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효연구원의 글로벌 스낵 도전기
태국 방콕 여행자라면 꼭 들른다는 쇼핑몰 ‘아이콘 시암’. 이곳 지하에 위치한 ‘디어터미(Dear Tummy)’ 마켓 스낵코너에 한국어가 적힌 신상 스낵이 등장했다. 미국의 유명 감자칩이 대세라는 태국에서 지난 9월부터 주요 소매점을 중심으로 태국의 소비자들을 만나고 있다고. 주인공은 인도네시아의 대표 발효음식 템페(Tempeh)로 만든 ‘O-right 템페칩’.
한국에 된장, 일본에 낫토가 있다면 인도네시아에서는 ‘템페’가 콩을 발효한 대표적인 건강식품으로 꼽힌다. 그런 템페를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스낵으로 탄생시킨 주인공, CJ제일제당의 발효연구원 ‘전진’님을 만나 보았다.
발효를 스낵에 담다
‘발효를 스낵에 담자’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템페칩. 왜 하필 ‘템페’였을까? 그 답변에는 장류의 발효 공정 연구를 담당했던 전진님의 오랜 고민과 템페의 특별한 가능성이 숨겨져 있었다.
“동남아시아 시장을 타겟으로 발효 연구를 진행하면서, 템페라는 재료에 주목하게 됐어요. 템페는 인도네시아에서 천 년 넘게 사랑받아온 전통 발효식품인데요. 단백질이 풍부하고 소화 흡수율이 굉장히 좋습니다. 그런데 대중적으로는 생소한 재료라 접근성을 높이는 게 필요했어요. 그래서 간편하고 쉽게 즐길 수 있는 스낵이 떠올랐습니다.”
그렇다면 수많은 형태의 스낵 중 왜 ‘칩’이었을까? 이유는 명확했다. 기획 초기부터 스낵의 정의를 새롭게 바라보고, 글로벌 시장을 철저히 분석한 결과였다고.
“스낵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어요. 우리가 흔히 아는 과자 형태, 핫도그 같은 냉동 간편식, 그리고 치킨이나 만두처럼 식사를 대체할 수 있는 형태요. 글로벌 확장성까지 고려한다면, 그중에서도 가장 간단하게 소비할 수 있는 Ready-to-Eat 형태가 최적이라고 봤죠. 그래서 과자, ‘칩’으로 결정했어요.”
글로벌 시장을 염두했기에 생산지 역시 글로벌에서 찾았다. 발효식품의 까다로운 특성으로 생산과정 또한 만만치 않았다. 템페는 자연적으로 발생하는 미생물에 의존하는데 온도, 습도, 염도와 같은 환경 조건에 따라 그 맛이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달라진다. 한국에서 수차례 테스트했지만, 기후와 환경이 전혀 다른 해외에서는 예상치 못한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발효 조건을 수치적으로 완벽히 조성했는데도 예상치 못한 문제가 계속 발생했어요. 문제를 찾고 해결하는 데만 장장 3개월이 걸렸죠.”
템페의 평균 발효주기는 *약 48시간. 그 시간동안 문제가 발생하는 지점을 찾는 게 가장 큰 과제였다. 수십 번의 실험을 반복하며 데이터를 쌓아갔지만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고.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고, 끝까지 해답을 찾아나갔다.
*일반적인 주기는 7일로, CJ제일제당의 특허 발효 공정기술을 사용했을 때 48시간로 단축하는 것이 가능하다.
“한 번은 새벽 늦게까지 발효 상태를 점검한 뒤 공장을 나왔는데, 주변이 온통 깜깜하더라고요. 인기척 하나 없는 곳에서 택시를 찾아 헤매던 그 밤길이 아직도 생생해요.”
글로벌의 또다른 장벽
고된 밤과 시행착오의 시간들 끝에, 안정적인 품질을 확보하며 글로벌 시장에 도전할 준비를 마친 템페칩. 그런데 왜 태국을 첫 출시국으로 선택했을까? 동남아시아의 중심지로, 아세안 시장 확장에 최적화된 국가이기 때문이라고. 게다가 동남아 가공식품 수출 1위에 걸맞은 제조 인프라도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글로벌 소비자에게 우리 제품을 선보이기에 완벽한 테스트 시장이었어요. 관광대국이라는 이름이 붙는 만큼 현지 소비자는 물론, 방콕을 방문하는 전 세계 관광객에게도 자연스럽게 노출될 수 있었죠. 성장가능성을 판단하기에 제격이었습니다.”
