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카데미 시상식의 후보를 살펴보면 반가운 마음이 들거나 한숨을 쉴 때가 종종 있다. <퍼스트 리폼드>는 후자 쪽이다. 이유는 각본상 후보에만 이름을 올렸기 때문. 이 영화가 그렇게 냉대를 받았어야 했나? 1970~80년대 자신만의 아우라를 펼친 폴 슈레이더 감독의 완성도 높은 연출력, 철저한 내면 연기의 극강을 보여준 에단 호크의 호연만 놓고 보더라도 최소한 감독상과, 남우 주연상 후보에는 올랐어야 했을 터. 아쉬움을 뒤로하고 뒤늦게 국내 관객을 만날 <퍼스트 리폼드>의 숨겨진 매력을 소개한다.
박지한 | CGV아트하우스 큐레이터
영화가 선물해준 빛나는 순간을 나눕니다
폴 슈레이더가 돌아왔다!
1946년생. 한국식 나이로 74세가 된 노장 감독 폴 슈레이더는 신작 <퍼스트 리폼드>에 이르러 새로운 경지에 진입했다. 지금 막 터질듯한, 당장이라도 비등점을 돌파 해릴 것 같은 긴장감을 영화 전반에 불어넣으면서도, 덜컥 멈추어서 자신을 둘러싼 세계를 성찰하고 묵상하는 구도자적 태도가 공존하는 신작은 여전히 그가 논쟁적 작가임을 여실히 드러낸다.
폴 슈레이더는 마틴 스콜세지와 함께한 일련의 작품들만으로도 이미 세계영화사에 등재된, 거대한 족적을 남긴 영화인이다. 그는 마틴 스콜세지의 초기 걸작들인 <택시 드라이버>(1976), <성난 황소>(1980) <그리스도 최후의 유혹>(1988)의 각본을 썼다. 1978년 영화 <블루 칼라>부터는 감독으로 전향해 감독과 각본을 겸직했는데 특히 <아메리칸 지골로>(1980)는 시대를 상징하는 스타일리시한 스릴러 영화였다.
허나 이후의 영화들이 직접적인 주목의 대상이 된 경우는 적어도 국내의 경우 그리 많지 않았다. 198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꾸준히 작품을 만들어왔지만 정식으로 소개된 작품들마저도 수면 아래로 떠돌았다. 그러나 2017년 폴 슈레이더는 <퍼스트 리폼드>로 멋지게 돌아왔고, 이 신작은 평단과 관객들에게 논쟁의 대상으로 떠올랐다. (<퍼스트 리폼드>의 국내 정식 개봉은 2019년이나 2017년 베니스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했던 영화다.)
부패한 교회(세상)를 바라보는 날 선 시선
이미 기업형 교회가 되어버린 거대 교단 ‘풍성한 삶’ 교회의 전신이자, 올버니 주의 가장 오래된 교회로 관광지가 되어버린 덕에 실제 신도는 많지 않은 교회 ‘퍼스트 리폼드’의 담임목사 톨러(에단 호크)는 지금 병을 앓고 있다. 실제로 ‘어떤’ 질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점점 쇠약해져가는 육체를 붙들고 그는 일기를 쓴다. 자신 안의 욕망, 덧없는 욕구, 자만심, 진실하지 못한 순간들을 기록하고 그것을 지우지 못하게 손으로 쓴다. 그러던 어느 날 신도 메리(아만다 사이프리드)의 부탁으로 극렬 환경운동가인 그녀의 남편을 상담하게 된 톨러 목사는 점점 자신을 둘러싼 세상을 보는 시선이 변화함을 느낀다.
<퍼스트 리폼드>는 내용을 요약하는 것이 어느 순간부터 무의미해지는 영화다. 그렇게 잰 체하지도, 빈약한 이야기를 성경 구절로 뒤덮어 난해한 척, 있어 보이는 척 하지도 않는다. 이야기의 발단을 명료하게 설명할 뿐만 아니라, 친절하고 확고한 표현으로 오독의 가능성을 줄인다.
그럼에도, 영화를 보는 내내 끊임없이 해소되지 않는 질문들이 생겨난다. 그 누구보다도 독실하고 신실한 목사인 톨러는 관광지가 된 교회의 가이드 이상의 역할을 해내지 못하고, 신자들의 영혼을 치유하는 데 관심이 없는 본당 주임신부는 물질적 풍요로움에 매진한다. 영화 속에서 언급되는 종교개혁가이자 학자인 ‘마틴 루터’는 면죄부를 판매하던 부패한 로마 카톨릭을 개혁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인물이다. 그러나 본당의 주임신부는 마틴 루터가 성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화장실에서 썼다는 일화를 인용하면서 낄낄거릴 뿐이다. ‘외피적’으로는 주의 권능을, 주의 역사함을, 주의 사랑을, 주의 말씀을 둘러쓰지만 실제로는 ‘부’를 위해 에너지 기업의 사장이자 교회의 주요 물주를 만나보라는 제안을 하는 본당의 태도는 톨러에게 있어서 자신이 지금 하는 일이 무엇인지 회의에 빠지게 한다.
세상을 위한 그만의 성스러운 의식?
극렬 환경운동가와의 만남과, 교회의 주요 후원자인 에너지 개발기업의 대표는 이 작품이 제기하는 또 다른 문제 의식인 ‘환경’과 연결되어 있다. <퍼스트 리폼드>는 톨러의 입을 빌려 세계 파괴적인 행위에 교회가 침묵하고 있음을 매섭게 지적한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대답 없는 질문이 발생한다. (이것마저도 주의 안배인가.) ‘주가 직접 이 세계를 정화할 때까지 기다려야하는가’ 아니면, ‘주가 움직이기 전에 이 세계를 정화하기 위한 노력에 나서야 하는가’. 두 입장 모두 논리가 서있고, 옳고 그름으로 섣불리 나눌 수가 없다.
하지만, 여기서 감독의 성향을 한 번 생각해볼 필요가 있는 것 같다. 폴 슈레이더의 영화 속 인물들은 자신이 우스꽝스러워지더라도, 자기의 신념이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자기의 믿음에 타인들이 응답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정의가 사회에서 용인 받지 못하더라도, 그게 옳다면 믿고 나가는 사람들이었다. <퍼스트 리폼드>의 주인공 톨러 역시도 <택시 드라이버>의 트래비스(로버트 드니로)등 폴 슈레이더적 인물들의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톨러는 직접 행동의 영역으로 돌진하게 되는 것.
그러나, 마지막 순간. 세상을 근심하던 노장 감독은 덜컥 멈춰서 고요한 명상으로 우리를 인도한다. 이 라스트만으로도 <퍼스트 리폼드>는 인생의 113분 동안 스크린을 바라보는 행위가 여전히 숭고할 수 있음을 증거한다.
영화 전반에 걸쳐 <퍼스트 리폼드>의 화법은 명확했지만,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마지막은 관객에게 보다 생각의 여지를 남긴다. 하지만 면밀히 살펴보면 극 중 스토리와 형식은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과거 그가 사랑하는 작품의 장면과 스토리 라인을 가져와 자신의 스타일로 표현한 것. 관객으로서 영화를 알아가는 재미를 느끼고 싶다면, 마틴 스콜세지의 <택시 드라이버>를 비롯해 잉그마르 베르히만의 <겨울빛>, 로베르 브레송의 <시골 본당 신부의 일기>,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희생> 등을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