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달 27일 밤 서울 광진구 CGV강변 씨네&포레(CINE&FORET) 상영관. 푸릇한 잔디 위 마흔 개 넘는 푹신한 빈백이 관객들로 꽉 찼다. 그런데 이곳, 영화관이라기엔 조금 밝다. 주위를 둘러보니 은은한 조명 아래서 알록달록한 실타래와 끝이 뭉툭한 뜨개바늘을 든 관객들의 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전국 뜨개인들의 뜨거운 호응을 받는 CJ CGV ‘뜨개 상영회’ 현장이었다.
‘뜨개 상영회’는 뜨개질을 하면서 영화를 관람하는 이색 상영회다. 지난 1월 CGV에서 일회성 이벤트로 기획했는데, 반응이 폭발적이었다. 전국 뜨개인들의 열화와 같은 호응으로 예매가 시작되자마자 곧바로 전석 매진됐다.
이후 CGV는 ‘뜨개 상영회’를 매월 마지막 주 목요일, 전국 10여 개 극장에서 진행되는 정기 상영회로 확대했다. 첫 상영회 땐 대부분 관객이 20~30대 여성이었는데, 최근에는 남성과 중년까지 다양한 관객들이 극장을 채운다.

이날 스크린에 펼쳐진 영화는 존 카니 감독의 <비긴 어게인>. 2014년 국내 개봉한 감미로운 음악 영화다. 당시 독립 영화임에도 300만 관객을 넘어서며 흥행했으니, 이날 모인 사람들에게도 ‘이미 본 영화’일 확률이 높다. 뜨개질하면서 보기엔 이런 영화가 최고라고 했다.
두 주인공의 감미로운 밴드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한 땀 한 땀 하나뿐인 작품들이 만들어졌다. 니트, 목도리 등 의류부터 티코스터, 휴대폰 커버, 인형 같은 소품까지 종류도 다양했다.
상영관 곳곳에서 뜨개인들이 서로 꿀팁과 기술을 나누며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 중엔 뜨개상영회를 처음 기획한 CGV강변 임다솜 매니저도 있었다. 자타가 공인하는 ‘뜨개인’ 답게 직접 뜬 손가방과 장갑 등을 가지고 와 관객들의 이목을 끌기도 했다. CJ뉴스룸이 임다솜 매니저를 만났다.

‘뜨개상영회’는 어떻게 기획하셨나요?
‘뜨손실’이라는 말 들어보셨나요? 뜨개질할 시간을 손해 볼까 봐(손실) 친구를 만나거나 밖에 나가는 외부 활동을 자제한다는 말이에요. 뜨개인들 사이에선 자주 쓰는 단어랍니다. 저 역시 뜨개질을 사랑하는 뜨개인으로서, ‘뜨손실’ 없이 참여할 수 있는 이벤트가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뜨개질을 하면서 영화를 보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죠. 마침 찾아보니 덴마크, 독일 같은 나라에선 이미 인기라고 하더라고요. 최근 국내에서도 젊은 세대 사이 뜨개질이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으니 한번 도전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평소 하시던 직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들었어요.
맞아요. 제 직무는 현장관리, 고객 서비스 관리입니다. 뜨개질이나 이벤트 기획과는 무관하죠.
하지만 ‘뜨개상영회’는 평소 저의 업무 고민과도 맞닿은 기획이었어요. CGV강변에 씨네&포레(CINE&FORET)라는 예쁜 상영관이 있는데, 기대만큼 인지도가 오르지 않는 점이 항상 아쉬웠거든요. 이런 좋은 상영관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고민과 전국 뜨개인들을 만나겠다는 저의 야심이 합쳐져 ‘덕업일치’를 이룬 셈이죠(웃음).
씨네&포레 상영관은 어떤 곳인가요? 간단히 소개해 주세요.
CGV강변 씨네&포레는 도심 속 푸르름의 가치를 전달하는 힐링 상영관입니다. 순록 이끼 벽면과 슬로프형 실내 잔디로 꾸며 마치 숲속에서 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주죠. 매트, 빈백, 카바나 3종류의 안락한 좌석과 개인 테이블이 준비돼 있어 캠핑장에서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상쾌한 기분을 느낄 수 있습니다.

뜨개상영회를 기획하는 과정에서 어려운 점은 없으셨나요?
보통 관객들은 어두운 곳에서 영화 보는 데 익숙하잖아요. 하지만 뜨개질을 하려면 상영관 내 조도가 어느 정도 확보돼야 했어요. 조도를 높이면 영화 상영에 방해가 되고, 낮추면 뜨개질에 방해가 되죠. 적당한 지점을 찾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CGV는 영화관이니, 무엇보다도 영화가 중심이 돼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고요.
오랜 설득의 과정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CGV강변 사이트 동료분들의 많은 도움으로 이렇게 정기 상영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흥행 비결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소속감’인 것 같아요. 뜨개질이라는 취미는 기본적으로 혼자 조용히 하는 일이지만, 함께 한다는 감각의 매력은 무시할 수 없잖아요.
그런 점은 영화와도 비슷해요. 극장에서 영화를 본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면요. 커다란 스크린과 최적의 음향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같은 공간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울고 웃는 경험이 의미 있잖아요. 뜨개질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했어요. 함께할 때 느끼는 유대감과 안정감이 있거든요.
뜨개질계 인플루언서인 43만 유튜버 ‘김대리’ 님도 많은 도움을 주셨고, 유명 뜨개 카페인 ‘바늘이야기’ 측에서도 뜨개상영회에 큰 애정을 가지고 홍보해 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뜨개인들 사이의 이런 연대감, 소속감이 비결이라면 비결인 것 같아요.

상영작은 어떤 기준으로 선정되나요?
오늘은 <비긴 어게인>이네요. 1회엔 <리틀 포레스트>, 2회엔 <그 시절 우리가 사랑했던 소녀>를 상영했어요. 이 영화들의 공통점은 우선 ‘조용하다’는 것입니다. 스펙타클하거나 손에 땀을 쥐는 반전 있는 영화는 제외했어요. ‘액션’ ‘스릴러’ ‘공포’ 장르는 뜨개질하면서 보기는 어려우니까요.
또 되도록 재개봉 작품 중에서 선정하기로 했어요. 한 번 봐서 줄거리를 아는 작품, 뜨개질에 집중하느라 잠깐 놓치더라도 흐름을 따라가기에 문제없는 작품이 좋을 것 같아서요. ‘ASMR’처럼 영화를 즐기는 거죠.
앞으로의 계획이 궁금합니다.
뜨개질뿐 아니라 세상의 모든 취미와 취향을 즐길 수 있는 ‘취미 상영회’를 기획하고 싶어요. 기존 영화관의 역할과 틀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공간으로 극장의 역할을 확장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