출시국이 결정된 뒤, 이제 남은 건 맛이었다. 후보군만 20가지 넘는 가운데 최종 선택된 맛은 스리라차, 트러플치즈, 숯불갈비 그리고 볶음김치. 트러플치즈는 글로벌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스리라차는 태국의 매운맛 트렌드를 반영하기 위해, 숯불갈비와 볶음김치는 한국적인 감성을 담았다. 다만, 아쉽게 빛을 보지 못한 게 바로 카야토스트맛이다.
“사전 소비자조사에서 ‘카야토스트맛이 인상적이지만, 태국은 매운맛이 유명하다’는 피드백이 있었어요. 처음엔 긍정적인 의견으로 해석했죠. 그런데 나중에 현지 바이어가 이게 사실 부정적인 반응이라고 알려주더라고요.”
“태국분들은 직접적으로 싫다거나 별로라고 말하지 않는 문화가 있어요. 대신 완곡하게 돌려 표현하는 게 일반적인데, 이 문화적 미묘함을 몰라 한참 뒤에야 카야토스트맛이 실패라는 걸 깨닫고 적잖이 충격을 받았죠.”
현지 소비자의 입맛뿐만 아니라, 그들의 표현 방식, 문화적 뉘앙스까지 이해하는 것이 글로벌 진출의 핵심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그렇지만, 작은 실패는 글로벌 스낵으로 발돋움하기 위한 자양분으로 돌아왔다.
“우리가 상상한 글로벌 소비자가 아닌 ‘진짜’ 현지 소비자는 어떤 문화 속에서 어떤 것에 익숙한 지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는 걸 항상 되새기고 있어요.”
글로벌 스낵 출시, 사내벤처라 가능했다!?
이 모든 도전이 가능했던 배경에는 사내벤처 프로그램이 있다. 연구원이었던 전진님이 신제품 기획과 개발, 글로벌 생산과 유통까지 모두 경험할 수 있었던 이유, 바로 CJ제일제당의 INNO100 프로젝트. 2022년, INNO100 7기에 선정된 후 아이디어 제안부터 함께한 김창위님, 마케팅 전문가 서나현님, 그리고 INNO100 1기로 바삭칩을 탄생시켰던 이지선님까지, 전진님을 포함해 총 4명으로 구성된 New Snack Innov. Lab이 결성됐다.
“초기엔 매 순간이 도전이었어요. 말도 잘 통하지 않는 나라에서, CJ제일제당을 모르는 업체들에게 템페칩의 가치를 설명하는 일이 정말 쉽지 않았죠. 혼자였다면 절대 해낼 수 없었을 겁니다.”
사업 초기, 54개의 스낵 제조업체를 찾아가 상품화를 논의하며 팀원들과 더욱 끈끈한 호흡을 다졌다. 김창위님과는 수많은 미팅을 통해 ‘베테랑 만담 듀오’처럼 자연스러운 협업 스킬을 터득했다고.
“눈빛만 봐도 ‘지금 말이 끊겼구나’나 ‘영어 단어가 생각 안 나는구나’ 같은 걸 바로 알아채는 수준이 됐어요.”
적은 인원으로 신사업을 추진해야 하는 사내벤처 특성상, 한 명의 부재가 팀 전체에 미치는 영향이 커 역할 공유는 필수였다. 어느새 모두가 자연스럽게 직무를 넘나들며 일하게 되었다고 말하는 전진님.
“갑작스럽게 한국에 들어와야 했던 적이 있어요. 그때 김창위님과 서나현님이 실험가운을입고 저를 대신해 주셨습니다. 반대로 제가 마케팅 업무를 맡아야 했던 순간도 있었죠. 비록 몸은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그 어떤 팀보다도 끈끈하게 결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순간이 올 수 있던 게 아닐까요?
도전과 실패의 연속, 나는 계속 전진한다!
“기존에 시도하지 않았던 사업을, 한국도 아닌 태국에서 준비하는 모든 과정은 도전 그 자체였어요. 크고 작은 실패들을 겪으며 ‘과연 출시가 가능할까?’ 스스로 의심한 적도 있지만 결국 해냈죠. 템페칩 첫 봉지가 나오던 그 순간은 결코 잊을 수 없어요. 가장 큰 배움은 도전, 그리고 실패예요. 전 계속 전진할 겁니다.”
업무 속 발견한 아이디어로 ‘글로벌 스낵시장 도전’이라는 원대한 목표의 첫 챕터를 마무리한 지금. New Snack Innov. Lab의 동료들은 각자의 목표를 향해 타부서로 이동했다. 그리고 전진님은 태국법인에서 ‘템페칩’ 2.0를 준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