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가장 아름다운 왕족으로 널리 알려진 오스트리아 제국의 엘리자베트 황후. 국내에선 옥주현 배우가 주연을 맡아 널리 알려진 뮤지컬 <엘리자베스>의 주인공으로 잘 알려져 있다. 오스트리아에선 관광 상품으로도 만날 수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지만, 국내에서는 그녀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다.
이동윤 | 영화 평론가
툭하면 영화 보고 운다. 영화의 본질은 최대한 온몸으로 즐기는 것
영화 <코르사주>는 풍문으로만 전해져 오던 엘리자베트의 세밀한 감정 너머 그녀의 본 모습을 가감 없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한다. 먼 유럽의 황후지만, 그리 낯설지 않게 다가오는 <코르사주>의 엘리자베트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본다.
오스트리아의 가장 유명한 역사적 인물, 황후 엘리자베트의 베일을 벗기다
엘리자베트는 1827년 크리스마스이브, 바이에른 국왕 막시밀리안 1세 요제프의 외손녀로 태어났다. 바이에른 왕국을 지배하는 공작 가문의 자손이었지만, 딸의 교육에 그리 관심을 두지 않았던 부모 덕분에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성장할 수 있었다. 15세가 되던 해 이종사촌인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청혼을 받아들여 혼인한 그녀는 2년 뒤 황후 자리에 올라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왕비로 즉위한다.
결혼 후, 본격적인 황실 예법 교육을 받아야 했던 엘리자베트는 보수적인 왕실 교육에 답답함을 느낀다. 특히, 그녀를 탐탁지 않게 여겼던 시어머니는 더욱 엘리자베트를 옥죄며 갈등을 이어가는데, 갈등이 정점에 다다른 건 그녀의 첫째 딸과 둘째 딸을 시어머니가 도맡아 양육하면서부터였다.
시어머니 조피 대공비는 엘리자베트와 자녀들을 철저히 분리시키고 모든 관계를 단절시켰다. 사랑하는 자녀들을 볼 수 없던 엘리자베트는 결국 궁을 벗어나 여행을 통해 현실로부터 벗어나려 했는데, 그 와중에 첫째 딸을 잃게 된다. 자녀를 잃은 상실감, 몸과 마음을 옥죄어 오는 왕실의 보수적인 분위기, 거기에 남편의 외도까지 겹치자 그녀는 우울증을 앓으며 비극적인 삶의 굴레에 갇혀 버린다.
엘리자베트가 고백하는 여자 나이 40세의 인생이란
영화 <코르사주>는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 40살의 생일을 맞이하기 직전의 엘리자베트로부터 시작한다. 1872년 시어머니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그녀의 우울증과 불안한 마음은 좀처럼 잦아들지 않았고, 유일하게 태어날 때부터 양육을 맡았던 넷째 딸 마리 발레리에게 집착하며 간신히 삶을 버텨나간다. 그때부터 외모에 대한 집착 또한 심해져 거식증에 시달렸고, 날씬한 몸매를 유지하기 위해 코르사주를 더욱 강하게 옥죄었다.
그녀의 머리 스타일은 모든 유행을 선도하고 그녀의 아름다운 외모는 사람들의 관심을 한몸에 받지만, 정작 그녀는 황후로서 고정된 자신의 역할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 도피처럼 떠돌던 여행도, 유일하게 관심 갖던 승마와 펜싱도 그녀의 자유분방하고 섬세한 감수성을 위로하진 못한다.
엘리자베트로 현현한 비키 크립스
<코르사주>는 엘리자베트를 비극적 운명 속에서도 자유를 갈망하고 쟁취하려는 진취적 인물로 묘사한다. 비키 크립스는 화장기 전혀 없는 거친 피부에서부터 코르사주를 저며 매어 상처 난 등의 굴곡까지 온몸으로 엘리자베트를 현현했다.
제국을 대표하는 황후의 이미지에 머물러 있어야 했던 엘리자베트였지만, 영화를 통해 부활한 그녀는 이미지 너머로 자신의 욕망과 꿈을 그려내려 부단히 몸부림쳤던 인물로 각인된다. 그래서일까? 130년 전에 태어난 인물이지만, 그녀의 삶이 그다지 낯설지 않다.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의 삶 또한 ‘여성’으로서의 강요된 이미지가 강하게 지배하고 있으니까.
여성 영화의 새로운 장을 연 마리 크로이처 감독
<코르사주>의 감독, 마리 크로이처는 비엔나 필름 아카데미에서 영화를 공부했고,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 영화 편집자로 활동했다. 데뷔작인 <더 파더레스>(2011)로 제61회 베를린국제영화제 GWFF 장편 데뷔상에서 특별언급을 받았으며 <그루버 게츠>(2015), <내 발아래>(2019)로 다수의 영화제에서 감독으로서 연출력을 인정받았다. <코르사주>는 제75회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분에 출품되어 배우상을 수상했고, 현재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가장 유력한 외국어 영화상 수상작으로 거론되고 있다.
<코르사주>가 이토록 많은 찬사를 받을 수 있었던 것은 마리 크로이처가 그려낸 엘리자베트가 저항하고 투쟁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감독에게 40세의 엘리자베트는 더 이상 ‘미리 정해진 틀에 자신을 집어넣는 것이 불가능’해진 존재로 인식된다. 감독은 이를 회화와 영화의 차이로 해석해낸다. 초상화는 이상화된 미의 범위 내에서 엘리자베트를 그려낸다. 반면, 영화의 ‘움직임’은 그녀의 틀에 박히지 않은 몸짓과 강제할 수 없는 자유에 대한 열망까지 담아낸다.
세상을 전복시키진 못했더라도 온몸으로 저항하고 자유를 갈망하는 엘리자베트의 몸짓을 영화로 감상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정지된 이미지들은 절대 포착할 수 없는 그녀의 열망을 느끼기 위해서, 그리고 그 열망을 나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올겨울 엘리자베트가 우리에게 전하는 해방의 노래를 꼭 극장에서 만나보자.
- <코르사주>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대표적 인물 엘리자베트 황후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다.
- 주연을 맡은 배우 비키 크립스는 <2022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 최우수 연기상 수상을 비롯해 다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고 있다.
- 오는 12월 21일 개봉해 CGV 아트하우스 등 전국 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