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많은 기업들은 글로벌 시장을 적극 개척하며 성장해 왔다. 그런데 해외에 나갈 때마다 굳이 드러내지 않거나, 가급적 숨겼던 사실이 있다. 바로 한국 기업, 한국 제품이라는 점이다. 시장에서 한국에 대한 인지도가 낮고 신뢰가 제대로 형성되지 않았기에, 오히려 가치를 낮게 평가받는 ‘코리아 디스카운트’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근엔 정반대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한국이기에 관심을 받고 러브콜까지 받는 ‘코리아 프리미엄’이 생기고 있다. 더 놀라운 점은 문화 산업이 그 변화의 진원지이자 중심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 시장에서 기존의 사고방식에 균열을 내고, 나아가 커다란 변화까지 만드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기적처럼 이 일이 이뤄지며 분위기가 급변했다. 전 세계 어디에서나 K프리미엄이 작동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한 한류가 폭발적으로 확산되고 있다.
김희경|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 영화평론가
현재 한국예술종합학교 겸임교수이자 영화평론가, 한국영화학회 이사 등으로 활동하며 한국 대중문화 산업 관련 칼럼을 연재 중이다.
한국 영화의 틀을 벗어난 한국 영화
K프리미엄은 다양한 양상과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그 변화는 이전과 확연히 달라진 한국 콘텐츠의 특성을 통해 체감할 수 있다. 지난 5월 열린 칸 국제영화제에서 각각 남우주연상(송강호), 감독상(박찬욱)의 영예를 안은 영화 <브로커>와 <헤어질 결심>을 살펴보면 변화를 명확히 인지할 수 있다.
두 작품 모두 순수 국내 자본으로 제작된 ‘한국’ 영화지만, ‘한국’ 영화의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있다. <브로커>는 일본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가 연출을 맡았으며, <헤어질 결심>엔 중국 출신의 배우 탕웨이가 출연했다. 대대적인 인적 확장을 통해 K콘텐츠 안에 다양한 문화적 요인을 배치하고 융합한 글로벌 프로젝트인 것이다.
글로벌 프로젝트는 두 작품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CJ ENM이 미국 메이저 스튜디오, 제작사와 함께 공동 기획·제작하는 영화만 총 15편이 넘는다. 유니버설픽쳐스와는 <써니>와 <극한직업>을 미국 리메이크 작품으로 함께 만들고 있다. 영화 <기생충>도 드라마로 재탄생한다. <빅쇼트>, <석세션>으로 유명한 아담 맥케이 감독이 봉준호 감독과 함께 프로듀서로 참여한다.
글로벌 프로젝트의 영역은 영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드라마, K팝 등 모든 한류 콘텐츠가 글로벌화의 대상이 되고 있다. 스튜디오드래곤은 미국 제작사 스카이댄스와 손잡고 드라마 <호텔 델루나>를 미국 드라마로 리메이크한다. K팝의 DNA를 가진 남미 아이돌 그룹도 탄생한다. CJ ENM은 HBO 맥스, 엔데몰 샤인 붐독과 손잡고 남미에서 오디션 프로그램을 기획·개발하고 있다.
글로벌 프로젝트는 달라진 한국 콘텐츠의 위상을 보여준다. 해외 주요 크리에이터들이 참여할 만큼 한국 콘텐츠가 일정 수준 이상에 도달한 것은 물론 충분히 매력적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메이저 스튜디오와 제작사들의 적극적인 러브콜을 받고 있다는 점도 한국 콘텐츠가 글로벌 시장의 중심에 섰다는 점을 잘 드러낸다. 그렇다면 K프리미엄으로 상징되는 이 거대한 변화의 물결은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된 걸까?
튼튼한 뿌리 위에 맺힌 열매, K프리미엄
한국 문화 산업에서 중요한 변곡점을 만들어냈던 결정적인 장면들이 떠오른다. 그 출발점이 된 1995년으로 가보자. 당시 CJ그룹은 미국 애니메이션 영화 제작사 드림웍스 설립에 3억 달러를 투자하며 문화 사업에 처음 진출했다. 한국이 문화 산업을 키우고 나아가 글로벌 수준까지 발전시킨다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했던 시절이다. 그런데 CJ ENM은 과감한 도전 정신으로 소중한 씨앗 하나를 심었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장면은 CJ ENM의 첫 글로벌 프로젝트 <설국열차>(2013)가 제작되던 순간을 꼽을 수 있다. 이 영화엔 미국 할리우드 스타들이 출연한 만큼 막대한 예산이 투입됐다. 하지만 해외 투자를 받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어 좌초될 뻔했다. 이때 CJ ENM은 제작비 전액을 지원하기로 결정했고, 덕분에 <설국열차>와 봉준호 감독은 전 세계에 널리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됐다. 당시의 투자와 노력은 훗날 오스카 시상식에서 봉 감독의 <기생충>이 호명되는 찬란한 순간으로 이어졌다.
결국 K프리미엄은 그렇게 지속적으로 쌓아 올린 시간과 투자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다양한 국가의 수많은 제작사, 크리에이터들과 일일이 관계를 맺고 신뢰를 형성해 만들어낸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순히 관계 맺기에 그치지 않았다는 점이다. 외부의 자원을 끌어와 내부의 자원과 연결하는 작업을 정교하면서도 빠르게 진행했다. 기업과 국가의 외부에 존재하는 인적 자원과 네트워크를 최대한 확보해 내부의 자원처럼 효율적으로 가용할 수 있게 하고, 동시에 내부 자원과 하나의 거대 시스템으로 묶어 막강한 시너지를 만들어냈다.
이는 미디어 경영 전략에서 자주 언급되는 ‘자원준거관점(Resource based view)’과도 연결된다. 자원준거관점은 기업이 경쟁력 있는 자원을 오랜 시간 켜켜이 쌓고 축적해, 다른 기업들보다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한다는 이론이다. CJ ENM은 국내외를 가로지르며 자원을 확보하고 연결해, 국내는 물론 글로벌 시장에서도 우위를 점하게 됐다.
전 세계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한다. 왜 갑자기 한국 콘텐츠를 이렇게 잘 만들게 된 건지, 이렇게 인기를 얻게 됐는지 말이다. 하지만 ‘갑자기’라는 단어는 지금의 현상과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K프리미엄이라는 커다랗고 달콤한 열매, 그 이면엔 오랜 시간에 걸쳐 전 세계 곳곳에 뿌려진 작고 소중한 씨앗들이 있다. 그리고 땅속엔 결코 흔들리지 않을 만큼 튼튼한 뿌리가 내렸다. 앞으로 더욱 크고 달콤한 열매를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된다.