, 혹은 마당 한 켠에 내리쬐는 햇볕 한 조각을 발견하거나. 그 어느 쪽도 괜찮다. 전도연이 있다면, 우리는 적어도 스크린 안에서나마 사랑을 갖가지 가능성을 계속해서 확신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